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자가 생각하는 부자유
이제 드디어 발제 원문을 읽어볼 준비가 된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과 관련된 두 종류의 인간의 상이한 삶을 다루고 있다. 한 사람은 대대로 좀 빨래를 하면서 살았는데,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을 가지고 있어서 추운 겨울에도 좀 빨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있었던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전자로부터 이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을 사서 그것을 겨울에 벌어진 수전(水戰)에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다.
비록 여기서 장자는 상이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핵심은, 동일한 손이 트지 않는 비방과 그와 관련된 상이한 의미 부여에 놓여 있다. 한 사람은 이 비방을 가지고 계속 겨울에 찬물로 솜을 빠는 데 사용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손이 트지 않는 비방을 수전에 이용함으로써 영주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인가? 그것은 동일한 손이 트지 않는 비방과 관련된 상이한 의미 부여 때문이었다. 동일한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비방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 부여를 하였기 때문에, 이 비방을 솜 빠는 사람에게 값싸게 샀던 사람은 영주가 된 것이다. 결국 「소요유」편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대붕 이야기에 나오는 의미의 창조, 주체의 변형, 따라서 자유의 문제를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관계와 의존성을 떠나서 어떤 사물의 자기 원인적인 의미나 본질은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본질적 의미는 특정 문맥, 즉 특정한 관계의 장에서 추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은 동일한 것이었지만, 그 사용한 문맥이 다르다[能不龜手, 一也. (…) 所用之異也].’는 장자의 지적은 이 이야기의 핵심적 전언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읽으면 다음과 같은 반문도 가능해진다. ‘그래도 장자는 그 약 자체의 자기 원인적 본질, 즉 손트지 않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긍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손 트는 것을 막는 약이 그 자체로 어떤 자기 원인적 본질을 가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약 자체가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손트지 않게 할 수 있는 역량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손과 관계되어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에 따르면 어떤 사물의 본질도 관계와 소통에 의해서 사후에 규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그 사물과 관계하는 주체의 본질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소와 소통해야만 포정은 소 잡는 사람이라고 규정될 수 있고, 솜을 빠는 사람은 솜을 빠는 사람이라고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소통의 결과로 사후에 규정된 본질에 우리 인간이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는 데 있다. 그것은,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잡초인 쑥처럼,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집요한 것[蓬心]이다. 타자에 대한 고착화된 의미 부여는 자신에 대한 고착화된 의미 부여와 동시적인 사태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규정은 항상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체에 대한 규정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대대로 솜을 빨던 사람이나 큰 박을 무용하다고 평가하는 혜시(惠施)처럼 대부분의 인간들은 새로운 타자와 조우했을 때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생각하던 부자유다. 장자에 따르면 인간의 부자유는 이처럼 추상화된 본질과 규정, 즉 매개 일반에 대한 노예 상태에 다름 아니다. ‘손 트지 않게 하는 약은 솜을 빨 때만 사용한다‘거나 ‘박은 어떤 것을 담는 경우에만 사용한다’는 판단이 솜 빠는 사람과 혜시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장자가 생각하던 자유는 심미적이고 정신적인 자유나, 자기 원인적이고 자발적인 절대적인 자유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장자가 생각하고 있던 자유는 대상이나 주체를 미리 규정하지 않는, 즉 무매개적이고 비인칭적인 마음에서 존립하는 타자와의 새로운 소통 관계의 구성, 그 관계에서의 새로운 의미 부여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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