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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 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 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건방진방랑자 2021. 7. 27.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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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질 들뢰즈

시간을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 탈주

 

 

1. 시간의 단위는 무엇일까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336.

 

 

쏜살같이 달리는 시간의 뒷덜미를 슬쩍 낚아채어, ‘헤이, 그만 좀 달리고 웬만하면 쉬어 가지 그래?’라고 속삭일 것 같은 소녀. 등교시간의 압박과 알람시계의 난리법석만 없다면,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눈길을 끄는 모든 장소마다 기꺼이 멈춰 요리조리 두리번거릴 것만 같은,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오지랖을 펄럭이는 명랑 소녀 마코토.

 

차라리 지각을 하는 게 낫겠다!’라는 친구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달콤한 늦잠을 자고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빛의 속도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대는 소녀. 시간을 달리는 소녀시간을 달린다라는 표현보다는 시간을 깜빡 잊고 띄엄띄엄 건너뛰는 소녀’, 걸핏하면 시간을 망각하기에 그 어떤 시간의 광풍에도 휘둘리지 않는 소녀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되는 즈음 마코토가 시간의 흐름에 짓눌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시간의 교환가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소녀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고 나서도 그 능력을 좀처럼 유용한곳에 쓰지 않는다. 약삭빠른 어른들이라면 주식투자나 로또 당첨이나 경매나 도박 같은 환금성 높은일에 타임 리프 능력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런 엄청난 초능력이 생긴다면 아마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타임 리프 능력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는 당신이 투명인간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설문조사와 비슷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 ‘한정된 시간한정된 육체야 말로 인간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명백한 한계이니까. 천하의 보들레르도 시간의 인식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황홀한 망상에 빠짐으로써 시, , 초로 환원되는 기계적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났던 보들레르. 그는 시간을 떠올리는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몽상에 물들어 향기와 빛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방이 악몽의 방으로 바뀌어버리는 환상을 체험한다. 기계적 시간, 진보적 시간, 직선적 시간이야말로 시인의 소중한 뮤즈를 앗아가는 폭군의 무기였던 것이다.

 

 

! 그렇군! 시간이 다시 나타났다. 시간은 이제 폭군으로 등장했다. 이 무서운 늙은이, 시간과 함께 추억, 회한, 공포, 고통, 악몽, 분노, 신경증 등 모든 시간의 악마적 행렬이 돌아온 것이다.

() 한 초 한 초가 시계추에서 솟아나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

() 그렇다! 시간이 지배한다. 시간이 그의 난폭한 독재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황소를 부리듯 그의 두 개의 바늘로 나를 채찍질하며 , 바보야 소리를 질러! 노예놈아, 땀을 흘려! 저주받은 자야, 살아라!’하고 나를 재촉한다.

-보들레르, 윤영애 역, 파리의 우울, 민음사, 1995, 38.

 

 

 

 

 

2.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

 

 

타임 리퍼(time leaper)와 투명인간은 주체의 책임을 삭제함으로써 무엇이든 마음대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떠올리게 한다. 타임 리프나 투명인간 되기는 신의 권능을 훔치는 일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쾌감들을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난 모범생도 아닌,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소녀인 마코토는 이 눈부신 초능력을 다소 엉뚱한 곳에 사용한다. 노래방 시간을 연장하거나 동생이 푸딩을 꿀꺽 집어삼키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같은, ‘정말 시답잖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일에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능력을 이토록 하찮은 일에 써먹는 소녀의 천진함이야말로 이 소녀에게 타임 리프라는 위대한 능력이 주어질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요소가 아닐까. 그녀는 이토록 사소한 일에서 무한한 희열을 느낄 줄 아는 무구(無垢)한 영혼을 지닌 소녀다. 그녀는 시간을 쥐락펴락하여 시간을 지배하고, 시간에 쫓기는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상천외한 능력을 엉뚱한 일에 사용함으로써 심각한 미션우스꽝스러운 놀이로 역전시킨다.

 

그녀에게 타임 리프는 시간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지배의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찰흙처럼 주무르고 구부려 저글링을 하는 듯한 놀이의 기술이다. 이 모든 좌충우돌 속에서 그녀는 디지털시계처럼 순서대로 어김없이 정확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권태의 시간사랑의 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기적의 연출자가 된다.

 

이제 치명적인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막아버린 소심남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지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언제나 좌충우돌 사고를 치는, 너무도 불안하지만 지극히 사랑스러운 한 소녀의 신개념 오디세이가 시작된다. 그녀는 바뀌어버린 시간의 의미 때문에 수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면 시간도 변할 수 있다는 기적을 요리하는, 경이로운 시간의 탈주자가 된다. 이 멋진 시간 여행의 동반자는 바로 질 들뢰즈이다.

 

 

음악의 최종 목적으로서, 탈영토화 된 리토르넬로를 생산하고 그것을 우주 안에 풀어놓는 것, 그것은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우주적 힘을 향해 배치를 개방하라. 하나의 배치에서 다른 배치로, 소리의 배치에서 음향화 하는 기계로. 음악가의 어린이-되기에서 어린이의 우주적으로-되기.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이진경 · 권혜원 외 역, 천의 고원2, 연구공간 수유+너머 자료실, 2000, 131.

 

 

 

 

 

3.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헛되이 보내버린 이 시간 안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7.

 

 

고층빌딩이 조각조각 찢어버려 토막 난 하늘에 익숙해진 관객의 눈은 문득 시간을 달리는 소녀속의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이 한없이 낯설다. 우리가 저토록 아름다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던가. 하늘뿐만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고등학교 교정으로 보이는 공간 구석구석이 문득 고풍스러운 유물처럼 신비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칠판에 적힌 글씨에 드리운 석양의 그림자조차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듯 느닷없는 애수를 자아낸다. 인물의 액션과 대사가 그려내는 눈부신 역동성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은 학원물특유의 명랑함이 아니라 애잔한 정적으로 가득하다. 이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은 분명한 현재를 마치 오래전부터 그리워해오던 머나먼 옛날처럼 노스탤지어의 시간으로 역전시킨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찰나의 순간이 0.1초만 지나도 아득한 과거로 사라질 듯한 조바심. 관객은 마코토와 치아키와 고스케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단 몇 개의 장면만으로 이미 교복을 입고 건들거리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관객이 마코토와 동년배라면 그녀와 실시간으로 겪고 있는 이 생생한 현재가 왠지 문득 그리울 것이다. 관객이 마코토보다 더 어리다면 그는 아직 겪어보지도 못한 미래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분명 아득한 과거가 아닌 동시대의 현재를 그려내지만, 그 선명한 현재를 아련한 과거처럼 못 견디게 그립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덜렁이 소녀 마코토가 머피의 법칙에 제대로 걸려든 어느 날, 713. 특별한 걱정이나 엄청난 고민 없이 그럭저럭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던 마코토에게 정말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날이 찾아온다. 아침부터 그토록 자전거 페달을 밟았는데도 지각을 했으며, 아무런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보질 않나, 가정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해서 불을 낼 뻔하질 않나, 모르는 남자아이와 호되게 부딪쳐 우당탕탕 넘어지질 않나……. 그런데 바로 이날 마코토는 과학실에서 갑자기 넘어져 호두처럼 생긴 신기한 물체를 만나게 된다. 이 호두껍데기가 마코토의 뒤통수 아래서 깨지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같은 날 마코토는 칠판 위에 마치 계시처럼 박혀 있는 문장을 보게 된다. Time waits for no one. 이 문장을 바라보는 말괄량이 소녀 마코토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마코토는 친구 유리와 대화를 하며 문과에 갈지 이과에 갈지 고민한다. 아직 자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데 문과와 이과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바로 그 순간. 그토록 어린 나이에 운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엄청난 결단을 내려야 했던, 그 당혹스런 시간 속으로 우리는 함께 빨려 들어간다. 우리의 뒤꽁무니를 맹렬히 추적하는 시간을 뒤로한 채, 우리는 어느새 이곳까지 흘러 왔다.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망설이고 주저하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으니까.

 

 

 

 

 

4. 어제의 나는 과연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일까

 

 

하루 종일 좌충우돌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이제 집으로 가려는 마코토에게 또 한 번의 끔찍한 머피의 유령이 도사리고 있다. 기찻길까지 내려오는 급경사 길에서 신나게 질주하던 중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이다. 이 순간이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 마코토의 몸은 하늘 높이 떠올라 정지된다. 죽기 직전의 마코토는 생각한다. “오늘이 만약, 오늘이 만약 평소와 다름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잊고 있었어. 오늘은 최악의 날이란 걸. 설마 했는데 죽는구나.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일어날걸. 늦잠을 안 잤으면 지각도 안 했을 테고 튀김도 더 잘 튀겼을 거고 어리바리한 남자애한테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상하다. 난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벌써 유체이탈에 성공한 것일까.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 아줌마와 꼬마는 아까 사고 나기 직전에 봤던 그 사람들인데. 왜 나는 몇 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일까. 꿈일까. 현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고민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아줌마의 엄청난 핀잔이 날아온다. “! 눈을 어디다 달고 다녀! 사과해. 사과하란 말이야!” 마코토는 이모에게 달려가 이 모든 괴상한 정황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며 흥분한다.

 

 

 

 

이모는 태연히 웃으며 마치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설명한다. “마코토, 그건 타임 리프야.” “타임 리프?” “전철에 치일 뻔했다며? 자전거 채 날아가서? 그런데 정신이 들고 보니 사고 나기 직전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게 타임 리프야. 시간이란 건 불가역이거든. 시간은 돌아오지 않잖아. 그러니까 돌아온 건 마코토 너 자신이야. 네가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로 되돌아온 거야.” 마코토는 마치 이미 겪어본 일을 이야기하듯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이모의 반응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모는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인다. “그렇게 특이한 건 아냐. 네 또래 여자애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니까.”

 

마코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이모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한다. “타임 리프는 나한테도 있었는걸?”(알고 보면 마코토의 이모는 원작소설에서 타임 리프를 경험했던 바로 그 소녀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는 늦잠을 자잖아. 그냥 누워만 있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그러다 정신이 들면 날이 이미 저물었어. 화들짝 놀라지. 내 소중한 일요일은 어디로 간 거지?” 이모는 타임 리프를 마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인 것처럼 세련되게 얼버무린다.

 

 

 

 

소녀는 이모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며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어제의 나는 정말 오늘의 나인가. 아까 죽을 뻔했던, 아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 자신과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나는 과연 같은 존재인가. 과거가 지나면 현재가 되고 현재가 지나면 미래가 되는 것이 시간의 규칙이 아니었던가. 천만다행으로 죽기 전의 나로 돌아왔지만 아까와 다른 또 다른 시간에 도착한 나는 과연 과거에 있는 걸까, 미래에 있는 걸까. 내가 한 것이 정말 타임 리프가 맞는다면 태어나서 가장 운 나쁜 날이 될 뻔했던 날이 불과 몇 초 사이에 태어나서 가장 신기하고 흥미로운 날로 변한 셈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존재는 과거현재미래를 향해 순차적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비논리적으로 공존하는 알 수 없는 시간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그저 쏜살같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드라이아이스처럼 고체에서 액체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로 승화해버린 듯한 느낌. 그것이 우리가 초능력 없이도 겪는 타임 리프 아닐까. 내 소중한 10대는 어디 간 걸까. 왜 나에겐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이 없는 것일까. , 왜 나는 연애의 추억도 없이 이별만 해댄 걸까. 이 모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덧없는 상실의 감정,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박하지만 때늦은 그리움. 이것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초능력 없이도 가능한 영혼의 타임 리프 아닐까.

 

 

오후만 있던 일요일 눈을 뜨고 하늘을 보니

짙은 회색 구름이 나를 부르고 있네

생각 없이 걷던 길 옆에 아이들이 놀고 있었고

나를 바라보던 하얀 강아지 이유 없이 달아났네

나는 노란 풍선처럼 달아나고 싶었고

나는 작은 새처럼 날아가고 싶었네

작은 빗방울들이 아이들의 흥을 깨고

모이 쪼던 비둘기들 날아가 버렸네

달아났던 강아지 끙끙대며 집을 찾고

스며들던 어둠이 내 앞에 다가왔네

나는 어둠속으로 들어가 한없이 걸었고

나는 빗속으로 들어가 마냥 걷고 있었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포근한 밤이 왔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예쁜 비가 왔네

-‘어떤 날의 노래, 오후만 있던 일요일

 

 

 

 

 

5. ‘내 시간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일까

 

 

타임 리프 능력을 갖게 된 마코토처럼 시간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시간을 매일 반복하게 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있다. 바로 사랑의 블랙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국가대표 에고이스트인 TV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빌 머래이). 그는 매년 22일에 개최되는 성촉절(Groundhog Day) 취재를 위해 펜실베니아의 펑추니아 마을을 방문한다. 성촉절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22일에 마못(북미산 다람쥐)이 자기 그림자를 보면 겨울이 6주나 길어진단다. 함께 일하는 PD인 리타(앤디 맥도웰)의 눈에 비친 필은 출세와 성공에만 눈이 먼데다가 공격적인 시니컬함으로 무장하여 타인에게 상습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한마디로 비호감이다. 필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실현하는 데 방해되는 것은 모두 야멸치게 끊어낸다. 늘 그렇듯 형식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촬영을 마치고 곧바로 떠나려 했던 필은 폭설로 길이 막혀 펑추니아로 되돌아온다.

 

 

 

 

성촉절 촬영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낡은 호텔에서 눈을 뜬 필은 어제와 똑같은 라디오 멘트를 듣게 되고, 분명히 성촉절 취재를 마쳤건만 마치 오늘이 축제인 양 부산하게 술렁이는 마을의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그날부터 22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몽이 시작된다. 자신에게만 시간이 반복되는 마법에 걸린 필. 전설처럼, 마못이 자기 그림자를 본 탓일까. 필은 건강진단을 받아보기도 하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보지만 자신의 증상을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어떻게 해도 반복되는 오늘을 바꿀 수 없음을 알게 된 필은 결심한다. “내일이 없다면 어떨까? 내일이 없다면 인과응보가 없어지겠지. 그럼 책임을 안 져도 되니까 아무 짓이나 해도 되겠군! 그렇군, 원하는 건 무엇이나 해도 되는 거야.”

 

성격대로 가장 나쁜 상상만 골라 하는 필. 그는 못된 투명 인간처럼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도 좋다는 편의주의적 사고에 몸을 맡긴다. 자신에게만 왜 시간이 반복되는지에 대해 어떤 성찰도 시도하지 않는 필. 그는 닥치는 대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말갛게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체중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껏 폭식을 하는가 하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청혼을 하기도 하고, 다음 날을 걱정하지 않으며 초등학교 여자 동창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악한 투명인간 놀이에도 금방 지쳐버린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했던 나날을 떠올리며 왜 그런 날이 반복되지 않고 하필이면 자신이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이 반복되는가를 자문한다.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 시간을 건너뛰는 기상천외한 노하우를 습득하게 된 마코토도 처음에는 변화된 시간 개념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은 채 시간 여행의 이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마코토는 야호, 타임 리프 짱이야.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승리감에 도취된다.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다가온 시간 여행의 행운은 동생에게 빼앗긴 푸딩을 되찾는 것이었다. 아니, 동생이 냉장고 안의 푸딩을 꺼내먹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운 나빴던 하루를 삭제하고 편집하고 윤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며 좋아한다.

 

 

 

 

 

6.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

 

 

다시 시작된 713. 마코토는 그토록 좋아라 하던 늦잠도 팽개치고 일찍 일어나 부리나케 학교에 나가며 가족과 친구들을 놀래게 만들고, 가정 시간에 했던 실수도 다른 남학생에게 떠넘기고, 쪽지 시험도 무진장 잘 보며, 평소처럼 야구를 하지 않고 노래방에 가서 절친 치아키와 고스케에게 10시간도 넘는 노래방 런닝타임을 선사해준다. 온 힘을 다해 전력 질주하거나 온몸을 던져 곳곳에 충돌하는 행위를 통해 그녀는 타임 리프의 노하우를 체득하게 된다. 타임 리프 능력으로 그녀가 고안해낸 가장 즐거운 일들은 이렇게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바꿔치기하는, 거창한 시 간여행이 아닌 자잘한 시간의 소꿉놀이다.

 

 

 

 

이모를 만나 타임 리프의 이점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마코토의 표정은 도저히 어제, 아니 오늘 죽을 뻔한 사람이 겪었을 법한 천신만고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우에노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모에게 케이크를 선물하자 이모는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며 미소 짓는다. “용돈을 다 써도 다시 용돈 받는 날로 돌아가면 되는걸! 그럼 용돈이 다시 원래대로란 말씀! 이젠 시간을 왔다 갔다 내 맘대로! 마음 놓고 늦잠 잘 수 있고 물건을 잃어버려도 찾으러 갈 필요 없고 뷔페도 90분 이상 먹을 수 있어! 맞아, 드라마 놓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내가 녹화해 둘게.” 이모는 귀여운 조카에 대한 애정과 철없는 조카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서린 복잡한 얼굴로 말한다. “다행이네. 별 거 아닌 일에만 타임 리프 능력을 쓰는 듯해서.” 타임 리프 놀이 때문에 매일매일 너무 즐거워서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는 마코토를 보며 이모는 질문한다. “네가 이득을 본 만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천방지축 마코토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는다. “? 그럴까? 글쎄? 에이, 설마 없겠지. 있어도 상관없어.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얼마든 되돌릴 수 있으니!”

 

 

 

 

마코토는 아, 혹시 내 시간이니까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정말 내 시간이란 있는 걸까.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시간을 연출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지만 조작하면 조작할수록 그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내 시간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타인의 시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 11초도 완전히 나에게만 귀속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마코토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짱 신나는타임 리프를 통해 깨닫게 된다. 타자의 시간이 없다면 자아의 시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시간을 감각하는 것은 시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들과의 얽힘, 그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사건을 통해서라는 것을. 그리하여 시간의 단위는 시, , 초가 아니라 너와 나의 우정이 탄생하는 사건, 그와 그녀의 사랑이 발효되고 숙성되는 사건, 당신들과 우리들의 인연이 얽혀드는 그 모든 사건을 통해 정의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도 그녀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한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시계로는 똑같이 측정되는 시간을 반복하면서 감각으로는 전혀 다른 시간을 감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녀가 시간을 위한 불굴의 뜀박질을 계속할수록 시간은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의에서 멀어지고, 그녀는 매번 달라지는 시간의 변덕스런 얼굴을 낱낱이 관찰하게 된다. 그녀는 시간을 놀이터혹은 장난감으로만 생각했던 자신의 발상이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시간은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호가 아닐까. 알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은 어떤 해석의 현미경을, 어떤 창조의 손길을, 어떤 실천의 몸짓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그러나 마주친 것, 즉 사유의 재료의 필연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분명히 기호와의 그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사유활동은 단지 자연스러운 가능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유활동은 단 하나의 진정한 창조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생이다. 그런데 이 발생은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 처음의 혼미한 상태, 즉 단지 추상적일 뿐인 가능성들로부터 사유를 벗어나게 하는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유함이란 언제나 해석함이다. 다시 말해 한 기호를 설명하고 전개하고 해독하고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하고 해독하고 전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창조의 형식이다. (……) 우리는 강요당해서, 시간 안에서만 진실을 찾는다. 진실을 찾는 자는 애인의 얼굴에서 거짓의 기호를 알아채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 한 천재가 다른 천재를 부르듯 예술 작품이 그에게 창조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을 방출하는 한, 그는 독자이며 청자이다. (……) 언제나 창조는 사유활동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기호에서 출발한다. 예술작품이 기호들을 탄생시키는 만큼 도한 예술 작품은 기호에서 태어난다. 질투에 빠진 남자와 마찬가지로 창조자는 기호를 감시하는 신성한 해석자이며 진실은 그 기호에서 누설된다.

-질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45~146.

 

 

 

 

 

7. ‘현재라는 말뚝에 고정된 한계 내에서 진행되는 크로노스의 시간

 

 

시간은 스승이 없는 자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라비아 속담

 

 

고스케와 치아키와 마코토. 세 사람은 방과 후 매일 캐치볼을 하고 함께 집에 돌아가는, 그들만의 우정이 창조하는 시간의 리듬을 즐긴다. 마코토의 일과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의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교의 시간표로 분절되는 기계적 반복의 시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자유로운 유희적 시간, 가족과 함께 집에서 보내는 휴식과 몽상의 일상적 시간. 이 시간의 삼각형은 마코토의 삶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축이었다. ‘타임 리프의 능력을 이용해 시간의 퍼즐 놀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지금, 마코토는 하루하루가 날아갈 듯 행복하다. 그런데 아무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를 구사한다 할지라도, 아직 마코토의 시간 개념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기계적 시간, 유희적 시간, 일상적 시간으로 구성된 마코토식시간의 모자이크는 여전히 동일한 분류 체계 위에서 작동한다.

 

 

 

 

게다가 마코토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법을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과거에서 찾는다. 과거를 수정하고 윤색할 수 있다면 현재도 마음에 드는 방향을 향해 자유자재로 리모델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순차적 흐름을 전제로 한 타임 리프라는 점에서, 마코토는 여전히 직선적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유하는 셈이다. 이러한 시간관을 들뢰즈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철저히 현재를 중심으로 시간을 바라보는 태도로서 과거는 현재를 기준으로 앞선 시간일 뿐이며 미래 또한 현재를 기준으로 나중에 오는 시간에 불과하다. 현재에 종속된 시간의 리듬 속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의 상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시간의 변화는 오직 현재라는 말뚝에 고정된 한계 내에서 진행된다.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보면, 오로지 현재만이 시간 속에 실존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시간의 세 차원들인 것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며, 과거와 미래는 시간 안에서 현재에 상대적인 두 차원이다. (……) 과거와 미래를 흡수하는 보다 큰 현재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79.

 

 

현재라는 이름의 말뚝으로 고정된 시간 위에서 마코토는 스스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 타임 리프는 그녀에게 이 평화로운 시간을 더욱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매력 만점의 놀이기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안의 내밀한 평화는 언제든 외부의 사건으로 인해 깨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불안한 평화다. 고스케가 어떤 수줍은 소녀로부터 사랑 고백을 들은 날, 마코토는 처음으로 지금까지 누려온 평화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스케가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고 치아키가 마코토를 자신의 자전거 뒤에 태운 날, 마코토는 처음으로 현재의 삶을 향해 자신이 가진 애착을 깨닫는다. 그 애착은 아직은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너무 오래, 너무 강하게 지속된다면 집착이나 소유욕이 될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대한 애착의 강화는 아직 오지 않은, 미결정 상태의미래를 현재의 관점에서 현재와 동일한 모습으로 고착시키는 행위이기에.

 

고스케가 소녀의 고백을 거절하자, 치아키는 그 좋은 기회를 왜 놓쳤냐고 핀잔을 주고, 마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은 안심이 된다라고 말한다.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매일매일 셋이서캐치볼을 하는 현재의 일상이 깨질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고스케는 여자친구와 지내느라 우정의 삼각형에서 튕겨 나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평화로운 현재의 안정성이 깨지게 될 것이니까.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뻔한사건이 생기자, 마코토는 그제야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것들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상실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상실에 직면했을 때야 존재의 절실함을 깨닫게 되는 우리들. 그런데 고스케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 동시에 지금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한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치아키가 불현듯 마코토를 자전거에 태운 그 순간부터 이 사건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을까.

 

 

 

 

 

8. 돌아가는 시간과 돌아가지 않는 마음

 

 

마코토: 고스케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잘 챙겨주겠지?

치아키: 그럴 녀석이지.

마코토: 그럼 같이 야구 못하잖아.

치아키: 캐치볼을 야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않아?

마코토: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각해서 고스케한테 잔소리 듣고, 공 못 잡는다고 치아키한테 놀림 받고…….

치아키: 마코토…….

마코토: ?

치아키: 나랑……. 사귈래?

 

 

마코토는 생각지도 못한 치아키의 고백에 당황한다. 왠지 쭉 셋이서 같이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느낌, 고스케의 잔소리와 치아키의 핀잔 속에서 은근히 보호받는 듯한 그 행복한 느낌. 그것은 커플이라는 성숙한 관계,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와는 거리가 먼, 규정되지 않은 모호한 관계의 기쁨이었다. 마코토는 이 미묘한 우정의 감정을 언제까지나 즐기고 싶었는데, 치아키의 고백은 이 내밀한 평화를 깨뜨리는 직격탄이 되어버린다. 마코토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 앞에 어쩔 줄 모르다가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하여 타임 리프를 요긴하게 써먹기로 한다. 마코토는 치아키가 마음을 고백하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 어떻게든 치아키의 고백을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런데 타임 리프를 한 번 시도해서 우여곡절 끝에 치아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 했는데도, 몇 분이 지나자 치아키는 또 다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코토, 나랑 사귈래?”

 

 

 

 

마코토는 어떻게든 치아키의 고백을 무화시키기 위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천진한 잔머리를 굴려보지만 몇 번이나 그 힘겨운 타임 리프를 반복해도 치아키의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웃음이 멈추지 않는 즐거운 나날들이었는데, 고스케를 좋아한다는 소녀가 생기고 설상가상으로 치아키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마코토는 아직 완전한 여성도 완전한 어른도 아닌 아이와 어른의 사이에 있는 존재다. 친구들과 캐치볼을 할 때는 영락없는 선머슴 같고 혼자 샤워를 하며 비누거품놀이를 할 때는 영락없는 어린애 같다. 이미 여성의 몸으로 다 자란 그녀의 육체와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천진한 표정은 매혹적인 언밸런스 효과를 발휘한다.

 

그녀는 무언가 결정된삶을 아직 고민해보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런 고민 없이, 그저 한없이 유유자적하게, 언제까지나 캐치볼을 하면서 셋이서 소풍 나온 기분으로 살고 싶은데. , 이렇게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다니, 갑자기 치아키가 미워지는 마코토. 세상에, ‘타임 리프라는 마법의 지팡이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단 말인가. 마코토는 깨닫는다. 시계 속의 시간이 같다 해도, 똑같은 713일 오후 해질 무렵으로 돌아갈 수는 있어도, 치아키의 고백을 듣기 이전의 마음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치아키는 자신의 고백을 잊을 수 있어도 이미 미래에서 치아키의 고백을 들은 마코토는 그 고백의 이상한 설렘을, 알 수 없는 혼돈을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을. 내 영혼에 새겨진 그 고백의 흔적을 깔끔히 도려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불가능한 걸까.

 

 

물리학자 볼츠만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화살은 개별적인 세계들/()들 내에서만, 그리고 이 계들 내에서 규정되는 현재에 관련해서만 유효하다고 말한다. “우주 전체에 있어, 시간의 두 방향은 공간에서처럼 구분할 수 없다. 위도 아래도 없다” (, 높이도 깊이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대립을 다시 발견한다. 크로노스는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재이며, 현재들이 부분적인 세계들/계들 내에서 이어지는 한에서,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흐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자신의 두 인도된 차원들로 간주하는 시간이다. 아이온은 추상적인 순간의 무한한 분할 내에서의 과거-미래이며, 언제까지나 현재를 피해가면서 끊임없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분해한다.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158.

 

 

 

 

 

9. 크로노스의 시간과 아이온의 시간

 

 

신들은 시간을 구별하는 법을 처음 알아낸 사람을 저주한다.

또한 이곳에 해시계를 세운 사람도 저주한다.

나의 하루를 마구 깎고 쪼개어

작은 조각들로 만들었다고!

어렸을 때 나의 배는 나의 해시계였다.

어느 누구의 배보다 확실하고 올바르고 정확한 시계였다.

이 시계는 내게

밥 먹을 때를 말해줬다.

하지만 지금은 태양이 허락하지 않으면

,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시내에는 이런 저주스런 해시계들이 가득하다.

-기원전 3세기 후반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투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역, 시간의 발견, 휴머니스트, 2002, 145~146.

 

 

시간이 의식되는 순간,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내 몸이 느끼는 시간의 고유성이 파괴되는 경험을 했다. 인간은 시계를 발명하여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거꾸로 그 발명된 시간으로 인해 시간에 지배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시간표를 지켜야 하니까하고 싶은 일을 억지로 끝내야 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경험하는 셈이다.

 

 

 

 

아이온의 시간에서 고정된 현재란 존재할 수 없다.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줄 세우는 일도 불가능하다. 아이온의 시간은 상태(being)’가 아니라 과정(becoming)’, 고정된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건의 생성 속에서 꿈틀대는 존재의 운동을 가정한다. 시간이 고정된 현재로 얼어붙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열어놓는 시간. 그것이 아이온의 시간이다.

 

근대적 시간관은 개개인의 이질적이고 상이한 시간을 국가의 시간, 학교의 시간, 군대의 시간, 교회의 시간, 회사의 시간, 병원의 시간 등 무수한 집단의 시간으로 포획하려 한다. 그러나 이 크로노스적 시간에 자신의 신체를 완전히 길들이지 못하는 인간은 매 순간 집단의 시간과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생체 시간을, 심리적 시간을 느낀다. 우리는 권태를 느낄수록,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수록, 참을 수 없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느낀다. 직선적 시간의 중력으로 인간을 빨아들이려는 모든 권력, 그것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을 구성한다.

 

반대로 영원히 이 순간에 빠져들고 싶은 희열의 시간, 예를 들면 연인과 키스할 때, 우리는 이 순간이 곧 영원으로, 무한한 시간으로 확장되는 듯한 열락에 들뜬다. 굳이 무한을 가정할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충만한 시간. 지금이 몇 시인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망아(忘我)의 상태. 그럴 때 우리의 삶에는 아이온의 시간이 깃든다.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인생의 모든 필름이 한꺼번에 돌아가는 듯한 느낌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현재-미래를 가르는 인위적 관습적 경계가 사라지고,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불가해한 시간이 이제야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성좌(星座)’를 그릴 때. 우리는 아이온의 시간에 진입한다.

 

 

 

 

 

10. 중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거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아이온의 시간

 

 

무한일 필요가 없는 이 시간, 단지 무한히 분할될 수만있으면 되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그것은 바로 아이온이다. (……)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동일한 시간성의 세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가 완전하고 독자적인, 또 시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두 측면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한계 지어지는, 원인들로서의 물체들의 활동과 이들의 혼합 상태를 측정하는 현재(크로노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한계지어지지 않으며, 효과들로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을 표면에 모으는 과거와 미래(아이온)가 존재하는 것이다.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136.

 

 

타임 리프가 마코토의 삶에 던져준 메시지는 네 맘대로 시간을 요리해보라!’는 단순명료한 계시가 아니라, 시간 자체를 한없이 낯설게 만들어 시간 속의 나를 사유해보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마코토가 그토록 엄청난 타임 리프 능력을 저토록 사소한 곳에 써먹는 이유는 그녀의 천진무구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그만큼 시간에 대한 무개념상태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태어나서부터 정해진 인종, 국가, 성별 따위의 기계적 정체성처럼 시간또한 그녀 자신에게 당연하고도 선험적인 초기 조건으로 세팅되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마코토는 자신의 타임 리프로 인해 온통 똘똘 말리는주변 인물들의 상황을 바라보며 그제야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가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난생처음 시도하게 된다. 시간이 단지 조건이나 전제가 아닌 일종의 난해한 기호처럼 사유의 재료로서 마코토 앞에 내던져진 것이다.

 

 

심리적으로 중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간, 이런 시간들을 현상학적 시간, 또는 아이온(Aion)의 시간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간 안에서 시간 단위들의 선적인 연결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건의 의미들은 항상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느림이나 한가로움, 느긋함 등은 이제 낭비와 게으름, 무능력과 동일한 것으로 비난받고 있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은 이제 속도는 돈이다라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들의 발걸음과 손놀림, 눈의 움직임과 마음의 움직임을 미덕이 된 속도를 향해 몰아붙이고 있다. (……) 뭔가를 기다리며 하늘 가운데 멈추어 서 있는 매를 본 적이 있는가? (……) 날아보려 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것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보다 훨씬 힘든 내공을 요한다는 것을. 떨어지는 것은 속도가 없으며, 단지 중력에 끌려갈 뿐이다. 반면 이렇게 멈추어선 매의 느림은 중력을 이기고, 관성을 이기는 어떤 절대적인 속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 노동이나 이동, 소비, 생활 등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속도를 갖는 것, 속도의 중력에서 벗어난 외부를 창조하는 것, 강요된 속도나 시간에 벗어난 자율적인 속도와 리듬을 갖는 것, 그리하여 자율주의적인 삶의 리듬, 일의 리듬, 사유의 리듬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낡은 시간적 형식을 변형시키는 일이며, 자율주의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형식의 시간, 새로운 리듬의 시간을 창안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2002, 76~78.

 

 

 

 

 

11. 기억을 지배하는 인간 vs 인간을 지배하는 기억

 

 

호글런드는 아내를 간병하다가 잠시 침대를 떠나 휴식을 취했다. 침대로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서 오랫동안 어디에 가 있었느냐는 심한 불평을 들었다. 사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아주 짧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경과한 시간은 그보다 아내에게 더 길게, 그것도 실제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그러잖아도 생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호글런드는 화학적 시계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은 두뇌나 신체 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모종의 화학적 과정을 가리킨다. 물리화학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화학적 과정은 열을 받을 경우 속도가 증가하게 마련이므로 호글런드는 아내의 시계가 높은 체온에 의해 열을 받아 평소보다 훨씬 더 빨리 감으로써 그가 비운 시간을 아내가 실제보다 더 길게 생각했던 것이라고 추론했다.

-스튜어트 매크리디 엮음, 남경태 역, 시간의 발견, 휴머니스트, 2002, 259.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 중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앓고 있던 아내를 두고 별생각 없이 잠시휴식을 취한 후 돌아오니, 아내는 하염없는 기다림에 지쳐, 남편에게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렇듯 한 침대를 쓰는 부부에게도 시간은 완전히 다른 속도와 다른 뉘앙스로 흘러가고 있다. 아내의 높은 체온이라는 물리적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너무 몸이 아프고 힘들어 잠시도 남편과 떨어져 있기 싫었던 아내의 절박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빈방에서 홀로 끙끙 앓을 때처럼 더디고 고통스럽게 가는 시간이 있는가.

 

우리는 주관적 시간 · 객관적 시간, 심리적 시간 · 물리적 시간이 각각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살아 있는 몸과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시간은 늘 주관적이고 늘 심리적일 수밖에 없다. 마코토가 온몸을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몸 구석구석에 타박상을 입어가면서 깨달았던 시간도 바로 이런 시간, ‘우리 몸과 마음의 연금술이 빚어낸 시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마코토는 내 맘대로 리와인드하고 리플레이할 수 있는 시간 덕분에 쪽지 시험도 잘 보고, 가정 시간에 자리를 바꿔 망신살도 면하고(마코토가 피한 재난은 엉뚱한 남학생이 대신 뒤집어쓰게 되었다), 노래방 러닝타임도 늘이고,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도 새것으로 되찾았지만, ‘내가 바꿔버린 기억때문에 누군가가 상처 입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마코토는 사소한일에만 타임 리프를 활용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가정 시간에 자신의 실수를 떠넘긴 바로 그 어벙한남학생이 마코토에 대한 복수심으로 소화기를 들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마코토의 실수를 대신 뒤집어쓴 그 남학생은 (미리 일어날 사건을 예견하고) ‘자리를 바꿔달라라고 요구한 마코토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마코토, 너 왜 그때 나한테 튀김을 하라고 한 거야?” “아니, 그게……. 설마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마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될 줄 알았기 때문에그 남학생과 자리를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마코토는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잔뜩 주눅이 든다. 게다가 치아키가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치아키를 피해 다니다가 어느새 치아키와 소원해질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내 맘대로 맘껏 오려붙일 수 있는 기억에 대한 마코토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타임 리프의 최대 장점은 기억을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이었는데, 마코토는 완전한 나만의 기억현재로 고정할 수 있는 기억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간을 지배함으로써 기억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코토의 상큼한 계산은 들어맞지 않는다. 늘 마코토의 고민을 조용히 들어주던 이모는 웃으며 말한다. “일단 사귀고 나서 아니다 싶으면 사귀기 전으로 돌아가지? 너라면 할 수 있잖아.” 그런 일 절대 없을 거라며 얼굴을 붉히는 마코토. 이모는 아쉽다는 듯 치아키의 편을 들어준다. “그래? 없던 일로 해버렸구나. 치아키 너무 불쌍하다. 힘들게 고백했을 텐데. 하긴 본인은 눈치도 못 채고 있겠네.” 이모가 치아키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마코토는 치아키와 별로 안 친하다며 자기도 모르게 시치미를 뚝 뗀다. 치아키로 인해 생긴 미묘한 감정의 혼돈 때문에 치아키랑 그토록 매일 붙어 다니면서도 안 친하다고 둘러대는 마코토.

 

무슨 일이든 이모에게 다 털어놓고, 굳이 털어놓지 않아도 얼굴에 온통 감정이 낱낱이 필기되어 있는 투명 소녀 마코토에게, 이제 비밀이 생겼다. 내가 타임 리프를 했다고 해서 나에게 고백한 치아키의 진심까지도 사라져버린 걸까. 치아키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못했는데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이 기묘한 상실감은 뭘까. 도대체 타임 리프란 무엇일까.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노력은 헛수고일까. 시간을 되돌려도 내 기억이 축적되는 한 그렇게 남몰래 쌓인 기억은 내 영혼에 날카로운 흔적을 남긴다.

 

 

 

 

 

12.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나를 공격한다

 

 

저장하고 싶지 않았던 그 기억들은 애초의 내 의도와 달리 내 등 뒤에서 배회하며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고 있다. 타임 리프로 인해 나는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하여 내가 감독한 나만의 ‘UCC형 기억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되돌리고 싶었던 바로 그 과거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버린 나의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내 삶을 응시하고 있다. 내가 기억을 떠올리는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의 등 뒤에서, 내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를 공격하는것만 같다.

 

 

나는 (……)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 기억은 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에게 찾아온다. 여기서 주체는 바로 기억이다. 그리고 기억이 이와 같이 갑자기 도래하는 것에 대해 는 철저하게 무력하며 수동적이게 된다. 바꿔 말하면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 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게 된다.

-오카마리, 김병구 역, 기억 서사, 소명출판, 2004, 48~49.

 

 

치아키가 혹시나 고백을 할까 봐, 아니 이미 나의 기억속에서는 고백해버린 치아키를 피하느라, 치아키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대하는 마코토.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하게 되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동떨어져 고립된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시간적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갑자기 마코토스러운명랑함과 천진함이 사라지자 치아키는 마코토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들이 잠시 멀어진 틈을 타 마코토의 친구 유리는 치아키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

 

 

 

 

이상하다. 분명히 치아키와는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는데, 막상 치아키가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자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든다.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을 잃어버리고, 사귀지도 못한 채 이별하는, 시작조차 없이 끝나버리는 이상한 감정.

 

정말 치아키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몇 번이나 나에게 사귀자고, 진심이라고 고백하던 그 진지한 표정은 그럼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치아키의 고백을 한사코 듣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 다녔던 나 자신은 과연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마코토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상실감에 비틀거리고, 그렇게 비자발적으로자신의 삶에 난입하는 기억들의 난투극으로 인해 그토록 단순하던 그녀의 뇌 구조가 복잡하게 흐트러진다.

 

시간을 내 것으로만들려던 노력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에 소중하게 둥지를 틀어버린 바로 그 시간을 잃어버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와버렸다. 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 채 흘려버린, 아니 억지로 삭제해버린 그 시간은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나로 인해 시간을 도둑맞은 그 남학생의 상처받은 시간은 또 어떻게 되돌려야 할까.

 

 

잃어버린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 존재했던 것들의 소멸, 존재들의 변화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는 뜻밖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윌에게 익숙하지 않게 되어버린 그 사람들의 얼굴은 시간의 기호들과 시간의 영향을 순수한 상태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사람들의 얼굴 특성을 변질시키고 다른 특성들을 늘리거나 또 무르게 하고 부숴버린다. 시간은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우리 앞에 나타나기 위해 육체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육체들을 만나기만 하면 어디서든 그들을 붙잡아 그 위에 자신의 환등기를 비춘다.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3.

 

 

 

 

 

13. 비자발적 기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고통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체현하려고 태어났다.

-조 부스케(Joe Bousquet)

 

 

영혼의 타임 리프는 부분적으로가능하다. 우리는 매일매일 기억하고 싶은 것을 더 명료하게 인지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압하거나 삭제하면서 비공인 타임 리프를 하고 있다. 어떤 시간에 분명히 그곳에 있었는데 완전히 그 시간을 건너뛰어 버린 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AB가 함께 있었는데, A는 그 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B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B는 일종의 타임 리프를 한 셈이다. A에게는 분명히 일어났던 사건이 B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함께 했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옛사랑, 함께 나눈 우정의 순간을 깡그리 잊어버린 친구들, 자신이 분명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타인을 상처 입히는 그 수많은 순간.

 

 

 

 

문제는 타임 리프의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기억의 삭제나 리와인드, 리플레이가 아무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기억을 편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의도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억은 매 순간 우리의 의도를 뛰어넘는 곳에서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발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잊은 줄만 알고 있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당황하기도 하고, 그토록 기억이 나지 않던 무언가를 엉뚱한 계기로 갑자기 기억해내기도 한다. 우리 의식에 완전히 기입되지 않은 기억들은 무의식에 슬며시 기록되어 언젠가 도래할 비자발적 기억을 기다린다.

 

이 비자발적 기억이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지금까지 순차적으로 진행된 연대기적 시간의 믿음이 깨지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사건의 재해석이 가능해진다. 한때는 그토록 부끄러웠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 비자발적 기억이 꿈틀대는 무의식의 카오스에서 진행된다. 즉 영혼의 타임 리프는 우리 명료한 의식의 등 뒤에서, 즉 무의식의 그림자 위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신발과 할머니에 대한 추억의 경우를 이야기한다. (……) 그러나 이 추억은 우리에게 되찾는 시간의 풍족함을 주는 대신에 고통스러운 소멸을 느끼게 하고,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의 기호를 이룬다. 자기의 신발 쪽으로 몸을 굽혔다가 주인공은 무엇인가 성스러운 것을 느낀다. 그런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며, 비자발적인 기억이 죽은 자기 할머니에 대한 비통한 추억을 불러온다. (……) 할머니를 묻은 후 일 년 이상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할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할머니를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45.

 

 

프루스트는 감정달력시간의 달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상실에 직면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상실을 깨닫는 인간의 비자발적 기억이 가져다주는 치명적인 고통. 마코토 또한 치아키를 잃고 나서야 치아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빠진 스스로를 응시한다. 마코토는 유리와 데이트 중인 치아키로 인해 마음이 복잡해져 멍한 표정으로 기계적인 캐치볼을 하고, 도무지 어떤 일에도 집중을 하지 못한다. 마코토가 그토록 유지하고 싶었던 우정의 삼각형은 흔들리고 있다. 고스케는 치아키 없이 마코토와 둘이서 심드렁하게 캐치볼을 하며 불쑥 마코토의 허를 찌른다. “치아키, 너한테 차여서 유리랑 사귀는 거 아냐?” 고스케는 목격하지도 않은 사건을, 게다가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어버린 사라진 사건을 귀신같이 포착해낸다. 어쩌면 고스케의 무의식에도 마코토를 향한 치아키의 마음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사건화되지 않는 우리의 욕망이 너의 무의식, 나의 무의식 안에서 꿈틀거리며 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이모는 마코토의 외로움을 걱정해주는 고스케의 마음을 알아채고 이젠 고스케와 사귀지 그러냐고 너스레를 떤다. “마코토 넌 고스케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건 늘 고스케였잖아. 사귀지 그래?” 마코토는 어이없다는 듯 이모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이모는 빙그레 웃으며 마코토의 시간 놀이를 살짝 풍자한다. “어차피 아니다 싶으면 시간을 돌려버리면 되니까!” 마코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든다. “그런 짓은 절대 안 해.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거잖아.”

 

이모는 마코토에게 질문한다. “그런 나쁜 일은 못하겠니? 일이 잘 안 풀리면 과거를 되돌려버릴 생각으로 지금까지 신나게 놀았잖아.” 마코토는 허를 찔린 듯 깜짝 놀라 이모를 노려본다. “날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어? 이모는 마녀가 확실해. 우리 이모는 진짜 마녀야.” 이모는 깔깔 웃고 마코토는 상처 입은 듯 씩씩거리며 이모를 흘겨보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이제 타임 리프로 인해 매일매일 행복한철없는 마코토 또한 기억 속의 마코토로 사라져가고 있음을. 더 이상 마코토에게 타임 리프는 매력만점의 놀이기구가 아님을.

 

 

모든 사건은 나를 기다린다! (……) 도덕이란 결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게 아니라, 좋던 싫던 네게 도래하는 것을 네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시인 조 부스케는 가장 위대한 모럴리스트의 한 사람이다. 부스케는 끔찍한 부상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말하고 설명하려 한 것은, “이 사건, 나는 그것을 체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는 말하자면, 사건에 걸맞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었다.

-들뢰즈, 조 부스케의 달몰이에 대한 추천사

 

 

 

 

 

14.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인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나무를 낳은 목각상처럼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스, 고봉만 · 유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2005

 

 

마코토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불현듯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 이 그림……. 이모가 계속 복원하고 있던 거잖아.” 시간의 칼날로 여기 저기 긁히고 마모된 옛 그림을 복원하는 이모의 손길.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기약 없이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닮았다. 아직 형태와 명암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희미한 그림은 아스라이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처럼 애잔한 정조를 뿜어낸다. 이모는 소식이 끊인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으로 말한다.

 

한참 보고 있다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 작가도 모르고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은 몰라. 하지만 이 그림을 복원하면서 알아낸 게 하나 있어. 몇 백 년 전 큰 전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란 거.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천방지축 마코토의 표정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영문도 모르는 아련한 그리움에 물든 마코토의 골똘한 표정. 마코토는 전쟁의 포화와 시간의 침식을 견디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 그림을 보며 그녀 자신이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아직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시간의 그림자를 만나고 있다.

 

 

 

 

이윽고 마코토는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시간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시작한다. 타임 리프를 하기 전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의 속삭임을. 이모를 만난 다음 날 자원봉사부 학생들이라며 여자 후배들이 마코토를 불러세운다. “마코토 선배! 저희 자원봉사부인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요즘 고스케 선배랑 늘 같이 계시던데요?” 마코토는 당황한다. 고스케랑 친한 것이 이 친구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러고 보니 후배들의 무리 중에 유난히 한 소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선배님들 사귀는 거 맞죠? 사귀시죠? 사귀는 거 맞죠?” 마코토는 어리둥절하고, 한 소녀의 얼굴은 더더욱 붉게 물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부터 이 친구들은 나와 고스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15. 무한한 지성으로 시간을 움켜쥐려하다

 

 

수줍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소녀가 드디어 고스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마치 고스케의 마음의 문을 두드려도 되느냐는 허락(?)을 마코토에게 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가 중학생 때였어요. 저희 할머니가 계신 양로원에 쿠라노세 고등학교 자원봉사부가 왔었는데 할머니는 그 중 한 학생이 아주 맘에 드셔서 그 사람 얘기를 많이 해주셨죠. 참 착하고 멋진 남학생이라면서, 몇 번이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계속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에게서 듣다 보니……. 본 적도 없는 그 사람이 점점 좋아졌어요.” 마코토는 영문도 모른 채 어느새 이 이름 모를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져 감탄한다. “, 정말 예쁜 이야기네.” 여학생은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알았어요. 그 사람 이름이 츠다 고스케라는 걸.” “이야,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구나!”

 

 

 

 

고스케는 그 여학생의 수줍은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고, 혹시 마코토와 사귀는 거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 보니 고스케와 마코토가 매일 단둘이 있는 장면들이 목격되는데, 정말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는, 수다쟁이 소녀들의 속사포 같은 항의가 빗발친다. “분명히 고스케 선배는 마코토 선배랑 사귀는 거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하는 걸 봐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딱 부러지게 설명해 보세요.” 마코토는 마치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이 자신의 탓이라도 되는 듯이 무한한 사명감으로 불타는 표정이 된다. “, 잠깐 있어봐.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마코토는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비장한 각오로 타임 리프에 임한다. 이번에는 나만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한 소녀와 내 친구 고스케를 위한 것이니까, 좀더 멋진 타임 리프의 대의명분이라도 생긴 듯이. 마코토는 또 자신의 몸을 무작정 내던져 타임 리프를 시도한다. 그런데 우리의 마코토는 역시 그 어처구니없는 부주의함 때문에 시간에 대한 무개념을 스스로 폭로하고 만다. “고스케! 너 양로원에서 얘네 할머니를 많이 도와드렸다며? 짜식, 대단한걸!” 그녀가 기억하는 시간 속에는 존재하지만 타인이 기억하는 시간 속에서는 이미 삭제되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순식간에 길을 잃어버린다. 마코토에게 고백한 시간을 깡그리 말소 당한(!) 이 소녀는 충격으로 비틀거린다. “선배가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아세요?” “, 그게……. 볼링장에서 만났는데…….” “우리 할머니는 거동을 전혀 못하세요!”

 

마코토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또 한 번 타임 리프를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고스케에게 엉뚱한 실언을 해서 그들의 시간에 잘못 개입하는 화를 자초하고 만다. 몇 번이나 타임 리프를 헛되이 써버리고 고스케와 그 소녀 사이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어버린 마코토는 다시 한 번 타임 리프를 이용해 상황을 전면 수정하고자 마음먹는다. “, 진짜! 더 근본적인 부분부터 시작해야겠어.” 그녀는 더 깊게 몸을 던져, 더 위험한 타임 리프를 시도한다. , 그런데 이번엔 너무 많이 앞으로 돌아와버렸다. 다시 그 전날 아침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마코토는 이제 시간의 무분별한 유희를 넘어 시간의 윤리적 책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은 시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마코토가 돌아가려는 그 시간은 정말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바로 그 근원적인 시작일까. 마코토는 아직 시간이라는 상수와 주체라는 변수사이에 어떤 일관성 있는 계산 가능한 함수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마코토가 돌아가려고 하는 그 시간으로 정확히 타임 리프에 성공하면, 정말 배배꼬인 이 모든 욕망의 사슬을 가지런히 정돈할 수 있을까. 인간의 무한한 지성을 활용하면 정말 인간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시간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일까.

 

 

베르그송은 지성이 (마치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할 때 이미 영화의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미래를 현재 속에 말아 넣음으로써 시간과 자유를 부인했다고 비난했다. (……) 과학자들은 체험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렇게 측정된 시간의 간격을 비교하여 변화의 법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틀렸다. 자신의 생을 부채처럼 펼쳐서 한눈에 다 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오류인 것처럼.

실제 우리의 생은 시간에 있어서 매우 상이하게 펼쳐진다. 베르그송은 이를 창조적 진화도입부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만일 설탕물 한 잔을 준비하고 싶다면 어쨌거나 설탕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소한 사실의 중요성은 실로 엄청나다.” 내가 줄곧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은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간격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간격은 측정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이미 완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내가 살아내야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체험하는 시간은 나의 마음 졸임과 합치한다.” 그 기다림이야말로 체험된 시간의 본질을 이루고 나의 자유를 보장한다. 기다림이 없다면 미래는 기지(旣知)의 것처럼 펼쳐질 수 있고 우리는 결정론에 갇히고 만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지만, 인간의 경험은 시간 속에서 사건들이 불확정적으로 연쇄되어 가는 것이다.

-스티븐 컨, 박성관 역,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4, 257~258.

 

 

 

 

 

16. 뭐 아무렴 어때

 

 

사유는 (……) 나 이외의 타자가 되기 위해 행해지는 모든 작업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심문하는 방법이다.

-푸코, 폴 라비노우와의 인터뷰 중에서

 

 

타임 리프를 하기 전까지, 마코토에게 시간은 단지 지켜야 할 시간지키지 않아도 되는 시간으로 나뉘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시간(학교를 중심으로 구획되는 기계적 시간표)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그녀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자유 시간). 그녀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란 뭔가 독특한 외부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그녀의 시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마코토는 조금씩 깨닫는다. ‘나의 시간이란 무중력 상태의 물체처럼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심코 저지른 나의 행동이 시간의 흐름은 물론 타인의 인생까지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나의 시간은 너의 시간과 그 · 그녀의 시간, 그들의 시간과 끊임없이 덧붙여지고 이어져 우리들의 시간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패치워크를 만들어가고 있었음을.

 

유희의 시간에서 책임의 시간으로 이동한 마코토. 그녀가 저지른 시간(?)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녀는 좀더 근본적인 시작으로 돌아가는 타임 리프를 실현한다. 고스케와 카호(고스케를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그 두 사람이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도록상황을 조작하는 마코토. 고스케는 자신에게 부딪혀 넘어진 소녀를 일으켜주며 그녀와 첫 번째 스킨십(?)을 경험하고 그녀를 부축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수줍은 눈길이 오고 간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마코토는 신이 나서 중얼거린다. “마음이 다 뿌듯하네. 이 행복감을 뭐라 하면 좋을까.” 그때 마코토의 팔에 새겨진 숫자가 문득 눈에 띈다. 10으로 보이기도 하고 01로 보이기도 하는 이 숫자. 전에는 09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혹시 타임 리프가 가능한 횟수를 뜻하는 걸까.

 

 

 

 

자신과 부딪혀 발목을 삔 소녀를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고스케. 고스케는 마코토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소녀를 바래다주려 한다. 고스케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기억난 마코토. 그녀는 정신없이 달려가 고스케를 말리러 가지만 이미 자전거는 사라진 뒤다. “어떡하지? 시간을 되돌릴까? 하지만 아직 확실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잖아.” 마코토는 다급한 마음으로 달려가 기찻길 근처에서 고스케를 찾아 헤매지만 헛수고다. 미친 듯이 고스케를 찾던 중 치아키의 전화를 받은 마코토. “고스케는 집에 있다던데, 너 오늘 야구 안 할 거야?” 마코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치아키의 전화를 반가워한다. 그래, 고스케는 죽지 않은 거야.

 

치아키는 전화기 저편에서 묻는다. “마코토.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너 혹시……타임 리프 하는 거 아냐? …… 타임 리프 하지?” 마코토는 타임 리프라는 은밀한 단어가 그녀와 이모 이외의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치아키가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 이 방법밖에 없다. 마코토는 다시 한 번 타임 리프를 한다. 허를 찌르는 치아키의 질문을 듣기 직전의 순간으로. 마코토는 뭔가 중요한 질문을 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치아키의 입을 막으려고, 동생 이야기로 얼렁뚱땅 화제를 돌린다. 팔에 적힌 숫자는 ‘0’으로 바뀐다. 마코토는 그제야 깨닫는다. “역시 이 숫자는 남은 타임 리프 횟수였어. 시시콜콜한 일에 마지막 타임 리프를 날렸구나. , 아무렴 어때. 고스케도 무사하고.”

 

 

 

 

 

17.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다

 

 

그런데 그 순간. 고스케가 마코토의 자전거를 타고 소녀를 등 뒤에 태운 채 지나간다. 마코토가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죽을 뻔 했던, 아니 한 번 죽었던, 바로 그 기찻길 쪽으로. “마코토. 자전거 좀더 쓸게.” 마코토는 미친 듯이 달려가 고스케를 부르다가 내리막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고스케와 소녀는 그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마코토는 고스케를 향해 절규한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그 순간. 타임 리프를 암시하는 화면이 지나간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고스케를 향한 그 피투성이 외침을 무정한 시간이 들은 걸까. 믿을 수 없는 마법처럼, 시간이 정말 멈춰버렸다. 길 위에 북적이던 사람들,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 달리는 자동차, 창공을 가르던 새떼들, 그 모두가 멈추고 오직 마코토만이 움직인다. 정지된 세계의 화면 위로 치아키가 불현듯 나타난다. “마코토, 역시 너였구나.” “치아키……. 네가 어떻게 여길……. 고스케는?” “아직 집에 있겠지.” 치아키는 마코토의 고장 난 자전거를 보여준다. 마코토의 자전거를 가져옴으로써 고스케가 그 자전거를 아예 탈 수 없도록 만든 것이 바로 치아키라니. “지금 이거……. 네가 한 거야? 너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치아키는 마코토를 조용히 응시하며 말한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면 웃을 거야? (……) 내가 사는 시대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장치가 있어. 바로 이거야. 몸에다 충전해서 쓰면 돼. 나도 이걸로 이 시대로 온 거고. 그런데 멍청하게도 어딘가에 흘려버렸어. 초조했었지. 여기저기 헤매다 겨우 찾았어. 과학 실험실에서. 이미 누가 써버렸지만. 하지만 다행이야. 이걸 쓴 게 바보라서. 나쁜 일에 쓰일까 봐 한숨도 못 잤어.” 이제야 모든 것이 설명된다. 어느 날 갑자기 마모토에게 생긴 타임 리프 능력과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치아키는 정지된 시간 속에 얼어붙은 거대한 도시 속을 천천히 걸어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 쪽으로 걸어간다. 마코토는 치아키에게 그 먼 미래에서 왜 지금 여기로 날아왔냐고 질문한다. “꼭 보고 싶은 그림이 있었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디에 있어도, 어떤 위험한 일이 생겨도, 보고 싶던 그림이었어.” 치아키가 다가간 그림에는 보존을 위해 전시를 보류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모가 복원하고 있는 바로 그 그림이다. “내가 사는 시대에서는 이 그림이 사라져버렸거든. 이 시대 이전에는 어디 있었는지 모르고. 확실히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이 시대, 이 장소, 지금 이때뿐이었어.” “그냥 보기만 해도 돼?” “보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해. 평생 잊지 않을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젠 다 부질없지만.” 유리 저편에 그림이 걸려 있던 자리를 덧없이 만지작거리던 치아키의 손가락이 유리 위로 힘없이 미끄러진다.

 

 

 

 

? 네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내 시대로 못 돌아간다고. 고스케가 타려던 네 자전거를 빼오느라 나한테 충전돼 있던 타임 리프 횟수를 다 썼거든.” 마코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따지듯 묻는다. “왜 써버렸어! 꼭 쓸 일이 있었잖아!” 치아키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게 꼭 쓸 일이었어. 지금의 넌 모르겠지만 고스케랑 그 여자애. 한 번 그 건널목에서 죽었다고. 누군가가 자기 탓이라며 울고불고 난리인데…….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어버렸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치아키: 강물이 흐르는 걸 처음 봤어. 자전거도 처음 타 봤고. 하늘이 이렇게 넓은 줄 처음 알았어. 무엇보다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도 처음 봤어.

마코토: 저기, 치아키. 혹시 그 그림과 네 시대가 관련이 있는 거야? 가르쳐 줘.

치아키: 난 이 시대가 좋아. 야구도 있고.

마코토: , 야구가 없어? (……) 그 그림말이야. 곧 볼 수 있어. 지금 복원 중이거든. 같이 보러 오자. 고스케랑 셋이서. 이제 여름방학이잖아. 치아키, 치아키?

치아키: 미안, 무리야. , 내일부터 없을 거야

마코토: , 어째서?

치아키: 과거 사람에게 타임 리프의 존재를 들키면 안 되거든 난 그 규칙을 어겼어. 그러니까 이제 우린 만날 수 없어.

 

 

그토록 찾고 싶었던 나의 시간을 위해 시간의 주사위놀이를 살짝 했을 뿐인데, 되찾으려는 나의 시간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빼앗아버렸다. 그저 나의 즐거움을 위해 벌였던 시간놀이가 누군가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이 되어버리다니. 게다가 이제 치아키를 다시 볼 수 없다니. 치아키가 이별을 선언하는 그 순간.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시간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공포가,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시간의 세포가 파열되는 끔찍한 고통이, 나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 순간 치아키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마코토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가슴 설레고 행복했던 그 모든 시간들, 그 속엔 늘 치아키가 있었으며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그 시간, 그 고백의 시간을 스스로 삭제해버리려는 마코토의 타임 리프 소동은 뼈아픈 후회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마코토는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시간의 존재를 이제야 깨닫는다. 치아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기억은 마코토의 어리석은 현재를 내려치는 죽비가 되어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억들. 무의식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은 끝나는 순간에야 발견한 첫사랑이라는 별자리의 이름에 걸맞게 서글픈 성좌를 그리며 그녀의 기억을 완전히 다시 재구성한다. 치아키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소중한 추억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의 세포를 구성한다.

 

시간을 벌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철저히 시간을 잃어버린 마코토. 그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실은 바로 그 고백의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타임 리프를 통해 시간을 창조하던 마코토, 제멋대로 타인의 시간을 지휘하던 마코토는 정작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다. 이 순간만큼 긴 시간이 있을까.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바로 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 순간 너를 잃어버려야 하는 이 고통스런 순간만큼 기나긴 시간이 또 있을까.

 

 

비자발적인 기억이 주는 계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으며 잠드는 순간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이따금 체험하는 것과 비슷한 불안정에서 오는 현기증같은 타격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우리에게 순수과거,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과거를 건네준다. (……) 비자발적인 기억은 우리에게 영원성을 준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 영원성을 잠시라도 더 지탱할 힘도, 영원성의 본질을 발견할 방법도 갖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비자발적인 기억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오히려 영원의 순간적인 이미지이다.

-들뢰즈, 서동욱 · 이충민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102~103.

 

 

 

 

 

18. 지나간 시간은 사후적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유목민은 물론 움직이지만, 앉아 있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앉아 있다. (……) 유목민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그들은 무한한 참을성을 갖고 있다.

-들뢰즈· 가타리, 천의 고원2, 연구 공간 너머자료실, 2000, 165.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들뢰즈, 이정우 역, 의미의 논리, 한길사, 1999, 261.

 

 

왜 인간은 사건의 폭풍이 잦아들고 나서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후적 깨달음의 동물일까. 지나간 시간이, 과거의 기억이 소중하다감각은 기억이 생성된 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각된다. 특히 익숙하고 친밀한 관계일수록 대상의 상실은 더욱 오랜, ‘깨달음을 위한 발효 기간을 요구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정작 그 상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견디기 힘든, ‘이별이나 애도라고 이름붙이기도 어려운 감각의 총체적 혼돈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렇게 인간은 현재에 몰두할 때는 지금 이 시간 자체를 대상화할 수 없다. 현재의 상황 자체에 몰입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를 과거로 회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뒤늦은 깨달음은 인간의 우매함 때문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타임 리프로 인해 마코토가 깨달은 것은 시간의 조형 가능성이 아니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깨달음이 아닐까. 아무리 객관적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도, 과학의 힘이 그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하여 성공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은 물리적인 힘으로 되찾을 수 없다는 것. 몇 번이나 타임 리프를 한다 해도,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은, 나의 욕망이 너의 시간에 새긴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지나간 시간의 의미를 사후적으로 발견하고 뒤늦게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단지 인간의 한계라기보다는, ‘과거로 멀어져간 시간에 대한 인간의 오만을(‘나는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를 기록하고 과거를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 일깨우는 시간의 매혹적인 속성이 아닐까.

 

마코토는 타임 리프를 통해 713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이 한 번도 동일한 감각으로 체험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기억을 수정하고 삭제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입한 시간은 하나같이 그녀의 의도를 배반하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시간의 형상으로, 저마다 새로운 차이의 시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타임 리프로 인해 일어난 진짜 기적은 단지 기계적 시간의 이동가능성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아무런 자발적 사유도 하지 않던 한 소녀가 시간에 대해, 자체에 대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타임 리프로 인해 과거-현재-미래로 지속되는 선형적 시간의 상식이 깨져버리자 마코토는 엄청난 혼란을 느낀다. 그러나 그 시간의 비연속성은 시간 자체가 이미 지니고 있는 내재적 속성이다. 지금 마코토는 미래에서 온 마코토 자신에게 심문당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느낀다. 과거의 마코토와 현재의 마코토와 미래의 마코토가 한 공간 안에 존재함으로써 지금까지 믿어왔던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이 참혹하게 깨어지는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 화면 안에 공존하며 마코토의 고정된 정체성을 분열시킨다. 미래의 마코토가 현재의 마코토에게 과거의 마코토를 넘어서라고 충동질하고 있는 셈이다.

 

 

 

 

 

19. ‘의미 없던파편들이 의미를 안고 내 안에 깨어나다

 

 

한편, 치아키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스케의 마음도 편치 않다. “난 그렇다 쳐도, 너한테도 아무 말 없이 떠나다니. 널 좋아했으면서…….” “날 좋아한다고…… 치아키가 그렇게 말했어?” “딱 보면 알지. 몰랐냐? 하긴 넌 그런 데는 좀 둔하니까. 그래서 치아키가 더 말 못했는지도 몰라.” 치아키는 아직 고백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가 떠났지만, 마코토는 이미 고백을 받았으나 그 고백의 시간을 말소해버린 시간을 살고 있다. 그러나 마코토의 시간 속에서 이미 치아키는 고백을 했고, 그렇게 들었으나 듣지 않은 고백이 마코토를 뒤늦게 괴롭힌다. “나 정말 못된 애야. 치아키가 어렵사리 해준 얘기를,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어. 난 왜 더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까?”

 

치아키가 떠난 후 풀이 죽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코토에게, 이모는 말한다. 자기도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고. 어른이 되어 헤어졌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그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믿다가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고. 이모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원작 소설에서 타임 리프라는 기이한 능력을 갖는 것이 두려워 한사코 그 초능력을 거부하고 싶어 했던, 수줍고 겁 많은 바로 그 소녀였던 것이다. 아직도 그 미래의 소년을 기다리는 듯 처연한 눈빛을 지닌 이모는 마코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코토. 넌 나랑은 성격이 다르잖아. 친구가 늦게 오면, 네가 먼저 달려가 친구를 데려오는 게 너 아냐?”

 

 

 

 

마코토는 실연당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침대를 뒹굴다가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한다. ‘0’이어야 할 숫자가 ‘01’로 보인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그때 치아키가 고스케를 살리려고 시간을 다시 돌렸으니까, 치아키도 분명 타임 리프 회수가 남았을 거야. 이제 마코토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가벼운 유희가 아니라 온몸과 온 마음을 건 도약으로, 멋지게 해낸다.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한 이후의 타임 리프는 이전의 타임 리프와 전혀 다르다. 그녀는 치아키와 함께 걸어왔던 시간의 세포 하나하나를 올올이 만지는 느낌으로 타임 리프에 자신의 온몸을 던진다.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너로 인해 웃고 울던 모든 시간이, 지진처럼 해일처럼 격렬하게 내 몸을 향해 돌진한다.

 

 

 

 

내가 알지 못하던 그 시간의 의미 없는파편들이 이제 저마다 절실한 의미를 품어 안고 다시 내 안에서 깨어난다. 그녀는 이 생의 마지막 타임 리프로 인해 단지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라 치아키의 마음이 되어, 치아키의 눈이 되어, 자신들이 걸어온 시간을 다시 되짚는다. 그녀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만난 것은 잃어버린 타인이었다. 타인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 곧 그녀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었다.

 

 

 

 

 

20. 우리는 시간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마코토는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등장한, 호두처럼 생긴 타임 리프 기계를 과학실에서 찾아낸다. 미래로 다녀온 마코토에게 이 기계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녀는 타임 리프 장치를 잃어버려 노심초사하고 있을 치아키에게 달려간다. 시간을 되돌려 간신히 되찾은 치아키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마코토. 달리기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치아키를 향해 달리는 마코토의 표정은 더 이상 장난스럽지도, 철없지도, 어리지도 않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의 문턱을 넘은 사람의 강인한 아름다움이 마코토의 얼굴에서 배어나온다. 언제나 시간에 뒤처지던 그녀는 어느새 시간을 따라잡고, 시간이 더 이상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을 수 없도록, 시간의 중력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그녀만의 속도로 뛰어간다. 치아키를 미래로 보내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놓아주기 위해.

 

 

 

 

치아키: (마코토가 건네준 타임 리프 장치를 보며) 이걸 네가 어디서 찾았어? 아니 너! 이게 뭔지는 알아?

마코토: 알아.

치아키: 누가 가르쳐 줬는데?

마코토: 네가.

치아키: 난 그런 소리 한 적도 할 리도 없어.

마코토: 네가 모두 다 얘기해 줬어. 네가 살던 시대도, 이게 뭔지도.

치아키: 너 어디서 온 거야?

마코토: 미래에서.

치아키: 너도 타임 리프를 할 줄 알아?

마코토: 이젠, 못해.

(……)

치아키: 이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과거로 돌아온 거야?

마코토: .

치아키: 바보같이 내가 왜 얘기했을까?

마코토: 그 그림은 미래에 가서 봐. 이젠 없어지거나 타버리지 않을 테니까. 네가 온 미래까지 무사히 남아 있게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치아키: 그래, 부탁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

치아키: 마코토!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너 말이야……. (이제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된 마코토의 잔뜩 설렌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함부로 뛰다가 다치지는 마라. 넌 주의력이 부족하잖아. 먼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

마코토: (치아키의 고백을 기다리던 설렘이 사라져버리자, 잔뜩 실망한 얼굴로) 뭐야? 그게 마지막 인사야?

치아키: 바보, 다 널 걱정해서하는 말이야!

마코토: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치아키의 등을 밀어내며 억지로 치아키를 보내버리는 마코토.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솟구치는 흐느낌을 막을 수 없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우는 마코토를 향해, 치아키가 다시 돌아온다. 너무 놀라 눈물을 뚝 그친 마코토를 살짝 안고,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마코토의 심장을 향해, 치아키는 드디어 고백한다. 예전에 마코토가 삭제해버린그 고백보다 훨씬 멋진 대사로.)

치아키: 마코토……. 미래에서 기다릴게.

마코토: (치아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일순간에 모든 아픔이 치유된 듯, 언제 울었냐는 듯이, 이제야 마코토다운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 금방 갈게! 뛰어갈게!

 

 

 

 

의미 없이 기계적으로 흘러가던 시간이, 이 세상 단 한 번뿐인 사건의 시간이 되었다. 치아키가 살고 있는 미래가 몇 십 년 후인지 몇 백 년 후인지 모르지만, 도대체 치아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 그림을 어떻게 저 거대한 시간의 풍화작용으로부터 지켜낼지는 알 수 없지만. 마코토는 기다릴 것이다. 치아키를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막상 치아키를 만났을 때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라도, 그녀에게 이제 시간은 이미 다른 의미로 흐르기 시작했다. 미래에서 날아온 소년 치아키로 인해 그녀의 현재는 완전히 다른 빛깔과 냄새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녀 안에 둥지를 튼 치아키의 미래는 그녀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함께, 따로 또 같이, 살아갈 것이다. 미래 소년과 날카롭게 조우한 이모의 현재가 행방을 알 수 없는 그 옛날 그 소년의 미래와 모순 없이 공존하듯이.

 

그러므로 순수한 현재란 없다. 과거-현재-미래라는 편의상의 경계를 매번 무너뜨리며 미처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과거는 오늘을 살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은 현재의 우리 몸에서 체현된다. 때로는 예술의 이름으로, 때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비자발적인 기억은 나는 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연출하고 기록할 수 있는 주체다라는 인간의 착각 혹은 오만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기상천외한 타임 리프 능력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는 시간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 잃어버린 타인의 시간이 곧 잃어버린 나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한. 너와 나의 시간을 분리할 수 없는 그 끝없는 모호성 위에 우리의 인연이, 너와 나의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존재하는 한.

 

이로써 우리 앞에 겹겹이 닫혀 있었던 시간의 문이 열리고, 그렇게 살짝 벌어진 시간의 틈새로,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으로 분리되지 않는 뫼비우스적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미래 소년 치아키가 다녀간 이 도시에서 이제는 지각할까 봐 휙휙 지나가버린 그 모든 사소하고 당연한 장면들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의 반짝이는 순간으로 거듭나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만 끝내 되찾을 시간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제 시작될 마코토의 기다림은 마음에 드는 미래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책 없는 수동성이 아니다. 미래가 주저하느라 좀처럼 오지 않는다면 달려가 미래의 손을 꽉 붙들고 데려올, 그런 능동적인 기다림, 시간을 창조하는 기다림이다.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 마코토의 무구한 기다림으로 인해, 그들로 인해 되찾은 우리의 시간 또한 21세기의 새로운 마들렌의 시간으로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제 마코토는 시간보다 더 빨리, 시간보다 더 멀리, 시간보다 더 깊이 달려가는 그녀만의 리듬을 살아낼 것이다.

 

 

과거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소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은 우연에 달려 있다. (……) 우중충한 오늘 하루와 음산한 내일의 예측에 풀 죽은 나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외따로,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솟아나 나를 휩쓸었다.

(……) 마치 일본 사람이 재미있어 하는 놀이, 물을 가득 채운 도자기 사발에 작은 종잇조각을 담그면, 그때까지 구별할 수 없던 종잇조각이, 금세 퍼지고, 형태를 이루고, 물들고, 구분되어, 꿋꿋하고도 알아 볼 수 있는 꽃이, 집이, 사람이 되는 놀이를 보는 것처럼. 이제야 우리들의 꽃이란 꽃은 모조리, (……) 수련화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과 그들의 조촐하나 집들과 성당과 온 콩브레와 그 근방, 그러한 모든 것이 형태를 갖추고 뿌리를 내려, 마을과 정원과 더불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마르셀 프루스트, 김창석 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국일미디어, 6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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