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은 대체로 그 항쟁을 전개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 따라 이를 전후 2차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의 반포에 반발하여 기의(起義)한 것이 그 전기의 항쟁이며,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에 국권수호를 위하여 거의(擧義)한 것이 그 후기의 항쟁이다.
그러나 의병장 중에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척사파 지도자들과 같이 명망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을사늑약 이후의 의병항쟁에 참가한 의병장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의 궁유(窮儒)가 아니면 상민(常民)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적이나 시문ㆍ잡저와 같은 문학적인 업적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없었거나 아니면 처음에 있었더라도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국의 시편이나 임절시를 전하고 있는 의병장으로는, 초기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의암(毅巖) 유인석(柳麟錫)을 비롯하여,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ㆍ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ㆍ이인영(李麟榮)ㆍ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ㆍ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ㆍ이은찬(李殷瓚)ㆍ동청(東廳) 정환직(鄭煥直)ㆍ전해산(全海山)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전기 항쟁에 기의한 의병장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후기 항쟁에도 참가하고 있으며, 특히 그들이 남긴 임절시는 대개 후기 항쟁 이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함께 다룬다. 그러나 문집을 남기고 있는 유인석(柳麟錫)이나 김복한(金福漢) 등의 경우에는 그들의 문집에서 우국시를 찾아내는 것이 용이하지만, 그 밖의 의병장의 경우에는 대부분 『기려수필(騎驢隨筆)」이나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에 임절시가 전하고 있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으므로 그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최익현은 방대한 문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우국정충(憂國精忠)은 상소문에서 발휘되고 있을 뿐, 우국의 서정을 담은 시편은 한두 수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유인석(柳麟錫, 1842 헌종8~1915, 자 汝聖, 호 毅庵)은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한 초기 의병항쟁의 대표적인 지도자다. 그는 국내에서의 항쟁에서 실패하자 멀리 노령(露嶺)에까지 망명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했다. 그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있던 당시부터 위혁적으로 접근해 오는 서구의 충격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일찍이 「강화양난(江華洋亂)」과 같은 우국시를 쓰고 있으며 특히 의리를 무겁게 생각하는 그는 중국을 원망한 「책망중화(責望中華)」도 제작하고 있다. 그가 한꺼번에 여러 편의 우국시를 쏟아놓은 것은 합병을 전후한 시기다. 「도왜노합방시사절제공(悼倭奴合邦時死節諸公)」을 비롯하여 「영오칠적(詠五七賊)」, 「추도일국사의의사(追悼一國死義義士)」 등이 모두 그러한 것이며 특히 황현(黃玹)의 사절(死節)에 바친 시작은 4수나 된다.
「강화양난(江華洋亂)」은 다음과 같다.
昇平世久恬嬉存 | 태평세월 오래이매 노닐기만 하다가 |
報急沁城洋祲昏 | 강화에 급한 보고 양이(洋夷)가 쳐들어왔네. |
島民鳥散震宸念 | 섬사람들은 흩어지고 임금도 놀랐는데 |
壯士雲興重國恩 | 장사가 구름같이 일어나 국은이 중하도다. 『毅菴集』 권1. |
병인양요(丙寅洋擾)를 당하여 나라 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러한 뜻을 시에 남긴 일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의암은 이때부터 위혁적으로 접근해 오는 서구의 충격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보인 바 있어 이렇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중국을 원망한 유인석(柳麟錫)의 「책망중화(責望中華)」이다.
中華夷狄薰蕕似 | 중화와 이적(夷狄)은 본래 서로 다른데 |
開化云云合理哉 | 개화를 운운하여 합리화하단 말가! |
如不可無開化事 | 어쩔 수 없이 개화를 해야 할 판국이라면 |
宜開吾化化他開 | 마땅히 내 먼저 하고 남을 개화할지니라. 『毅菴集』권3. |
철저한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 무장된 도학자 의암이었지만 개화를 운위하는 중국의 처사를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대세가 개화를 하여야만 할 형편이 되더라도 내 먼저 개화를 하고 남을 개화하여야 한다는 그의 주체적인 마음 바탕이 잘 나타나 있다.
김복한(金福漢, 1860 철종11~1924, 자 元五, 호 志山)은 홍주(洪州) 출신이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鎔)의 후손이며, 의병장 이설(李偰)과는 내외종간(內外從間)이다. 그는 단발령이 내렸을 때에는 이설 등과 함께 기의하였으며, 1906년에는 다시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홍주에서 기의하였고, 세칭 6의사의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기고 간 우국시편 가운데는 이미 앞에서 보인 「이충문공묘(李忠武公墓)」를 비롯하여 이설(李偰)의 담자운(談字韻)에 차운(次韻)한 「차부암이공담자운(次復菴李公談字韻)」과 「문안중근사유감(聞安重根事有感)」이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차부암이공담자운(次復菴李公談字韻)」을 아래에 보인다.
獨坐悄然誰公談 | 초연히 홀로 앉아 누구와 말을 할까? |
面墻無路見終南 | 담벽만 보노라니 남산을 못보겠네. |
報君人少堅如竹 | 대쪽 같은 절개로 나라 위하는 사람 적고 |
誤國姦多醜似藍 | 파랗게 된 추한 얼굴로 나라 그르치는 놈만 많구나. 『志山集』 |
부암(復菴)의 원운(原韻)볼 수는 없으나 이 작품은 학자로서의 면모도 함께 읽게 해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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