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과거 급제자들이 왕륜사에 모여 잔치를 열었지만 나는 까닭이 있어 가지 못해 시를 부쳤다
동년회우왕륜 설연 여유고불부 이시기(同年會于王輪 設宴 余有故不赴 以詩寄)
변계량(卞季良)
今夕神仙醉紫霞 錦筵銀燭映靑娥
夜深踏月婆娑舞 滿帽花枝影半斜 『春亭先生詩集』 卷之三
해석
今夕神仙醉紫霞 금석신선취자하 |
오늘밤 신선이 붉은 노을【자하(紫霞): 붉은 노을인데, 흔히 신선들이 사는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에서 취하고 |
錦筵銀燭映靑娥 금연은촉영청아 |
비단 대자리와 은색 촛불이 젊은 미녀 비추리. |
夜深踏月婆娑舞 야심답월파사무 |
깊은 밤 달을 밟고 흔들흔들 춤추니 |
滿帽花枝影半斜 만모화지영반사 |
모자에 가득한 꽃가지 그림자가 반쯤 비껴있네. 『春亭先生詩集』 卷之三 |
해설
이 시는 동년(同年) 과거급제자들이 왕륜사에 모여 잔치를 열었는데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를 부쳐 준 것으로, 자긍(自矜)ㆍ화려함ㆍ해학ㆍ여유를 누리는 배타적(排他的) 기득권(旣得權)을 가진 관각문신(館閣文臣)들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 저녁 동문 급제자들이 신선처럼 신선이 산다는 자하동(紫霞洞)에 모여 자하주(紫霞酒)를 마시며 취할 것이요, 비단 방석과 은으로 된 촛불이 있는 화려한 잔치에 예쁜 기생까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밤이 깊도록 흥에 겨워 너울너울 춤을 추니, 과거급제 후 받은 어사화(御賜花)가 반쯤 기울었을 것이다(술에 취한 동료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린 것이다).
배타적 기득권은 성품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변계량의 고집스러운 성품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茲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茲)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들은, ‘성상(聖上)에 속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司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卞文肅公季良性固執. 宣德年間賀白雉表詞中, 有惟玆白雉之語, 文肅曰: “玆字宜中行.” 諸公曰: “不屬上何謂中行?” 文肅固執之. 諸公曰: “宜取旨.” 世宗是諸公之議, 文肅復啓曰: “耕當問奴, 織當問婢. 殿下爲國, 若鷹犬宜問文孝宗輩, 至於詞命, 當依任老臣, 不可輕許他議.” 世宗不得已從之.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30~31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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