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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 17. ‘새로운 아이의 놀이’로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나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뷰티풀 마인드와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 17. ‘새로운 아이의 놀이’로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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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새로운 아이의 놀이로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나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 사상, 김영사, 2007, 536.

 

 

내가 차마 가지 않은 길이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때 가지 않은 길 때문에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놓인 길이 매끄럽고 탄탄한 도로이며 모두가 걷고 싶어 하는 대로(大路)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길이 생각처럼 평탄하지도 않으며 게다가 어느 날 문득 그 길 위에 나 혼자 서 있음을 깨달을 때도 있다.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그 길을 선택했을 것임을.

 

내 앞에 분명히 믿음직한 길잡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길로 접어든 경우, 우리의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분명 그 사람을 믿고 따르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으리라 믿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다른 길같은 길이라 생각하며 걸었던, 서로를 향한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했을 때도 그랬다. 융은 가장 존경하는 대상에게 가장 깊은 실망을 느껴야 했고, 자신이 아버지를 따르는 아들이 아니라 아직 아들조차 낳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아버지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프로이트와 인연을 끊은 후 융은 절망적인 방향상실 상태에 빠진다. 아무 것도 붙잡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텅 빈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 생의 나침반을 영원히 상실한 듯한 아찔함, 환자들을 돌보다가 스스로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융은 차라리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진보의 욕망을 떨쳐버린다. 그는 그동안 공부했던 모든 것이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바로 그때 그는 내면에서 속삭이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토록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내버려두자. 융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무의식에 충동에 맡겨버린다.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 (……)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칼 융, 조성기 역, 기억, , 사상, 김영사, 2007, 490.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둔 채 무의식에게 길을 묻자 무의식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놀이를 떠올려보라고. 학문과 출세의 길을 거의 동시에 달리고 있었던 30대 후반의 융에게 불현듯 떠오른 이미지는 진흙과 벽돌을 오밀조밀하게 쌓아올려 나만의 집을 만들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부르며 함께 놀자는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융은 깨닫는다. 열한 살 소년과 지금의 나를 이어주기 위해서는,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그때 그 소년의 놀이를 다시 재연해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벽돌로 집을 지으며 까르르 웃고 있는데, 성인이 된 자신은 인생의 방향타를 잃어 완전히 좌절하고 있음을, 융은 직시한다. 그 소년은 내가 완전히 잃어버린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데, 나만 여기 남아 권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니.

 

융은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때 그 시절 열한 살 소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밖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자 어쩔 수 없는 굴욕감이 덮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호숫가와 물속에서 돌을 찾고 흙을 퍼 나르는 동안 그는 놀이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의식을 깡그리 잊고 다만 즐겁게 놀이에 몰두한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집을 짓기 시작했다. 환자가 찾아오는 시간을 빼고는 온전히 열한 살 아이가 되는 시간을 기쁘게 누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길 잃은 나조차 잊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차마 가지 못한 길을, 잃어버린 자신을, 늦었지만 생생하게 다시 체험하는 혼자만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욕망과 길잡이를 잃어버린 고독과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우는 고통을 선뜻 넘어서 버린다. 그는 그때부터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아내가 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전쟁이 일어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아이의 놀이를 시작함으로써 자신이 억압했던 무의식의 맨얼굴을 만난다. 유능한 정신과 의사이자 학자가 갑자기 모든 연구 활동을 접고 집짓기 놀이에 몰두하는 것은 자칫 어리석은 퇴행이나 부질없는 망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처절한 전투와 망아의 희열을 동시에 경험하는 정신의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기념비적인 저작이 탄생했고, 잊을 수 없는 발견이 잇따랐다. 그에게 어린이 되기는 무의식의 내밀한 무늬와 숨결을 올올이 체험하는 내면의 통과의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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