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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XII. 결론과 더 읽을 것들 - 2.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장자 철학의 한계와 떠나야 할 때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XII. 결론과 더 읽을 것들 - 2.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장자 철학의 한계와 떠나야 할 때

건방진방랑자 2021. 7. 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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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자 철학의 한계와 떠나야 할 때

 

 

무매개적 소통은 공동체적 규칙이 내면화된 초자아의 허구적 자기동일성을 비본래적인 것으로 여겨 제거하는 데서 성립된다. 따라서 무매개적 소통에서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런 주체 형식을 갖지 못한다면, 주체는 결코 무매개적인 소통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인칭적 주체는 기존의 의미 체계를 비우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주체, 무의미의 주체다. 물론 여기서 말한 무의미는 공허하거나 모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유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그가 권고하는 비인칭적인 주체의 달성은 표면적으로는 어떤 역사적 단절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 새로운 역사의 도래는 기존의 매개(=의미) 형식의 비판, 혹은 인식론적 단절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 점에서 분명히 장자의 비인칭적 주체는 자유와 역사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자철학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내재해 있다. 그것은 비인칭적 주체 형식과 더불어 장자가 양행(兩行)의 논리를 통해 권고하고 있는 임시적 주체 형식과 관련된 문제다.

 

임시적 주체 형식은 비인칭적 주체 형식이 단독적인 타자와 조우하면서 그 타자와 어울리게 현실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임시적 주체 형식이 새롭게 지니는 의미는 어디서 기원한 것인가? 그것은 타자로부터 기원한 것일 수밖에 없다. 만일 이렇게 임시적 주체의 임시성 혹은 임시적 의미가 타자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 경우 역사나 자유가 과연 유의미하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 역사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새롭게 창조된 의미라고 할 때, 우리는 의미의 진정한 자리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온당한 자리는 바로 주체와 타자 사이, 혹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자의 임시적 주체가 지니는 새로운 의미는 너무 타자 쪽으로 쏠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장자철학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상을 띠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양행의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장자철학에는 단절해야만 하는 과거, 그리고 타자와 조우하는 생생한 현재라는 두 가지 시간 계기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자철학은 미래의 전망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문은 앞은 알지 못하는 데서 그쳐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장자에게 너무 가혹하거나 불공정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기존의 의미 체계는 새로운 의미 체계의 구축을 통해서만 작동을 멈출 수 있다. 단지 장자처럼 기존의 의미 체계에 대한 해체로만 머문다면, 우리는 타자들을 통해서 기존의 의미 체계를 다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반복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장자철학은 매개 제거를 위한 수양론, 그리고 조우한 타자와의 생생한 소통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서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자철학은, 비록 삶이 직접적인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 정립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타자에 대한 경험과 새로운 주체 형식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전망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전망 혹은 미래에 대한 전망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록 장자철학이 주체와 타자 간의 무매개적 소통이라는 현실을 영원한 현실 혹은 영원한 순간으로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서 기술하고 있다 할지라도, 무매개적 소통의 진실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그런 사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 소통의 즐거움은 오직 나만이, 혹은 잘해야 주체와 타자만이 공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즐거움에는 애초에 직접적인 주체와 타자를 제외한 다른 제3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러나 주체와 타자 간의 갈등이 과연 주체와 타자만의 문제일 수 있을까? 오히려 이런 갈등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층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장자가 기존의 모든 이념들에 대해 냉철한 비판의식을 유지했다고 할지라도,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에 대한 비판과 수양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존의 삶의 형식과 질적으로 다른 주체 및 타자 형식, 즉 주체와 타자를 거듭 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 체계를 우리에게 던져주었을 때에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서야 이념을 통해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철학의 진정한 역할이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장자로부터 배우게 되는 마지막 교훈일 것이다. 새로운 체계, 새로운 의미, 나아가 새로운 주체를 우리의 힘으로 구성하라는 것! 이제 장자로부터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언제 다시 우리가 장자에게 돌아올지 기약은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전혀 다른 주체로 변형되어 돌아와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장자에 대한 우리의 최소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인용

목차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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