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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11년 사람여행 - 70. 여행의 룰을 깬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제천 수산⇒충주 살미](11.04.15.금)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11년 사람여행 - 70. 여행의 룰을 깬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제천 수산⇒충주 살미](11.04.15.금)

건방진방랑자 2021. 2. 17.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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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룰을 깬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

 

 

어제 저녁에 제천 수산면에서 잠자리 구하기에 실패했다. 사람여행을 떠난 지 보름 정도가 지났는데 보름 정도만에 처음으로 잠자리 얻기에 실패한 것이고, 2009년에 한 달간 진행했던 국토종단까지 합하여 생각해보면 도보여행 45일 만에 최초로 잠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수산면의 경우엔 교회가 두 군데나 있었고 마을 규모도 큰 편이었기에 당연히 얻게 될 거라 기대를 했었는데 그 기대가 부질없이 무너져 내리자 모든 의욕은 감쪽 같이 사라졌다. 아침만 해도 그렇게 신나고 행복할 수가 없었는데 반나절 만에 감정은 180도 바뀌고 말았다. 이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고, 여행이 재밌는 거겠지.

 

 

▲ 제천 수산 ⇒ 충주 살미

 

 

 

룰을 깨다

 

그나마 다행히도 바로 제천 시내로 나오는 버스가 있었고 어렵지 않게 찜질방을 찾았다. 들어오자마자 너무도 지친 나머지 몸만 따뜻한 물에 씻으며 추위와 냉대에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몸을 풀고 바로 잠에 들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하기 싫었고, 다른 무엇도 신경 쓰기 싫었다.

쥐죽은 듯 잤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음에도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러나 자는 내내 어제의 찝찝함이 나를 괴롭히더라. 어떠한 일이 있건 멈춘 곳에서 방안을 찾고 피치 못할 때엔 길에서 노숙하기로 한 원칙을 깼으니 말이다. 실제로 국토종단 때 공주 경천리에서 끝까지 버틴 결과 민가에서 자게 되는 행운을 누렸었고 안성에서도 끈덕지게 버텨서 교회에서 잘 수 있었다. 직면하고서 닥치는 상황들에 방법을 마련해보자는 생각으로 떠난 여행이었고 지금까지는 충실히 잘 지켜졌지만 어젠 그와 같은 룰을 깨고 도망치듯 떠났다.

 

 

 

맘은 몸에서 비롯된다

 

어차피 상황은 벌어졌으니 비겁하더라도 변명은 해야겠다. 어제의 경우는 몸이 천근만근 무거우니, 새롭게 도전해볼 마음도 일지 않았다. 단양에서 목사님과 생각이 잘 맞아 1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한 데다가 오후엔 무리하면서 걸었으니, ‘푹 자고 싶다!’는 한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더라. 맛있는 밥도, 가슴을 뛰게 하는 만남도, 행복에 젖어들게 하는 경치도 모두 필요 없었다. 오직 하나, 쉬고 싶었을 뿐이다.

흔한 말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고 하는데, 그때만큼 그 말이 절실하게 와 닿던 때도 없었다. 국가대표전 축구를 할 때마다 정신의 위대함을 연발하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건강한 육체를 전제로 깔고 하는 말일 뿐이다. 몸이 건강해야만 발랄하고 말랑말랑한 정신이 깃들 수 있다. 몸이 아프면 극도로 위축되어 나 하나만 생각하기에도 바쁘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에 대해 관심 가지라고, 마음을 열고 맞서 보라고 말해선 안 된다. 자신의 코가 석자인데 어찌 세상과 타자에 대해 관심 가질 수 있겠는가?

그처럼 지금껏 사람여행을 하면서 행복하게 걷고 거절당할지라도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만큼 특출 나서도 정신적으로 남다른 면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몸이 건강하니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맘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몸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어제 여행의 룰을 깼던 것은 이와 같은 기본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몸이 제 정상이 아니니, 가장 긴박한 순간에 위축되어 맞설 수가 없었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 '지금-여기'를 긍정할 수 있으려면 건강한 몸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용

목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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