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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林悌: 1549(명종 4)~1587(선조 20)
본관은 나주(羅州). 중기 문신ㆍ시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ㆍ풍강(楓江)ㆍ소치(嘯癡)ㆍ벽산(碧山)ㆍ겸재(謙齋)임.
1549년 | 11월 20일 나주 회진(會津)의 향제(鄕第)에서 후일 절도사와 훈련원 판관을 지낸 부친 임진(林晋)과 모부인 남원 윤씨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 |
1562년 | 14세 | 경주김씨 만균의 딸과 결혼 |
1568년 | 20세 | 자유분방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처음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공부도 하였지만 이후 몇 차례 낙방함. |
1570년 | 22세 | 이 해 가을 대곡선생 성운(成運)의 문하를 찾아감. |
1571년 | 23세 | 모친상을 당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함. |
1573년 | 25세 | 겨울에 성운(成運)이 은거하는 속리산으로 다시 들어가 수학함. |
1575년 | 27세 | 호남 일원에서 발호한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순무어사(巡撫御史) 겸 전라감사 박계현(朴啟賢)의 군막에 포의로 출입하며 시우(詩友)가 됨. |
1576년 | 28세 | 4월에 중부(仲父) 풍암공(風巖公) 임복(林復)의 상을 당하고 이 해에 진사로 등제함. |
1577년 | 29세 | 정월에 속리산에서 나와 9월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배수됨. 11월에는 부친이 목사(牧使)로 재임 중인 제주(濟州)로 근친(覲親)을 가서 3개월 간 제주를 유람함. |
1578년 | 30세 | 2월에 부친을 하직하고 제주도를 떠나 상경하는 길에 남원을 들러 광한루에서 백광훈ㆍ이달 등과 시회를 가짐. 이 즈음 조정에서는 동서붕당이 심해지는데 백호는 편당의 압력을 거부하고 중립을 지킴. |
1579년 | 31세 |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 함경남도 안변 소재)으로 부임. 재임 중 가학루(駕鶴樓)에서 양사언ㆍ허봉ㆍ차천로 등과 함께 시회를 가짐. |
1580년 | 32세 | 봄에 서도병마평사(西道兵馬評事)로 부임. |
1582년 | 34세 |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부임. |
1583년 | 35세 | 평안도 도사(平安道 都事)로 부임. |
1584년 | 36년 | 평안도 도사의 임기를 마침. 고흥(高興, 興陽) 군수를 지내고 홍문관(弘文館) 사국(史局) 지제교(知製敎)로 부임함. |
1587년 | 39세 | 6월에 부친 절도공(節度公)의 상을 당하고, 얼마 안 있어 8월 11일에 39세로 몰세. |
1589년 | 사망 후 2년 |
정여립의 난을 다스리는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생전의 언행으로 무고를 입어 장자인 임지(林地)가 국문을 당함. |
평가
1. 세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시와 술로 울분을 달래다 요절함.
2. 유언으로 남긴 말로 “천하의 여러 나라에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四夷八蠻. 皆呼稱帝. 唯獨朝鮮, 入主中國.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라고 남김.
3. 『임백호집(林白湖集)』,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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蜋丸集序(박지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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