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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 18. ‘아름다운 망상’과 ‘참담한 삶’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 18. ‘아름다운 망상’과 ‘참담한 삶’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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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름다운 망상참담한 삶

 

 

한편 내쉬는 서른 살 이후 거의 30여 년간 자기 안에서 타오르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중세 서양의 파우스트 전설과 이 전설을 소재로 한 괴테의 희곡에 나오는 악마)의 속삭임과 씨름했다. 때로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달콤한 유혹에 정신을 잃기도 하고, 오직 메피스토펠레스만이 창조력의 고갈에 신음하는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기도 했으며, 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빼앗아 가려는 정신병원과 가족과 친구들에게 저항하며 모든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기도 했다. 그는 정신분열증의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자신의 좌절된 무의식과의 힘겨운 조우를 계속했다.

 

신의 왼발을 자처하는 내쉬의 사명감은 너무 거대해진 나머지 교수직도 버리고 아예 미국을 떠나버렸으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소동을 벌이기도 했고, 생의 전부였던 수학도 버린 채 정치에 뛰어들어 세계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훌훌 벗어던지면 자신의 무의식이 인도하는 우주적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융은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무의식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중함과 조심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무의식의 광휘에 사로잡히거나 무의식의 난폭 운전에 의식이 희생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선악을 넘어서존재하는 거대한 영혼의 마그마다. 무엇으로 부활할지 모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덩어리. 이 무의식을 예술로, 학문으로,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의식의 힘이었다. 그 의식이 통제로만 기능하면 강박증에 사로잡히고, 거꾸로 의식이 무의식에 사로잡히면 광기로 치닫기 쉬웠다.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출렁이면서 의식에 고삐를 놓지 않는 것, 의식의 고삐를 잡은 것조차 잊고 무의식의 창조적 상상력에 몸을 맡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칼 융과 존 내쉬의 과제는 같았다. 인간 무의식의 극한을 실험하면서 그 무의식의 광휘에 눈멀거나 그 불길에 타버리지 않는 것.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한 줌이라도 더 의식의 차원으로 불러내어 창조적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

 

내쉬는 오랫동안 무의식의 광휘에 압도되어 자신의 의식과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극도의 모험을 감행했다. 이혼과 실직의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둘째 아들마저 자신처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때로 강제 입원강제 치료로 인해 증상이 호전되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쉬는 안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했다. 그에게 치료는 우주와 교통하는 듯한 신성한 체험의 행운을 빼앗는, 거대한 폭력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무의식의 통찰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을 때의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 그것이 그가 치유될 때마다 느끼는 고통이었다. 동료들이 그의 명석한 판단력이 돌아왔다고 안도할 때마다 내쉬는 스스로 타락했다고 느꼈다. 아직 완전히 정신분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그의 고백은 부분적으로무의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합리적 사고를 할 때, 우주와 개인과의 소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증세가 완화되는 것은 강제된 합리성의 막간극이라고도 했다.

 

정신질환 자체는 고통스러웠지만 내쉬는 일상생활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향유의 유혹을 버리기 힘들었다. 그 향락이 끝나는 것이 곧 치유였기에, 그는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의 신비한 기운, 고차원적인 사고 능력이 박탈되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게다가 정신의학이 아직 고도로 발달되기 전의 미국 주립정신병원은 거의 모든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의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내쉬 또한 스스로를 끔찍한 실험대상 중의 하나라고 느낄 만했다. 위험천만한 인슐린 요법과 전기 치료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남겼다. 증세가 잠시 호전될 때마다 내쉬는 아름다운 망상대신 참담한 삶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투약을 거부했으며 왜 약을 먹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약을 먹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내쉬의 고통을 바라보는 또 다른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떠나간 아내 앨리샤. 그녀가 오랜 방황 끝에 다시 내쉬에게로 돌아온 것이 결정적인,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었다. 발병 이후 거의 20년 만에 내쉬는 그토록 원하던 자유와 안전과 우정을 되찾게 되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또다시 입원시키려 하자 겁에 질린 내쉬는 이혼한 전처 앨리샤에게 구원요청을 했던 것이다. 앨리샤는 내쉬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며 공격적인 치료가 진정한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샤는 지난 날 여러 차례 그를 강제 입원시켰던 것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앨리샤는 오갈 데 없는 전남편을, 한때 천재로 명성을 날렸으나 이제 변변한 직업도 없이 옛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가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한다. 고통을 배제하려고 몸부림칠수록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통으로부터 한사코 도망치다 고통의 올가미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고통과 더불어 살기로 마음먹는다. 태연하게 고통과 동거하기 시작하자 고통은 더 이상 예전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다. 30년 이상의 고통스런 견딤의 시간이 지난 후 앨리샤는 내쉬가 치료된 원인을 이렇게 멋지게 해석했다. “그래요. 내 남편은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치유되었지요. 회복의 원인은 구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고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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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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