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李麟榮, 1867 고종4~1909 융희3)은 초기의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ㆍ이강년(李康秊) 등과 기의하였다가 후일 정미거의(丁未擧義) 때 다시 참가, 13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허위(許蔿)ㆍ민긍호(閔肯鎬)ㆍ이강년(李康秊) 등과 함께 일거에 서울에까지 진공하였다가 중도에서 부친상으로 퇴거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옥중에서 지은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다.
分明日月懸中州 | 밝고 밝은 해와 달 중주(中州)에 떠 있는데 |
四海風潮濫○流 | 온누리에 새 물결 넘쳐 흐르는구나. |
蚌鷸緣何相持久 | 조개와 황새는 어쩌면 저렇게 붙들고만 있는가? |
西洲應見漁人收 | 서양의 어부들이 틀림없이 쓸어 가리라.322) |
이 시에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개재하고 있는 이질 감각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공연히 서로 싸우기만 하다가는 서양 사람들에게 어부지리를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 철종9~1908 융희2, 자 樂仁ㆍ樂寅, 호 雲崗) 역시 을미거사 때 유인석(柳麟錫)ㆍ이인영(李麟榮) 등과 기의하였다가 정미의거에도 다시 참가, 호서(湖西)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활약하였다. 『운강선생창의록(雲岡先生倡義錄)』에 전하는 자탄시(自嘆詩) 한 수와 『기려수필(騎驢隨筆)』에 실려 있는 임절시 한 수가 있다. 특히 이 임절시에는 순국의 최후가 너무도 처절하게 새겨져 있으며, 최후의 순간에도 굴하지 않는 장부의 기개가 불타고 있다.
「임절시(臨絶詩)」는 다음과 같다.
五十年來辦死心 | 오십년을 걸려서 죽을 마음 정했지만 |
盟師在出終難復 | 어려운 일 정작 당하니 생각이 많더이다. |
臨難已有區區心 | 맹세코 다시 나왔지만 회복하지 못하였나니 |
地下有餘冒劍心 | 저승에 가서라도 칼을 버리지 않으리라. |
10여년에 걸쳐 천하를 주름잡던 의병장 운강도 막상 죽음에 임해서는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여러 번 거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는 안타까운 충정(衷情)이 잘 나타나 있다.
김도현(金道鉉, 1852 철종3~1914, 자 明玉, 호 碧棲)은 영양(英陽) 출신의 유사(儒士)다. 병신년(丙申年)에 거의하여 여러 번 패했으나 물러나지 않았다. 을사(乙巳)ㆍ경술(庚戌) 간에도 거의(擧義)하려 했으나 90 노친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나중에 부상(父喪)을 지내고 동해(東海)에 나아가 투신자살했다. 역시 임절시 1수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다음이 그의 「임절시(臨絶詩)」다.
我生五百末 赤血滿腔腸 |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 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 |
中間十九歲 鬚髮老秋霜 | 그 사이 십구년을 헤매다 보니 머리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구나. |
國亡淚末己 親沒痛更張 | 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버이마저 가시는 슬픈 마음 더욱 넓다. |
獨立故山碧 百計無一方 | 홀로 고향산에 우뚝이 서서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가이 없다. |
欲觀萬里海 七日當復陽 | 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 칠일 만에 햇살이 돋아서 오네. |
白白千丈水 足吾一身藏 | 천 길 만 길 저 물 속에 뛰어들며는 내 한 몸 파묻기 꼭 알맞겠구나. 『민족운동사』(한국문화사대계 I), p.626. |
병신년에 거사를 해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을사ㆍ경술 간에 죽으려고 하였지만 그것마저도 이루지 못하고 백발을 맞이하도록 살아남은 자신의 처신을 생각할 때 죽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 바닷 속에 몸을 던진 시골 유생의 가엾은 충절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물론 경술국치 이후에 씌어진 것이기는 하나 작자가 거의한 것이 초기에 속하므로 이 속에 같이 넣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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