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 계와 롤랑 바르트
풍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1.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그토록 완고하게 닫혀 있던 이 세계가, 단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휘청,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깨닫는다. 바닷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듯, 아무리 애를 써도 꿈쩍하지 않던 세상이,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헝클어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아름다운 노래는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이라는 치명적인 가사로, 안 그래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멍든 가슴을 다시 한 번 살뜰하게 할퀴어 주었다.
창유리 새로 스미는 햇살이 빛바랜 사진 위를 스칠 때
오래된 예감처럼 일렁이는 마당에 키 작은 나무들
빗물이 되어 다가온 시간이 굽이쳐 나의 곁을 떠나면
빗물에 꽃씨 하나 흘러가듯 마음에 서린 설움도 떠나
지친 회색 그늘에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파도처럼 노래를 불렀지만 가슴은 비어
그대로 인해 흔들리는 세상
유리처럼 굳어 잠겨 있는 시간보다 진한 아픔을 느껴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저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웠던 세상이,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었을 때야, 비로소 조금씩 그 투명한 속살을 보여준다. 절대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상처, 그렇게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 그것을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풍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명쾌하게 분석될 것만 같은 세계가 어느 순간 전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바뀌어 버릴 때.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풍크툼’과 만나는 순간이다. 풍크툼(점, 点)은 라틴어로 뾰족한 물체로 인해 받은 상처, 흔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사진의 풍크툼은 평온했던 나의 의식을 찌르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극을 주는 우연하고 돌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풍크툼의 특징은 물론 예리한 ‘아픔’이지만, 풍크툼의 더욱 중요한 특징은 그 상처가 이해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예비하거나 대처할 수도 없고, 정리해서 요약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이 세계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토록 이해되지 않았던 세상이, 누군가의 참혹한 죽음으로 인해, 비로소 투명하게 만져지는 느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을 명징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 고통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줄 수도 없다. 사진 읽기를 통해 세계의 울퉁불퉁한 상처를 맹렬하게 더듬었던 롤랑 바르트. 그는 사진의 이미지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스투디움(studium)과 풍크툼(punctum). 스투디움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일반화된 상징이라면, 풍크툼은 좀처럼 해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아픔을 낳는 상징이다. 스투디움이 소통 가능한 획일적인 상징이라면 풍크툼은 소통 불가능한, 그리하여 더욱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상징이다.
견고하게만 보이던 이 세계의 피부가 찢어질 때, 우리가 그 속살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평등한(?) 경험은 바로 연애가 아닐까. 중국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 1920~95)은 소설 『색 & 계』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남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위장으로 통해 있고, 여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자의 음도(陰道, vagina)를 통해 나 있다고. 남자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해주는 여자를 만나면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말이니, 남자 쪽의 사정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정말 여성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은 너무도 비좁고 은밀한 그곳, 성기를 통해야 하는 걸까. 소설 『색 & 계』의 주인공 장 지아즈는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그따위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저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그런 대단한 학자가 여자의 심리에 대해 그토록 저속한 비유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연애를 하거나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던 장 지아즈는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할 대상과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4년에 걸쳐 공들여 쌓아온 탑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이 일로 인해 그녀와 조직원들 모두가 죽음의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위태로운 사랑에 빠져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와의 잠자리는 분명히 철저한 ‘연극’에 불과했다. 그녀의 두뇌는 완벽히 임무에 충실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녀의 두뇌가 아니라 그녀의 성기를 통해 몰래 잠입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구를 결코 찾지 못했다.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감독 리안(李安, 1954~)은 영화 〈색 & 계〉를 통해 21세기 영화사에서 가장 슬픈 섹스 장면을 연출해냈다.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울 것 같은 한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상처받기 쉬울 것 같은 한 여자가 만났다.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 탐색전: 무대 위의 연극 vs 무대 뒤편의 침묵
섹스 자체가 삶의 욕망과 분노와 슬픔, 그 모든 것의 알레고리인 영화는 수없이 많았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각의 제국』, 『그녀에게』 등등 수많은 영화에서 섹스는 단지 몸과 몸의 얽힘이 아니라 삶과 삶의 뒤얽힘이었고 인간의 근원적 소통불가능성의 뼈아픈 확인이었다. 그러나 『색 & 계』에서 그들의 섹스의 이미지가 유독 슬프고 힘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도 장 지아즈, 즉 막 부인(탕웨이)의 캐릭터 탓인 것 같다. 그녀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처럼 발랄하고 앙큼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쾌활한 캐릭터가 아니다. 또한 『감각의 제국』의 여주인공 마츠다 에이코처럼 나른하게 몽환적이면서도 의외로 강인한 캐릭터도 아니다. 장 지아즈는 『그녀에게』의 투우사 리디아처럼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뿜어내지도, 아름다운 무용수 알리샤처럼 생기발랄하고 투명한 캐릭터도 아니다. 그런데 『색 & 계』의 탕웨이는 그 모든 기념비적인 캐릭터들보다도 확실하게 관객을 ‘압도적인 슬픔’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 그럴까.

그녀는 이 모든 여인들보다 너무 느리고,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예민하다. 그녀는 한 가지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신중하다 못해 조금은 답답한 여인이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와도 함부로 사랑에 빠지지 못한다. 그녀를 연극의 세계로 이끌었던 광위민에게 잠깐 호감을 느꼈지만, 열혈남아 광위민은 아직 여인보다 신념을 사랑하는 순수 청년이었다. 『색 & 계』가 2시간 40분 동안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지루한 것인지 긴장감 넘치는 것인지 자꾸만 헷갈리게 만드는 이유는, 남녀주인공 모두가 돌다리도 수백 번 두들겨보고 끝내는 건너지도 않을 것 같은 극도로 예민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 만난 순간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한사코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항시적으로 암살 위험에 처해 있는 매국노(易 선생: 양조위)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그의 불륜녀라는 배역을 맡은 여자가 만났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경계심 많은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여자가 만난 셈이다.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핑계 삼아 흐느끼는 여자와 영화를 보고 싶어도 어두운 곳이 무섭고 싫어 영화관에 갈 수 없는 남자가 만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들의 침대에서는, 그들의 내면에서는, 어떤 감정의 해일이 몰아치게 될까.
1942년 상하이. 막 부인(탕웨이)은 한껏 긴장된 몸짓으로 전화를 건다. 일상적인 대화를 가장한 암호임이 분명한 대화를 주고받은 그녀는 까페에 앉아 과거를 회상한다. 4년 전, 그녀는 홍콩의 대학생이었다. 2차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영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기다리는 왕 치아즈. 그녀의 본명이다. 그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버지는 재혼했다는 소식만을 달랑 보내오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심심한 축하 편지를 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심상하게 축하 편지를 쓰지만, 그녀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마치 슬픈 영화 탓인 양, 숨죽여 흐느낀다. 그녀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철저하게 고독하다.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마저 재혼한 후, 그녀의 고독을 어루만져준 것은 연극이었다.

그녀는 항일 급진파 청년 광위민의 권유로 연극반에 가입한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부르주아 연극’이라 몰아붙이고 항일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는 연극으로 나태한 홍콩의 인민들을 각성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 청년에게, 왕 치아즈는 순수한 매력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여주인공으로 데뷔한 연극에서,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희열을 느낀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더 이상 나약하고 내성적인 소녀가 아닌 자신을 발견한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그 열광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왕 치아즈는 ‘연극하는 자아’를 향한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광위민은 급진파 항일단체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친일파 핵심인물인 이(易) 선생(양조위)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광위민의 친구들과 왕 치아즈는 그 계획에 합류한다. 광위민은 말한다. “이번엔 연극이 아니야.” 그러나 이 말은 반어적으로 들린다. 이 선생을 암살하기 위해 그들은 신분을 위장하여 이 선생의 주변으로 침투해야 한다. 이제 그들은 더욱 판돈이 커진 또 하나의 거대한 연극적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여배우 탕웨이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녀는 현실이 아니라 연극 안에서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탕웨이는 장 치아즈이기보다 맥 부인일 때 오히려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녀는 차라리 조작된 연극 속에서 암살 대상과 유일하게 친밀한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연극 밖에서는 한없이 외롭고 불안한 존재로 전락해간다.

3. 첫 번째 풍크툼(punctum): 낭만적 나르시시즘의 세계가 파열되다
이 선생의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두 사람의 밀회는 더없이 스릴 넘치는 두뇌 게임처럼 급박하게 진행된다. 막 부인이 이 선생을 옷가게로 유인하여 두 사람이 첫 번째 밀회를 갖게 되는 날. 그녀가 자신의 사이즈에 맞게 고친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살짝 밀며 이 선생 앞에 나타나는 순간. 관객들은 짧고 덧없는 한숨을 쉰다. “고치니까 너무 붙네요. 숨이 막힐 지경이예요.”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에 숨 막혀 하는 동안, 관객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힌다. 장 지아즈가 아닌 막부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관객의 시선은 정확히 이 선생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금방이라도 어둡고 깊은 밀실로 그녀를 유인할 듯이 탐욕스럽고 색정적이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그는 명령하듯 쏘아붙인다. “그냥 입고 가시오!” 막 부인과 함께 마작을 하며 친분을 쌓던 상류층 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이 선생의 노골적이고 격정적인 눈빛이 그녀의 몸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이 위태로운 연극이 끝난 후 돌아와 쉴 수 있는 백스테이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위민이 이끄는 암살단이 성공적인 조직이었다면, 그녀가 무대 뒤편으로 돌아와 ‘장 치아즈’가 되어 쉬는 동안 그녀는 신뢰와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조직원들은, 그녀를 동지가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하며 그녀에게서 멀어진다. 그녀가 ‘적과의 동침’을 해야 할 임무를 맡았기에 그녀의 연극은 연극으로만 비춰지지 않는 걸까. 처음부터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걸어야 했다. 이 선생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불안해한다. 그에게서 또 한 번 전화가 온다면, 그녀는 그의 불륜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녀는 ‘첫 경험’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질문한다. “어떻게 하는지 알아? 남녀간의…… 그거…….” 그런데 친구들, 아니 조직원들의 표정이 이상하다. 그들은 이미 ‘합의’가 된 상태인 것 같다. “경험자는 량룬셩 뿐이야.” “창녀하고?” 그녀는 암살대상과 섹스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순결을 턱없이 엉뚱한 남자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제 그녀는 이 선생을 유혹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이 철부지 암살단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공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분명히 여섯 사람 모두 동의한 임무 수행을 위해 그녀는 몸을 던졌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시선이 왠지 불편하게 서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즈음 이선생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일 상하이로 떠난다고. 청천벽력이다. 이제 이 선생을 유혹하여 곧 암살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모두들 사색이 된다. 다급한 목소리로, 내일 공항으로 배웅을 나가겠다는 ‘막 부인’의 애원도 소용없다. 그들은 이 엄청난 연극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엔, 너무도 철없는 풋내기 배우 지망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풍크툼’은 이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강하지 못했기에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다. 이 선생의 측근, 조덕희가 그들의 음모를 눈치채버린 것이다. 그들은 조덕희가 원하는 ‘막 부인의 목숨 값’을 흥정하는 데 실패한다. 어떤 돌발 상황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도 모자랄 판에, 그들은 명백한 불청객의 등장에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없다. 그들은 창졸간에, 정말 얼떨결에, 조덕희를 살해하고 만다.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유리문 밖에서 목격하고 있던 막 부인, 아니 장 치아즈는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입고 만다.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공포와 고통에 제대로 울부짖지도 못한 채 휘청거리며 사라져버린다. 아무도 그녀를 잡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위급한 상황에서 서로의 동선을 체크할 만할 비상 대책은 물론, 이탈하는 동지를 붙잡을 최소한의 용기나 우정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첫번째 풍크툼은 이렇게 잔혹하게 그녀의 삶에 예리한 메스를 긋는다. 그녀가 한때 믿었던 신념과 조직, 우정과 열정은 모두 찰나의 헛것이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러나 그녀는 한동안 이 맹렬한 고통의 진원지조차 알지 못했다. 조직의 실패가, 그녀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뼈아픈 상실감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다. 롤랑 바르트라면 이것이 바로 풍크툼이라 말하지 않을까. 그녀의 첫 번째 풍크툼, 그것은 그녀와 그 친구들의 찬란한 나르시시즘이 철저히 찢겨나가며 생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매끈한 나르시시즘적 정열에 사로잡혀 날것의 세상이 자아내는 울퉁불퉁한 진면목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이 상처에 대해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풍크툼의 특징은 ‘소통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쉽게 소통될 수 있는 아픔이라면 그것은 관습화된 상징, 즉 스투디움이니까. 바르트는 필생의 역작 『카메라 루시다』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다.”


4. 두 번째 풍크툼: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의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 멜빈(잭 니콜슨)을 떠올린다. 결벽증과 강박증을 함께 앓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자기예찬증(?)을 앓고 있는 멜빈은 ‘타인의 삶’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기 욕망 외에는 철저히 타인에게 무관심한 그는 늘 같은 식당 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오직 자신이 휴대하는 포크와 숟가락으로만 먹는다. 늘 앉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그를 윽박질러 잔인하게 쫓아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만든 동굴 속 세상에서 군림하던 외톨이 황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 휘청거린다.
옆집 남자의 애완견이 복도에서 오줌을 눴다며 그 연약한 강아지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기까지 했던 철면피 나르시시스트 멜빈. 그렇게 만인의 노여움을 샀던 멜빈의 한일자로 굳어 있던 입술에서 간신히 터져 나온 사랑 고백은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주었다. “당신 때문에 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소(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오랫동안 입 속에 머금은 채 좀처럼 삼키고 싶지 않은 사탕처럼, 아릿하게 달콤했던 이 고백은 멜빈 인생의 ‘비포 앤 애프터(Before & after)’를 가로지르는 결정적 경계선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인의 삶’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수없이 넘어진다. 하지만 흉터만 남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로 인해 우리는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삶의 다채로운 풍경과 맞닥뜨리곤 한다. 우리가 타인의 삶이라는 지뢰를 밟고 넘어져 허우적거릴 때 땅바닥을 더듬거리는 손을 잡아 조용히 일으켜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밟아버린 타인의 삶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인생의 경로가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매일매일 부딪히는 타인의 삶이 없다면 우리의 삶 또한 평생 막다른 골목길 안에서만 뱅뱅 도는 기약없는 미로찾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변함없이 안전한 런닝머신 위에만 놓여 있는 삶. 타인의 삶에 묻어 있는 걱정과 손해라는 바이러스가 혹시 나에게 옮을까 두려워 그 어떤 타인도 자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던 멜빈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이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 해도 『색 & 계』의 양조위만큼은 아니었다. 천하의 잭 니콜슨도 『색 & 계』의 양조위만큼 경계심이 많지는 않았다. 『색 & 계』에서는 친일 관리로 등장하는 이 선생(양조위)의 곁에 미인계로 접근했다가 가차 없이 목숨을 잃은 여자들이 있을 정도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와 흔적에 삼엄한 거짓말탐지기를 갖다 댄다. 이 선생이 자신의 까다로운 취향에 꼭 맞는 옷 가게를 소개해준 막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하자 막 부인은 “별일 아닌 걸요”라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다. 이 선생은 막 부인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한다. “이 세상에…… 별거 아닌 일은 없소.”

항시적 살해위협에 노출된 이 선생에게는 세상 모든 인물과 사건, 사물이 하나하나 더없이 예민한 기호와 상징으로 보인다.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 며칠 동안 홀연히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급해진 막 부인은 묻는다. “난징에 갔다 오셨다면서요?” 그는 겨울산의 암벽처럼 차갑게 대답한다. 언제 우리가 사랑을 나눴냐는 듯이. “귀에 들린다고 다 믿지는 마.” 그는 타인을 믿지 않듯이 그녀도 자신을 믿지 못하도록 자신의 주위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드리운다. 그러나 발군의 두뇌와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수많은 암살 계획을 낱낱이 밝혀낸 이 선생조차도 ‘그녀의 마음’이라는 난해한 상형문자를 해독하지는 못한다.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우면서도 그를 죽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 하루하루 가혹한 불면에 시달리는 그녀의 마음을.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몸을, 나중에는 그녀의 영혼을, 결국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원하게 된다. 그는 그녀와의 밤만이 아니라 그녀와의 대화를, 그녀와의 남모르는 교감을 원한다. 이제 그에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다. “당신을 기다리는 일로 나를 고문하는 중이야.” 그는 그녀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쏘아버린 ‘진심’이라는 뜨거운 화살에 맞아 비틀거린다. 계엄군에게 쫓기는 게릴라처럼 은밀하고 급박하게 이루어지는 섹스만으로는 그녀의 사랑에 화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일까. 그는 이제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자 한다. 어떤 시스템도, 어떤 금기도 틈입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두 사람만의 ‘비밀’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그는 그녀에게 명함을 주며 누군가를 찾아가보라고 말한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라고 속삭이며. 아무도 믿지 않던 이 남자가 오직 이 여자만을 믿고 오직 이 여자만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기 시작한다. 그가 믿었던 세계의 투명한 장막이 찢어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시시콜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선연한 상처의 틈새로 온전히 교감했다. 그리하여 나와 너 사이에 놓여 있던 삼엄한 경비장치는 스스로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바르트는 텍스트가 명징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웠다. 또한 가면과 내면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신념과 싸웠으며, 육체와 정신을, 표정과 욕망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환상과 싸웠다. 마침내 그는 사랑에 빠진 너와 나를 분리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파괴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타자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오만과 결별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타자의 내면, 그 견고한 빗장은 열리기 시작한다. 무진장 어렵지만 의외로 쉬운 일이다. 우리가 짐작하는 그곳에 그가 항상 머물고 있다는 환상, 우리가 의도하는 그곳에 그녀가 얌전히 존재한다는 환상과 작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바르트의 『신화학』중에서

5. 세 번째 풍크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Nobody loves me)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굳게 믿었던 여자의 첫사랑. 그것만큼 위험하고도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이다. 파니 핑크는 “서른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날 확률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는 독설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어버린 쓸쓸한 스물아홉 싱글이다. 그녀는 연애는 해봤지만 사랑에는 결국 실패했다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사랑을 꿈꾸지만 ‘친밀해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다. “당신이 실망할까 겁나요. 섹스에 있어서 난 좀 바보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머리가 방해하거든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돼요. 냉장고에 남아 있는 우유의 유통기한이나, 연말정산에서 세금을 얼마나 돌려받을지, 아니면 발 냄새가 나진 않을지. 내 모습이 지금 어떻게 보일까 신경 쓰죠. 내가 너무 무겁지 않나 신경 써야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단 얘긴 아녜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녀는 사랑을 나눌 때조차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원망한다. 관객은 그녀에게 무슨 특별한 결격사유가 있는 것일까, 요모조모 관찰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지나치게 멀쩡하다. 그녀가 영화 초입에 툭 내뱉는 대사가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그녀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나 자신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녀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진짜 문제를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피해망상으로 은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웃집 남자인 심령술사 오르페오는 그녀에게 손금을 봐주겠다며 장난스럽게 접근한다. 운명의 남자를 점쳐준다 호들갑을 떨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진정한 솔메이트가 된다. 가난과 질병, 고독과 차별로 황폐해진 오르페오의 영혼은 너무도 티 없이 건강하다. 그는 과거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에 주눅들지 않는 영혼이다. 죽어가는 오르페오의 사랑보다 깊은 우정은 아프지 않은데도 늘 아프다고 믿는 파니 핑크의 가녀린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준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생일이 될 거라 믿었던 서른살 파니 핑크의 생일, 오르페오가 립싱크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Non, Je Ne Regrette Rien)』는 그녀의 그늘진 영혼을 밝히는 영원한 빛이 되어준다.

하지만 우리의 막 부인, 아니 왕 치아즈에게는 『파니 핑크』의 오르페오처럼, 사랑이 떠나가도 사랑보다 더 짙은 우정을 선물해주는,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이 없이도 사랑 그 자체를 저절로 알게 해주는 다정한 멘토가 없다. 사는 내내 빈방에 갇혀 있는 듯 쓸쓸해 보였던 왕 치아즈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거나 ‘누군가 날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 여자는, 심하게 둔하다. 이 선생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인(sign)을 여러 번 보내지만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는 그녀는, 그리고 아무도 사랑해본 일이 없는 그녀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여자는 더욱 위험하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그 어떤 사랑도 진정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그 모든 관계를 향한 열망이 ‘한 남자’에게로 투사될 위험 말이다. 그녀 곁에는 오직 그녀를 살인공작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조직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이 선생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녀에게는 희미한,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첫 사랑 광위민의 뒤늦은 고백도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통조림이다. 뒤늦게 사랑을 느낀 광위민은 그녀에게 키스하지만 그녀는 그의 몸을 조용히 밀어내며 말한다. “왜 3년 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


광위민은 이제야 그녀를 도우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조직은 너무 완고하다. 광위민은 항일 조직의 브레인 격인 우 선생에게 왕 치아즈를 그만 작전에서 빼야 한다고 경고한다. “그녀는 정식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장기간의 압박은 버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 선생은 그녀의 이용 가치만을 생각한다. “왕 치아즈가 정말 잘해줬어. 이 기회를 잘 살려야 해.” 우 선생은 왕 치아즈를 칭찬하기까지 한다. “왕치아즈의 강점은 자신이 첩보원이란 의식을 지우고 막 부인이란 배역과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거네.” 우선생은 알지 못한다. 이제 첩보원 왕 치아즈는 사라져가고 사랑에 빠진 막 부인만이 남았다는 것을. 그녀는 배역과 혼연일체가 된 나머지 현실로 돌아오는 출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어엿한 운동가로 성장한 광위민은 그녀를 구하고 싶다. “지금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계십니까? 그녀는 이미 할 일을 다 했습니다. 이젠 우리가 행동할 차례란 말입니다.” 그러나 우 선생은 광위민보다 더 처절하게, 이 선생을 효과적으로 암살하여 조직의 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해야 할 의무를 강조한다. “놈은 내 아내와 내 두 자식들을 죽였지만 난 놈과 식탁 하나를 두고 식사까지 했다. 이게 바로 첩보원이다! 나보다 더 놈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없어. 놈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난 놈을 조금 더 살려줄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절실함을 주장할 때, 승자는 더 큰 권력을 가진 자일 수밖에 없다. 우 선생은 개인적 복수심과 조직의 안녕이라는 커다란 대의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킨 사람이기에 조직원의 ‘하찮은 사랑놀음’ 따위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

6. 세 번째 풍크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도 없다. 오직 그녀의 암살 대상이자 마지막 사랑, ‘이 선생’뿐이다. 그녀는 우 선생에게 고백한다. 자신은 이제 연극과 현실을 구별할 이성을 잃어버렸다고. “그는 제 몸뚱이뿐 아니라 한 마리 뱀처럼 제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옵니다. 매번 더더욱 깊숙이……. 매번 그는 제가 절정에 몸부림 치고 울부짖게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만이 제 감정이 진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우 선생은 ‘첩보원답지 않은’ 그녀의 아마추어적 정직함에 놀라 그녀의 고백 자체를 거부한다. “됐다! 그만해라!”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고백은 너무 솔직해서 소름이 끼치고, 너무 투명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저 역시 진이 다하고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그를 원하게 되는 겁니다. 그의 몸에 힘이 빠지는 그 순간, 난 당신들이 쳐들어와 그를 향해 총을 쏘고 그의 피가 내 몸에 흩뿌려지는 것이 옳은 일인지, 갈등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녀의 처절한 고백은 허공의 메아리로 흩어지고 만다.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한 고백은 안타까운 메아리가 되어 그녀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것은 왕 치아즈가 막 부인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였고, 이제 막 부인이 되어버린 왕 치아즈가 죽을 때까지 솔직해질 수 없는 자신의 암살 대상 이 선생에게 하지 못한 고백이었다.

그녀는 이 순간 연극과 현실을 완벽하게 일치시킨 것이다. 아폴론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다 월계수가 되어버린 다프네처럼 타인의 사랑을 거부하던 그녀가, 이제 어떤 희망도 보상도 없는 사랑에 전 존재를 걸게 된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투명한 진실의 화살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견고한 인식의 장벽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이제 그녀는 두렵지 않다. 더 이상 외롭지도 않다. 내가 그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막 부인의 사랑을 지킬 것이다. 그녀의 사랑을 공격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맞서서.
종기처럼 나의 사랑은 곪아
이제는 터지려 하네.
메스를 든 당신들.
그 칼 그림자를 피해 내 사랑은
뒷전으로만 맴돌다가
이제는 어둠 속으로 숨어
종기처럼 문둥병처럼
짓물러 터지려 하네.
-최승자, 「이제 나의 사랑은」,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49쪽.
그녀는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완벽한 첩보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연기력의 카탈로그에는 굳이 포함되지 않았던, 그녀만의 자발적인, 진솔한 즉흥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북쪽 고향의 산을 바라보니 눈물이 내 옷깃을 적시고. 소녀 여전히 그대를 그리오이다. 낭군이시여. 환난 속 사랑은 더욱 깊으리오. 낭군이시여. 환난 속 사랑은 더욱 깊으리오. 소녀가 실이 되고 낭군께서 바늘이 되면. 우린 영원히 함께 하리이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이 선생의 눈에 언제나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잔혹한 살기와 섬뜩한 냉기가 어느덧 사라지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는 더 많이, 더 오래 함께하지 못하는 안타까움만이 가득하다. 그들의 첫 관계처럼 폭력적인 섹스가 아니라 다만 가만히 손을 잡는 것만으로 이들에게는 완전한 소통이 시작된다.

“오늘은 그냥 가지.” 굳이 밤을 함께 보내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서로 ‘통’했다. 묘하게 연극적이고 유치하면서도 어떤 도덕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의 무구한 동심이 담뿍 담겨 있는 이 노래는 섹스보다 따스하게 그의 마음을 녹여준다. 아무도 엿보지 못한, 거대한 만다라의 현란한 문양처럼 복잡하게 꿈틀거리는 그녀의 마음을 엿본 유일한 사람은 이 선생이었다. 그들이 손을 잡는 순간, 더 이상 섹스 없이도 사랑할 수 있게 된 순간, 그녀는 공포와 절망과 고독을 한꺼번에 떨쳐냈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의 손은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최승자, 「사랑하는 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73쪽.
그녀는 이제 나약하지 않다. 평생 동안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 빈방에 갇혀 있던 왕 치아즈는 이제 외롭지 않다. 그녀를 빈방에 가둔 것은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망상의 벽돌로 지어진 견고한 영혼의 성벽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강력한 믿음의 다이너마이트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7. 색 & 계(Lust & Caution): 욕망과 금지의 끝없는 이중주
욕망과 징계는 언제나 커플처럼 붙어 다닌다. 『색 & 계』의 영어 제목은 “Lust and Caution”이다. 이 제목은 직설적이면서도 암시적으로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우리는 ‘Lust’라는 단어를 보며 채워지지 않는 은밀한 열망을 떠올리고 ‘Caution’이라는 단어를 보며 욕망에 천형처럼 따르는 가혹한 징계를 떠올린다. 영화 제목처럼 그들의 삶은 끊임없는 욕망과 경계, 열망과 경고, 정욕과 징벌의 반복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더없이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후에도 “이러다 들키겠어요”라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삽시간에 깨버리는가 하면, 오랫동안 서로를 목마르게 그리워했으면서도 막상 만나면 “앞으로 다신 이 방에 들어오지 마시오”라고 차갑게 뇌까린다. 그들은 조금씩 서로에 대한 ‘경계(caution)’를 풀면서 자신들의 숨김없는 ‘욕망(lust)’의 맨얼굴과 만나게 된다.
처음에 그는 그녀를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는 그녀를 열망해왔으면서도 마치 열정에 빠진 자신을 저주하듯 그녀의 몸을 학대한다. 이 위악적인 제스처 속에 그의 철벽같은 영혼을 침식하는 균열이 시작된다. 그는 최대한 그녀에게 ‘악한(惡漢)’이 됨으로써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공포를 도착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녀의 성기를 통해 들어온 그 남자는 그녀의 눈을 통해 다시 아름답게 반사된다. 그는 폭력으로 그녀를 장악하여 그녀의 영혼을 피 흘리게 했지만, 그의 폭력에 화답하는 그녀의 시선은 이상하게도 애틋하다. 그는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갈 때 그의 영혼도 함께 두고 온 것을 깜빡 잊어버린다. 그녀의 성기를 통해 들어간 그의 영혼은 그녀의 몸을 관통하여 온몸의 혈관과 세포로 번진 후, 다시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통해 그를 향해 따스한 빛을 뿜어낸다. 이제 그녀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그를 사로잡은 듯한 당당함으로 그를 가진다. 무력한 사냥감처럼 그의 일방적인 욕망에 희생당했던 그녀는 처음 만나는 욕망의 용광로에 스스로 달아올라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제의를 리드하기 시작한다.

철두철미한 계율로 욕망의 비상구를 겹겹이 틀어막고 있던 두 사람은 ‘계(戒)’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색(色)’의 임계점을 발견하는 순간 끝내 완전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첩보원 왕 치아즈의 마지막 미션은 그를 암살 예정 공간으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첩보원 왕 치아즈의 명령을 사랑에 빠진 막 부인은 거역한다. 막 부인의 간절한 욕망을 왕 치아즈의 연약한 징계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암살 직전 일촉즉발의 상황. 이 선생은 그녀에게 너무 반짝거려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지를 선물한다. 죄책감과 부담감이 동시에 엄습하자 반지를 빼내려는 그녀에게 이 선생은 말한다. “그대로 끼고 있어.” 반지 낀 그녀의 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따스하다. “이렇게 귀한 걸 끼고 거리로 나가기 두려워요.” 이 선생은 어느새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바싹 다가와 속삭인다. “내가 지켜줄게.” 이렇게 달콤한 언어는 천하의 냉혈한 이 선생에게서 좀처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순간 그녀는 그들의 완전한 사랑을 가로막던, 아직 찾지 못한 마지막 퍼즐의 한 조각을 발견한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로소 그의 진정을 알아버린 그녀는 계율을 이탈한다. “어서…… 가요! 어서!” 그 순간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굳어진다. 암호처럼 은밀한 그녀의 속삭임에 담긴 수천 가지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린 그는 빛의 속도로 도망친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4년에 걸친 기나긴 첩보 게임은 허망하게 끝난다.

그녀가 속했던 항일운동 조직은 일망타진된다. 그는 본래 냉혹한 승부사였으므로 망설임은 없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진짜 이름을, 그녀의 죽음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처음으로 알게 되는 이 상황이 어쩔 수 없이 당혹스럽다. 왕 치아즈. 그가 한 번도 엿보지 못한 그녀의 내면이 순식간에 한 화면에 펼쳐진다. 그의 부하는 왕 치아즈의 행적을 소상히 보고한다. “모두 여섯 명의 대학생들로 과거 홍콩에서 애국 극단에 참여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왕 치아즈. 홍콩 대학의 연극으로 신문에도 났었습니다.” 그는 분노보다도 더 큰 상실감에 절망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절망을 누설할 수 없다. 부하는 그녀가 갖고 있던 ‘반지’를 내놓으며 전리품을 수거한 병사처럼 말한다. “선생님 반지입니다.” 그 순간 간신히 가장된 아슬아슬한 평정은 무참하게 박살난다. “내 거 아냐!”
“내 거 아냐!”라고 울부짖는 날카로운 목소리에서 수없이 다양한 의미들이 뿜어져 나온다. 서로 모순되지만 모두 저마다 뜨거운 사실인, 다채로운 의미의 스펙트럼이 쓸쓸하게 흩뿌려진다. 그는 화면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의 눈은 모든 것을 말한다. 그 반지는 나와 상관없어. 내가 그녀에게 준 것이니 내 것이 아니야. 너희들이 함부로 손댈 수 있는 반지가 아니야. 이런 방식으로 돌려받아서는 안 돼. 나는 이 반지가 아니라 반지를 낀 그녀의 손이 보고 싶었어. 이 반지는 살아 있는 그녀의 것이야……. 그녀를 위해 반지를 준비하던 그때는 몰랐다. 그 반지가,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랑의 표식이, 채 24시간도 안 되어 죽음의 풍크툼이 되어 그의 삶을, 그가 믿었던 온 우주를 파열시키는 독화살로 변해버릴 줄은.

8. 바르트의 풍크툼: 어머니, 단 하나의 여자
나의 역사적 위치는…… 전위의 후위에 있는 것이다. 전위가 되려면 무엇이 죽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후위가 되려면 그것을 아직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역,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앨피, 2006, 62쪽.
『카메라 루시다』를 낳게 한 것은 바르트의 어머니였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남아 있는 사진들은 그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덧없는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다섯 살 어린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실제 목격한 적 없는 다섯 살 어린이의 사진 속에서 그가 생각하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 사진이 이끄는 사랑과 슬픔의 에너지로 사진에 대한 아름다운 철학적 에세이 『카메라 루시다』를 완성했다. 『카메라 루시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바르트의 유일한 여자, 어머니의 죽음에 바치는, 보낼 수 없는 편지였던 것 같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최고의 아이러니는 그가 어머니의 사진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위해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적 사진을 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이 책에 어머니의 사진이 절대로 실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그 사진을 재연할 수 없다. 그 사진은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그 사진은 자신과는 무관한 사진, ‘일상적인 것’을 표현한 수천 장의 사진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 사진은 결코 가시적인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실증적인 의미의 객관성을 성립시키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이 사진은 시대, 의상, 촬영 효과 같은 스투디움 때문에 흥미를 끌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이 사진에서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할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 위의 책, 246~247쪽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사진은 어떤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어떤 존재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러나 바르트의 책을 통해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다면, 독자들은 보편성 혹은 객관성의 잣대로 사진을 재단하고야 말 것이다. 바르트는 이 피상적인 공감의 놀이를 거부한다. 어설프게 이해받느니 철저히 오해받는 쪽을 택한 것일까. 그는 어머니의 사진이 ‘재현될 수 없다’는 점, 논리적으로 소통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머니의 사진을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존재를 할퀴는 풍크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였던 사진을 발견했을 때, 바르트는 그 사진이 그의 전 존재를 규정하는 치명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에게 ‘사진’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한 불멸의 역작 『카메라 루시다』를 쓸 수 있게 한 것은, 다른 경험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 초래한 삶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했을 때의 아픔을, 그 풍크툼이 그려낸 영혼의 흉터를, 바르트는 이렇게 그려낸다. 돌아가시기 직전, 바르트의 노모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아들 바르트의 세세한 보살핌을 받는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고 한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나의 강렬한 내적 법규였던 어머니를 나의 딸로 체험했다. (……)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는 내가, 바로 어머니의 병을 통해 나의 어머니를 낳은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 위의 책, 246쪽.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시작했던 사진 찾기의 경험이 결국 상실을 더욱 철저하게 재확인하는 경험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은, 마치 ‘내 어머니를 내가 낳은 듯한’ 새로운 희열로 전이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사진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재확인하지만, 사진을 통해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그 사람을 생생한 홀로그램처럼 되살려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가 사진에서 그들을 다시 발견하고 다시 필연적으로 상실의 경험을 반복하는 패턴. 이것이야말로 ‘풍크툼’의 순간이다. 단지 ‘이 사진 참 잘 나왔네’라고 의례적으로 발언하는 ‘스투디움(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상징)’이 아니라, ‘사진 속에 있는 나’와 ‘사진 바깥에 있는 나’가 더 이상 ‘둘’이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존재의 치명적인 관통상. 그것이 바르트가 이야기한 풍크툼이다. 풍크툼은 대상에 대한 완벽한 상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가녀린 이해와 사랑이 아닐까. 완전한 상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불완전한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

타인에게는 별 의미 없는 데면데면한 가족사진이나 군대 간 애인의 사진이, 그의 사진이나마 닳고 닳아 찢어질 때까지 만져보며 그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뼈아픈 풍크툼이 된다. 똑같은 사진이 누군가에게는, 아무와도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절실한 풍크툼이 될 수도 있고, 누구나 심상하게 지나쳐버리는 사진관 전시용 가족사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똑같은 사진이 스투디움이자 풍크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경험했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엄청난 사건을 몰랐을 때는 영화 초입의 판문점 사진이 그저 일반적인 ‘스투디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그 슬픈 사진은 우리의 가슴에 저마다 판문점보다 더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버린, 뜨거운 불화살이 되었다.
『색 & 계』는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암살 대상)을 사랑해버린 여자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참혹한 죽음 직전에 비로소 아주 잠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보인 세계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세계의 신비를 작가 장아이링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현재 전쟁 국면이 일본에게 점점 불리해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지기(知己)를 한 명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평생 영원토록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위로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해도 상관없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만큼 강렬했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냥 감정이 있었다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원시시대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였고, 매국노와 매국노를 위해 결국 앞잡이가 된 관계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서로를 점유한 관계였다.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그의 귀신이 되었다.
-장 아이링, 김은신 역, 『색 & 계』, 랜덤하우스, 2008, 67쪽.
이 선생에게는 이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함과 동시에 ‘죽은 그녀를 여전히 사랑해야 할’ 형벌 같은 운명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어쩌면 지독히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지음(知音)의 벗을 만났으므로. 이 세상 누구도 믿지 못했던 그가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적어도 죽기 전에 만났으므로.
무엇이 죽어버린 것인지 언제나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 이미 죽어간 것을 잊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 죽어 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의 칼날 같은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하는 사람. 그가 롤랑 바르트였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죽어버린 것들, 아니 죽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삶과 죽음의 경계도, 자아와 타자의 경계도, 영화와 관객의 거리도, 미디어와 인간의 거리도, 그저 넘을 수 없는 장벽만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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