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과 관광여행
8시가 못 되어 찜질방에서 나왔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35분이다. 어제 제천으로 나올 때 앞에 탄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7시 40분에 버스가 있고 한 시간마다 버스가 온다고 하셨다. 곧 오겠거니 기다리고 있는데 오지 않더라. 그래서 다른 버스 기사님에게 물어보니 9시 40분에 온다고 하시더라. 어젯밤 경황이 없어 잘못 들었나 보다. 이로써 두 시간 정도를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사람여행⑭: 관광여행자에게서 본 관광여행의 한계
정류장에서 여행자 한 명을 만났다. 이런 만남이야말로 예기치 않은 사건이 끼어든 경우다. 여행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엇나간 곳에서 새로운 인연과 엮이는 법이니 말이다.
행색으로 봐서는 사무실 직원 같았다.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잘 닦여진 구두를 신고 깃이 잘 다려진 세미정장을 입고 앙증맞은 작은 책가방을 멨다. 무스를 바른 머리엔 윤기가 돌았고 뽀얀 피부엔 생기가 흘렀다. 훈남이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집은 경남쪽이라고 하더라. 그곳에서 회사 생활을 하여 돈을 모았고 지금은 재충전할 겸 여행을 하는 것이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잠은 모텔에서 자고 지역 맛집에서 밥을 먹는단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건 ‘여행’이라기보다 ‘관광’이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여행은 자신의 계획이 늘 엇나갈 여지가 있는 것인데 반해, 관광은 자신의 계획에서 한 치도 엇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엔 지금처럼 새로운 인연과 사건이 수시로 끼어들어 계획이 바뀌게 되지만, 관광엔 그런 예외적인 일은 없다. 그 친구는 어제 제천에 와서 만 원짜리 한방 백숙을 먹고 사만 원짜리 모텔에서 잤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은 청평호에 간단다. 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노라니 예전에 했던 방송의 제목이 떠올랐다. ‘비교 체험 극과 극’
물론 이런 여행도 소중하다. 정말 쉬고 싶을 때, 그리고 열심히 산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을 때 이런 여행도 해야 하는 거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했던 ‘비노바 바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한계가 뚜렷하다. 돈으로 치장하는 여행을 하면 자신의 왜소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의식만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맛있는 음식을 먹어 배는 부르고, 좋은 풍경을 보아 눈은 즐겁지만 그 외엔 아무 의미나 감흥은 없다.
사람여행⑭: 여행엔 관광을, 관광엔 여행을
그렇다고 도보여행만이 최고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행이건 관광이건 장단점은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장점은 관광의 단점이고, 관광의 장점은 여행의 단점이다. 지금처럼 도보여행을 하다 보면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님에도 자는 곳이 목적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면 근처에 중요 관광지가 있어도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실컷 걸었지만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반쪽짜리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여행과 관광의 장점을 서로 섞어, 새로운 여행을 창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걸어서 이동하고 자는 문제도 민가에서 해결하여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 말이다(도보여행의 장점). 그리고 며칠간 그곳에 머물며 유명한 장소를 찾아가고 그 지역 특산물을 먹으며 그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체험한다(관광여행의 장점).
여행을 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여행 방법을 창안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이 사람을 만나게 되었기에 여행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제천으로 도망쳤기에 만난 인연, 이래서 인생은 아이러니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여행인 관광’을 꼭 해봐야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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