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간단히 비유를 해보자. 사방이 막힌 방에 내가 있다. 방안에 있는 한 대의 컴퓨터가 바깥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다른 사람과의 대화 수단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누군가 모뎀의 선을 자르고 조작된 신호를 보낸다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매트릭스다.
-노성래, 『과학동아』 2002년 6월호, 52쪽.
모피어스는 지금까지 네오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모든 세계가 ‘가상’이었다고 선언한다. 그는 인류가 AI인공 지능 컴퓨터 제조 기술을 갖게 된 것에 스스로 경탄하면서 AI의 탄생을 자축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AI에 지나치면 의존하게 되면서 AI와 인류 사이에 권력의 균형이 깨져버린다. AI와 인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승리는 AI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태양력으로 움직이는 AI들을 위협하기 위해 태양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인간에게 승리한 AI들은 ‘인간’을 일종의 ‘건전지’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인간은 태양을 없애버리면 AI들이 멸망할 것이라 믿었지만 태양이 없어지자 AI들은 태양에너지 대체제로서 인간의 육체를 사용했다. 인간은 ‘대량 사육’되어 AI들의 건전지로 이용되고, 2199년 현재 인류가 꾸는 ‘꿈’이야말로 그들이 지금까지 현실이라 믿었던 유일한 세계(1999년)였다.
모피어스: 인류는 생존을 위해 기계에 의존했어. 운명이란 모순적일 때가 많아. 인체는 120볼트 이상의 전기를 발생시키고 체열은 2만 5천 BTU가 넘어. 인간들은 끝도 없이 널려 있잖아. 인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육되는 거지. 나도 오랫동안 믿지 못했어. 그러다가 직접 본 거야. 죽은 자를 액화시켜 산 자에게 주입하는 걸! 끔찍하리만치 정확한 기계들을 보면서 난 명백한 진실을 깨달았지.
네오: (어느새 얼굴이 밀랍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럼 도대체 매트릭스가 뭐지?
모피어스: 통제야. 매트릭스는 컴퓨터가 만든 꿈의 나라야. 우릴 통제하려는 거지. 인간을 그들의 에너지로 이용하려고.
네오: (이제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아냐! 믿을 수 없어! 불가능해!
모피어스: 믿기 쉽다고는 안 했어. 진실이라고만 했지.
네오: 그만해! 나가고 싶어! 나가게 해줘!
네오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며 실신해버린다. 그는 이곳(진짜 세계)에서 나가는 것이 곧 매트릭스 안에 갇히는 것이라는 참혹한 역설에 직면한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속 편하지 않았을까. 네오는 ‘빨간 알약’을 선택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세속의 세계는 안전하지만 무의미한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고 신성의 세계는 의미로 가득 차 있지만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모조리 허무한 환상일 뿐이라도 차라리 그 편안한 무지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져버린 네오. “다시 돌아갈 순 없죠?” 모피어스는 미소 짓는다. “그래. 돌아갈 수 있다면 가겠나? 사과를 해야겠군. 규칙이 있지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진 이 얘길 안 해. 위험하니까. 받아들이질 못하거든. 그런 경우를 봤어, 미안해. 하지만 난 할 일을 한 거야.”
그 말 뒤에는 짜릿한 ‘시험’의 문턱이 숨어 있다. 모피어스의 속내는 네오가 정말 ‘그’임을 시험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네가 받아들이지 못해 죽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정말 ‘그’라면 넌 견딜 수 있을 거야. 네가 진정 선택된 자라면, 그리고 그 선택된 운명을 네가 받아들인다면, 넌 그 정도 괴로움 따윈 거뜬히 이겨내겠지. 넌 다시 태어나야해. 지금까지 매트릭스의 명령체계 속에서 배우고 느꼈던 모든 것을 지워야 해. 네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까지, 네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모두 지워버려야 해.
모피어스: 매트릭스가 건설될 때 그 안에서 태어난 자가 있었지. 그는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어. 매트릭스를 합당하게 바꾸는 거였지. 그는 맨 처음 우릴 해방시켜 주고 가르쳤지. 매트릭스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자유를 얻지 못해. 그가 죽은 후 ‘오라클’은 그의 재림을 예언했지. 그가 매트릭스를 파멸시키고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인류를 구원할 거라고. 그래서 우린 평생 동안 매트릭스에서 그를 찾았지. 그를 찾았다고 믿었기에. 난 내 할 일을 한 거야. 푹 쉬어. 휴식이 필요할 거야.
네오: 뭘 위해서요?
모피어스: 훈련을 위해서!
모피어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네오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의심과 불안이 꿈틀거린다. 그럴 리 없어. 모두가 거짓이야. 예언이라니, 계시라니. 그런 건 다 신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야. 모피어스가 전해주는 오라클의 계시를 믿지 않으려는 네오의 마음. 그것은 세속적인 삶에 대한 미련이기도 하고 신성한 세계의 일원으로서 참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기도 하다. 막상 세속의 삶(파란 약)을 잊어버리려니 그 편안함과 익숙함이 발목을 잡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그’가 아니면 어쩔 것인가. 그들의 실망을, 아니 나 자신의 절망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아,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모피어스 일행 중 ‘사이퍼’의 존재가 바로 이 세속을 향한 미련을 대변하는 존재다. 그는 세속의 열망에 찌들어 신성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한 존재다. 그는 모두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애송이 네오를 질투한다. 네오가 충격의 여파로 며칠 동안 잠에 빠져 있을 때 네오의 잠든 얼굴 위로 쏟아지는 트리니티의 따스한 눈길. 아직은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남아 있지만 제발 네가 ‘그’이기를 바라는 트리니티의 시선이야말로 사이퍼를 더욱 자극한다. 저 아름다운 눈빛이 내 것일 수 있었는데. 사이퍼가 질투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네오를 바라보는 동안 네오는 진정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죽음의 고통을 통과한 새로운 삶이야말로 부활의 청신호일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우주는 태초의 물에로 용해된다. (……) 1년 내내 존재하였던 세계가 진정으로 사라진다. (……) 한 해의 모든 죄, 시간이 더럽히고 닳게 만든 모든 것은 무화된다. 세계의 무화와 재창조에 상징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인간 역시 새롭게 창조된다. (……) 새해가 올 때마다 인간은 그의 죄와 실패의 짐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더 자유롭고 더 순수해졌다는 느낌을 가진다. 그는 천지창조의 신화적인 시간, 따라서 거룩하고 강력한 시간에 다시 돌아간다.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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