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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2. 우국의 시인(사조란)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2. 우국의 시인(사조란)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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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조(詞藻)라면 일반적으로 한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하여 한말의 학술지에 마련된 사조란(詞藻欄) 즉 한시 발표에 제공된 문예란을 말한다.

 

학술지로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를 비롯하여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대한학회월보(大韓學會月報), 서우회보(西友會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등이 그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그 성격상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서우회보(西友會報)의 발행기관인 서우학회는 뒤에 서북학회로 통합되었다.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는 창간된 것이 1910년이므로 한말의 학술지로서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가지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 사조란을 통하여 가장 많은 한시를 게재하고 있는 학술지는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그리고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정도이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당시의 개화파 사람들에 의하여 부국강병론이 고조되던 18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애국계몽운동 기관이며, 1905을사늑약 이후에 등장한 이들 학술지의 설립 취지도 그 성격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국가와 민족의 자강에 있었고 그들이 실천한 사업은 산업ㆍ교육의 진흥과 민중의 계몽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질서를 부정하는 처지에 서고 있었기 때문에, 주권의 회복이라는 국가목적에서 보면, 이들 학회가 스스로 공격적인 대일항쟁을 수행하기에는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가 복잡하고 단단하다. 이렇게 보면, 전통시대의 유향(遺響)인 한시를 보급하기 위하여 사조란까지 마련하고 있는 이들 학회의 퇴행적 행위는, 학회 자체의 성격이 그렇게 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구성원의 개별적인 체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지연(張志淵)과 같이 전통적인 학문에 조예가 깊은 명사들이 황성신문에서부터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특히 이들 사조(詞藻)’가 쉽사리 우국시의 발표란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도, 한시는 이미 재야 사림에게 익숙해진 문학양식이므로 이들의 시대의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는 가장 알맞은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성신문(皇城新聞)189911월부터 사조란을 두고 있으나 우국의 충정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는 학회의 활동범위를 기호지방으로 한정한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사림의 우국 시편은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김윤식의 친일(親日) 차운시(次韻詩)가 독판을 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많은 우국시를 발표하고 있는 것이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이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의 사조란은 우선 문예란으로서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선현들의 시작 가운데서도 명편을 골라 수록하고 있으며 당대 명사들의 작품도 다양하게 게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물량에 비하여 우국시가 적은 것도 사실이며, 특히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이 있은 다음 해인 1906년에서부터 회보가 발행되고 있기 때문에 민충정공(閔忠正公)과 최익현(崔益鉉)의 만사(輓詞)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익명으로 된 독월남망국사유감(讀越南亡國史有感)과 같은 장편을 싣고 있는 의지는 사조(司藻)’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협회의 구성원으로 보면 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지도층의 성향이 후일 대일협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협회의 성격도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사조(司藻)’에서 과시한 우국의 의지는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도부의 임원진과 구성원 사이에 개재하는 심한 괴리현상을 사실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창작시에 못지 않게 전시대의 시작을 재현하는 데 관심을 보여 선인들의 시편 가운데서 경세(警世)의 목적에 걸맞는 작품을 대량으로 게재하고 있다. 금남(錦南) 최부(崔溥)독송사(讀宋史)를 비롯하여, 어무적(魚無迹)유민탄(流民歎), 권필(權韠)투구행(鬪狗行), 임제(林悌)고산역(高山驛), 정지윤(鄭芝潤)관왕묘(關王廟)와 같은 문제작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특히 김종직(金宗直)동도악부(東都樂府)정도전(鄭道傳)오호도전횡(嗚呼島田橫)을 수록하고 있는 것은 더욱 시사적이다.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치술령(鵄述嶺)은 바로 박제상(朴堤上)의 이야기이며 오호도전횡(嗚呼島田橫), 전횡과 그의 식객 500인이 함께 죽은 고사다. 의기가 상통하면 500의 무리도 함께 죽을 수 있었던 전범으로 널리 알려져온 이야기다.

 

황성신문사조란에 기고한 하서자(荷西子) 지창한(池昌翰)의 우국시 장충단유감(獎忠壇有感)한 수만 보인다.

 

萬死非難一死難

만 번 죽기는 어렵지 않지만 한 번 죽기가 더 어려운데

人臣大節亂時看

신하 된 자 절개는 난시에 보면 잘 알리라.

吾輩偸生生亦恨

죽어야 할 때 못 죽는 인생 살아도 또한 한이니

秋風痛哭獎忠壇

추풍에 장충단에 가 목놓아 우니노라. 황성신문(縮刷版) 3264,

 

시작의 솜씨는 진솔할 뿐이다. 죽어야 할 때인데도 죽지 못하고 거짓으로 도생(圖生)하는 인생의 비굴한 모습을 강개조로 읊은 것이다.

 

 

이상에서 창강(滄江)영재(寧齋)수당(修堂)매천(梅泉) 등 구한말의 대표적인 문인들의 우국한시와 사조(詞藻)’를 일별(一瞥)해 보았다. 여기서 이들 한시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무력한 왕권에 대한 불신이다. 절대적 왕권에 대한 정면적인 항거를 피하고 있는 대신에, 역대의 위인 열사들의 추감(追感)을 통하여 문자 그대로 무인지경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네 사람의 시인이 한결 같이 충무공을 추상한 시작을 남기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위기의식이 미만(彌滿)해 오던 구한말 사회의 불안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망국으로 줄달음질치고 있는 국가의 운명에 대하여 그들의 투철한 시대정신은 이를 담시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비평ㆍ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위대한 사의식(士意識)의 발견이 그것이다. 국가의 운명이 어렵게 되었을 때 이들 문인은 한결같이 글을 읽은 선비의 구실이 어느 때보다 도 어려워진 것을 직감, 그들이 담당해야 할 임무를 찾기에 깊은 시름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는 사절(死節)로 또는 순국을 통하여 그들의 역사적 임무를 다한 것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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