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시(因是)’라는 주체 형식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가진 주체, 즉 과거의식을 판단의 기준으로 맹신하면서 출현하는 고착된 자의식을 가진 주체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는 규정성이 외부(=특정한 공동체)로부터 획득한 것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나아가 이런 주체는 이런 규정성은 바로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자신이라고 여기게끔 하거나 혹은 자신을 옳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칭적 주체의 이런 자기 망각과 착각을 장자는 자시(自是)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어쨌든 우리는 위시라는 판단이 가능하기 위한, 혹은 같은 말이지만 위시라는 판단이 함축하고 있는, 주체 형식이 고착된 주체 혹은 인칭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 여자는 아름답네’라고 판단할 때, 그런 판단 대상과 동시에 판단하는 인칭적 주체가 불가피한 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위시라는 판단 형식과 그것이 함축하는 주체 형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판단 형식인 인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인시(因是)라는 말은 ‘따른다 혹은 근거한다’를 의미하는 인(因)이라는 글자와 ‘이것, 이쪽, 옳다. 이렇다’를 의미하는 시(是)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시라는 개념은 글자 그대로 ‘옳다는 것을 따른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옳다는 판단은 누가 하느냐에 있다. 만약 옳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주체라면, 따라서 인시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따른다’를 의미한다면, 이 경우 인시라는 개념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칭적 주체 형식에서 작동하는 판단인 위시와 전혀 구별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옳다는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타자다. 다시 말해 인시라는 개념은 ‘타자가 옳다고 하는 것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시라는 판단 형식은 타자에 따라서 옳다는 판단을 내리는 타자 중심적인 판단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 점이 바로 인시가 인칭적 주체의 구성된 초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작동하는 주체 중심적인 판단 형식인 위시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위시라는 판단 형식이 고착된 자의식으로 작동하는 인칭적 주체라는 형식을 함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시라는 판단 형식도 이 형식에 맞는 주체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 인시라는 판단 형식으로 작동하는 주체는 옳음의 기준을 타자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 예로는 앞에서 살펴본 수영 잘 하는 사람을 들 수 있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 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물이 자신을 빨아들이려고 할 때, 일상적인 사람들은 물에 빨려들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물에 빨려들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 수영 잘 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긍정하고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그것에 맞추려고 한다. 이처럼 인시를 하는 주체는 마치 고감도의 레이더처럼 타자에게서 분출되는 미세한 전파를 미묘하게 잡아내어 스스로를 변형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카멜레온이 주변의 환경에 따라 자신의 피부색깔을 바꾸듯이 말이다. 결론적으로 인시라는 판단 형식에 걸맞는 주체는 유동적인 주체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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