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2. 우국의 시인(개요)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한시 문학의 종장 - 2. 우국의 시인(개요)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4:25
728x90
반응형

 2. 우국(憂國)의 시인(詩人)

 

 

한말(韓末)이라는 역사 단계는 정확하게 말해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성립에서부터 비롯하며, 그것은 근대화라는 시대적 임무 수행이 강조되었던 시기라는 점에서 일단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일찍이 한국사가 체험한 어떠한 역사 단계에 있어서도 서구의 근대를 스스로 시험한 일이 없는 전통사회의 보편적 질서에서 볼 때, ‘개국(開國)=개화(開化)’를 근대화의 결정론으로 파악한 인식체계는 한국의 근대사로 하여금 그 시발(始發)에서부터 망국의 민족사로 얼룩지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형식적으로는 국호가 조선(朝鮮)’에서 ()’으로 바뀌고, (제후)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로 격상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주도한 세력이 침략적인 제국주의 일본이기 때문에 문제의 성격은 심각하고 복잡한 것이 되었다.

 

이 이전 시기에 있어서도 외세의 도전은 부단히 있어 왔지만, 그 수단과 양상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이민족의 일방적인 침략에 의한 무력전쟁이었으므로, 우리 쪽에서 보면 이것은 방위전쟁이다. 때문에 국가와 민족은 반드시 수호되어야 했으며, 이를 극복하는 데 바쳐진 주체적 역량은 집약적으로 과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말에서부터 비롯한 서양 또는 서양화한 일본의 도전은 처음부터 전교(傳敎)나 통상(通商)의 수단으로 접근해 온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응하는 반응양식도 귀일(歸一)되지 않았다. ‘척사(斥邪)’개화(開化)’가 서로 다른 역사인식의 괴리를 보이면서 두 주류의 시대의지로 대두한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러 천주교가 이 땅에 잠입하기 시작하였을 때, 서양의 충격은 그것이 전교(傳敎)를 표방한 문화적인 형태의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벽위(闢衛)라는 이름으로 막아내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 이르러 서양 세력의 접근이 통상의 강요와 같은 경제적인 충격으로 변질하게 되었을 때 척사의 의지는 어양(禦洋)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양(禦洋)에서 실패한 척사의 저항은 다음 단계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일본의 팽창주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척화(斥和)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다.

 

1880년대에 있어서의 척사운동은 그 저항의 방향을 대내적인 비자주적 개화에 돌리기 시작하여 그 공격은 외세의 주구가 되고 있는 당시의 집권세력에 집중되었다. 이에 이르러 척사의 의지는 위정(衛正)이라는 민족사의 자위(自衛) 임무를 보다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저항형식의 전환은 1895을미사변(乙未事變)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세력이 노골적으로 국법질서를 유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언사적(言辭的) 저항은 의병항쟁과 같은 무력행사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책동은 1897년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으로 변신하게 하였으며 1905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르러 사실상 국권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이를 전후하여 다시 후기 의병항쟁이 전개되고 빗발치는 토적소(討賊疏)사림(士林)에서 터져나왔다. 그러나 산림(山林)에서 몸을 일으킨 의병의 항쟁으로는 기울어진 조국의 운명을 붙들어잡는 데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그나마 총칼을 들고 의병항쟁에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 시기의 문인들은, 또는 선비로서 또는 지사(志士)로서 스스로 그들의 변신을 강요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가능했던 일은 우국의 노래를 제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시인들은 한말의 상황이 난망(亂亡)에 이르기 앞서부터, 공통적으로 인물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지나간 역사에 눈물 지으며 선현들의 위업을 추상(追想)했다. 가신지 200년이 넘는 충무공의 슬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건창(李建昌)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 황현(黃玹)충무공구선가(忠武公龜船歌)벽파진(碧波津), 그리고 이남규(李南珪)과충무공순신묘(過忠武公舜臣墓)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며, 의병항쟁에 기의(起義)김복한(金福漢)이충무공묘(李忠武公墓)도 그 성격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없다.

 

먼저 문인(文人)들의 우국시를 보이고 다음으로 사조란(詞藻欄)의 애국시(愛國詩), 의병장의 우국ㆍ절명시 등을 차례로 보이기로 한다.

 

다음은 이건창(李建昌)아산과이충무공묘(牙山過李忠武公墓)이다.

 

元帥精忠四海知 원수(元帥)의 위국충정 온 세상이 다 아나니
我來重讀墓前碑 이곳에 와 묘비문을 거듭 읽어봅니다.
西風一夕松濤冷 저녁에 서풍 불어 소나무 소리 차갑더니
猶似閒山破賊時 한산도 왜적 칠 때 그 소리와 같습니다. 明美堂集2.

 

이 시는 바로 평담(平淡)영재(寧齋) 시풍(詩風)의 단편(斷片)이다. 충무공의 묘소를 찾아든 영재(寧齋)의 감회는 그것이 단순한 회고적(懷古的)인 감상(感傷)을 노래한 것이 아니며 시인의 현실에 대한 인식 바로 그것의 발현인 것이다. 갑신(甲申)ㆍ갑오(甲午)의 두 정변을 한갓 개화꾼의 불장난으로 본 그는 이홍장(李鴻章)과 같은 위인도 큰 거간꾼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외세에 대처하는 그의 입장은 을미사변(乙未事變)에서 보여준 반민족적인 일본의 만행에 대하여는 장문(長文)토역소(討逆疏)를 올려 준열하게 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행(使行)의 임무가 어느 때보다도 중한 것을 갈파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이용후양(利用厚養)의 실()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곧 다른 박학(樸學)의 무리와 준별해야 할 영재(寧齋)의 시국관이며 역사인식의 태도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도 한말의 소단(騷壇)에 가장 많은 우국의 시편을 남긴 것은 역시 황현(黃玹)김택영(金澤榮)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건창(李建昌)의 발천(發薦)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후일 세 사람은 나란히 가장 가까운 문우로서 성장하여 한문학의 종장에 섬광을 발했다. 다만 이건창(李建昌)은 광무 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순국의 기회나 우국시를 제작할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급변하는 역사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김택영(金澤榮)은 개성 출신이다. 때문에 중앙 정부에 대한 개성 시민의 불신 감정은 김택영(金澤榮)에게 있어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의 모화적(慕華的)인 체질도 따지고 보면 소중화(小中華)에 대한 평소의 불신이나 모멸이 낳은 당연한 결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버림받은 조국을 버리고 쉽사리 중국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눈앞에 두고 그는 망명선에 올랐다. 조국을 향하여 뜨거운 애정을 보낸 것이 이때가 처음이다. 그가 우국의 시작을 조국에 바치게 된 계기도 여기서 비롯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 대표작으로는 구일발선작(九日發船作)2수를 비롯, 추감본국시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 문의병장안중근보국수사(聞義兵將安重根報國讐事), 문황매천순신작(聞黃梅泉殉信作)등이 우국의 농도가 짙은 것들이다. 구일발선작(九日發船作)은 다음과 같다.

 

沸流城外水如藍 비류성 밖 바닷물은 쪽빛으로 푸르른데
萬里風來興正酣 만리에 바람 불어 주흥이 거나하구나.
誰謂火輪獰舶子 뉘라서 화륜선 빠른 배가
解裝文士向江南 문사(文士)를 태우고 강남으로 떠날 줄 안다고 하였던가?

 

東來殺氣肆陰奸 동으로 살기(殺氣)가 불어 음계(陰計)가 들끓는데
謀國何人濟此艱 그 누가 나라 위해 이 환난을 구할고
落日浮雲千里色 저녁놀 뜬 구름이 천리에 물드는데
幾回回首望三山 몇 번이고 머리 돌려 삼각산을 바라보네. 소호당집(韶護堂集)4

 

이는 그가 망명선에 올랐을 때의 착잡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저녁놀 뜬 구름이 곱게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뒤돌아보고는 망국의 음계(陰計)가 들끓고 있는 조국의 운명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글 읽은 선비이기 때문에 간직할 수 있었던 조국애의 마지막 보루 그것을 보인 것이다.

 

 

소중화(小中華)를 우습게 알던 창강(滄江)이긴 하였지만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서 뒤돌아보아지는 망향(望鄕)의 서정은 조국의 운명이 날로 급박해지자 쉽사리 우국의 충정(衷情)으로 변질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비보를 뒤늦게 전해 듣고 지은 추감본국시월지사(追感本國十月之事)의 감회가 그것이다.

 

爐底死灰心共冷 내 마음 싸늘하기 화로 밑에 죽은 재라,
天涯芳草首難回 이국 땅 하늘 아래 고국 보기 어렵도다.
蘭成識字知何用 유란성(庾蘭成)은 글을 배워 어디 쓰려 하였던고?
空賦江南一段哀 공연히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어 슬픈 정만 더하는구나. 소호당집(韶護堂集)4

 

그 마지막 부분을 보인 것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사실상 국권은 일제의 장중(掌中)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돌아다볼 고국조차 없어진 지금에 이르러 발랄한 정열이나 낭만이 있을 리 없다. 싸늘하게 식어간 시인의 가슴은 다만 글을 읽은 선비가 된 자기의 처지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자기 처지를 양()나라 유신(庾信)의 그것에 비기어 본 것이다.

 

 

매천(梅泉)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구한말의 격동기에 가장 많은 우국시를 남기고 간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다. 충무공구선가(忠武公龜船歌), 벽파진(碧波津), 의기논개비(義妓論介碑)를 차례로 보인다.

 

二百年來地毬綻 충무공 가신지 200년에 나라가 열리더니
輪舶東行焰韜日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꽃이 해를 가리네.
熨平震土虎入羊 조용한 양()의 나라에 호랑이가 쳐들어와
火器掀天殺機發 화기(火器)가 하늘을 찔러 살기가 등등하구나. 梅泉集1.

 

二百年來地毬綻 충무공 가신지 200년에 나라가 열리더니
輪舶東行焰韜日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꽃이 해를 가리네.
熨平震土虎入羊 조용한 양()의 나라에 호랑이가 쳐들어와
火器掀天殺機發 화기(火器)가 하늘을 찔러 살기가 등등하구나.
九原可作忠武公 구천에 계신 충무공을 모셔올 수 있다면
囊底恢奇應有術 가슴 속에 반드시 신술(神術)이 있으리라.
創智制勝如龜船 거북선의 지혜로 가는 곳마다 이길지면
倭人乞死洋人滅 왜놈은 살려달라 하고 양놈은 제풀에 물러가겠지. 梅泉集1.

 

이 작품은 1884(갑신년) 작이며 칠언고시 중 그 마지막 부분을 보인 것이다. 인용한 부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왜적을 무찌른 거북선의 위용을 눈으로 보듯이 그린 것이다. 왜양(倭洋)의 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당시의 사정을 마치 16세기 말에 있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느낀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도 없는 이때의 암담한 사정은 이 젊은 시인에게는 무척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의 기발한 발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가신 지 200년이 넘는 충무공을 다시 구천에서 일으켜 모셔오고 싶은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의욕에 찬 청년 시절의 매천(梅泉) 시의 한 단편이라 하겠다.

 

 

다음은 매천(梅泉)1896년에 지은 벽파진(碧波津)의 마지막 부분이다.

 

萬死何曾戰功計 만 번을 죽은들 전공(戰功)을 생각했던가?
此心要使武臣知 충무공 이 마음 무신(武臣)들은 배워야지.
至今夷舶經行地 오랑캐 배 드나드는 지금에 와서야
咋指鳴梁指古碑 혓바닥 깨물며 명량(鳴梁)의 옛 비석 가리키네. 梅泉集2

 

벽파진은 충무공이 병사들을 조련하던 곳인데 개항을 했답시고 뻔질나게 드나드는 왜놈들 보기가 역겨웠던지 왜적을 무찌르던 그때의 감격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 것이다.

 

다음은 1898년 작 의녀논개비(義妓論介碑)이다.

 

楓川渡口水猶香 풍천의 강물이 하 그리 향기로와
濯我須眉拜義娘 내 수염 깨끗이 씻고 의낭(義娘)에게 절하노라.
蕙質何由能殺賊 연약한 여자 몸으로 왜적을 죽이다니
藁砧已自使編行 남편이 시키는 대로 군대에 들었음이라.
長溪父老誇鄕產 장수 고을 늙은이는 딸 자랑 한창이고
矗石丹靑祭國殤 촉석루 붉은 단청 가신 넋을 위로하네.
追想穆陵人物盛 돌이켜 보면 선조 때는 인물이 하도 많아
千秋妓籍一輝光 기생도 그 이름을 천추에 전하네. 梅泉集3

 

인물이 성하던 목릉(穆陵) 때에는 기적(妓籍)의 몸으로도 나라 위해 죽었는데, 이때와 같은 어려운 시국에 너무나도 인물이 없음을 통탄, 장수(長水) 출신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논개에 대해서는 근자에 와서 그 신분이 기생이 아니라는 설이 그의 출신지인 전라도 모처에서 나온 문적을 통하여 입증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에서도 그의 고향이 전라도 장수로 나타나 있으며, 남편까지 있었던 사정이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변보(變報)에 접하고 자재(自裁)한 사절(死節) 삼대신(三大臣) 이건창(李建昌)ㆍ최익현(崔益鉉)을 감모(感慕)하여 지은 오애시(五哀詩)를 비롯하여 애무장의사정시해(哀茂長義士鄭時海), 혈죽(血竹)등 많은 우국시를 남기고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