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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색 & 계와 롤랑 바르트[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 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색 & 계와 롤랑 바르트[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 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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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의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을 떠올린다. 결벽증과 강박증을 함께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자기예찬증(?)을 앓고 있는 멜빈은 타인의 삶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 외에는 철저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늘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오직 자신이 휴대하는 포크와 숟가락으로만 먹는다.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그를 윽박질러 잔인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만든 동굴 속 세상에서 군림하던 외톨이 황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휘청거린다.

 

옆집 남자의 애완견이 복도에서 오줌을 눴다며 그 연약한 강아지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기까지 했던 철면피 나르시시스트 멜빈. 그렇게 만인의 노여움을 샀던 멜빈의 한일자로 굳어 있던 입술에서 간신히 터져 나온 사랑 고백은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주었다. “당신 때문에 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소(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오랫동안 입 속에 머금은 채 좀처럼 삼키고 싶지 않은 사탕처럼, 아릿하게 달콤했던 이 고백은 멜빈 인생의 비포 앤 애프터(Before & after)’를 가로지르는 결정적 경계선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인의 삶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수없이 넘어진다. 하지만 흉터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로 인해 우리는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삶의 다채로운 풍경과 맞닥뜨리곤 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이라는 지뢰를 밟고 넘어져 허우적거릴 때 땅바닥을 더듬거리는 손을 잡아 조용히 일으켜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밟아버린 타인의 삶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인생의 경로가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매일매일 부딪히는 타인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삶 또한 평생 막다른 골목길 안에서만 뱅뱅 도는 기약없는 미로찾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변함없이 안전한 런닝머신 위에만 놓여 있는 삶. 타인의 삶에 묻어 있는 걱정과 손해라는 바이러스가 혹시 나에게 옮을까 두려워 그 어떤 타인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던 멜빈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이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 해도 & 의 양조위만큼은 아니었다. 천하의 잭 니콜슨도 & 의 양조위만큼 경계심이 많지는 않았다. & 에서는 친일 관리로 등장하는 이 선생(양조위)의 곁에 미인계로 접근했다가 가차 없이 목숨을 잃은 여자들이 있을 정도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와 흔적에 삼엄한 거짓말탐지기를 갖다 댄다. 이 선생이 자신의 까다로운 취향에 꼭 맞는 옷 가게를 소개해준 막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하자 막 부인은 별일 아닌 걸요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이 선생은 막 부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한다. “이 세상에…… 별거 아닌 일은 없소.”

 

 

 

 

항시적 살해위협에 노출된 이 선생에게는 세상 모든 인물과 사건, 사물이 하나하나 더없이 예민한 기호와 상징으로 보인다.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 며칠 동안 홀연히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급해진 막 부인은 묻는다. “난징에 갔다 오셨다면서요?” 그는 겨울산의 암벽처럼 차갑게 대답한다. 언제 우리가 사랑을 나눴냐는 듯이. “귀에 들린다고 다 믿지는 마.” 그는 타인을 믿지 않듯이 그녀도 자신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주위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드리운다. 그러나 발군의 두뇌와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수많은 암살 계획을 낱낱이 밝혀낸 이 선생조차도 그녀의 마음이라는 난해한 상형문자를 해독하지는 못한다.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우면서도 그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 하루하루 가혹한 불면에 시달리는 그녀의 마음을.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몸을, 나중에는 그녀의 영혼을, 결국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게 된다. 그는 그녀와의 밤만이 아니라 그녀와의 대화를, 그녀와의 남모르는 교감을 원한다. 이제 그에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로 나를 고문하는 중이야.” 그는 그녀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쏘아버린 진심이라는 뜨거운 화살에 맞아 비틀거린다. 계엄군에게 쫓기는 게릴라처럼 은밀하고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섹스만으로는 그녀의 사랑에 화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일까. 그는 이제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자 한다. 어떤 시스템도, 어떤 금기도 틈입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만의 비밀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그는 그녀에게 명함을 주며 누군가를 찾아가보라고 말한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라고 속삭이며. 아무도 믿지 않던 이 남자가 오직 이 여자만을 믿고 오직 이 여자만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한다. 그가 믿었던 세계의 투명한 장막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시시콜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선연한 상처의 틈새로 온전히 교감했다. 그리하여 나와 너 사이에 놓여 있던 삼엄한 경비장치는 스스로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바르트는 텍스트가 명징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웠다. 또한 가면과 내면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신념과 싸웠으며, 육체와 정신을, 표정과 욕망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웠다. 마침내 그는 사랑에 빠진 너와 나를 분리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파괴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타자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오만과 결별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타자의 내면, 그 견고한 빗장은 열리기 시작한다. 무진장 어렵지만 의외로 쉬운 일이다. 우리가 짐작하는 그곳에 그가 항상 머물고 있다는 환상, 우리가 의도하는 그곳에 그녀가 얌전히 존재한다는 환상과 작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바르트의 신화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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