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인류 역사에서 우연히 10세기 또는 20세기를 들어낸다 해도 우리가 인간 본성을 인식하는 감각적 방식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기에 탄생하는 것을 봤던, 그러나 더는 볼 수 없는 예술 작품들의 손실이리라.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작품에 의해서만 변화하고, 그 작품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작은 나무를 낳은 목각상처럼 작품들만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비 스트로스, 고봉만 · 유재화 옮김, 『보다 듣다 읽다』, 이매진, 2005
마코토는 이모가 일하고 있는 박물관에서 불현듯 눈길을 잡아당기는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아! 이 그림……. 이모가 계속 복원하고 있던 거잖아.” 시간의 칼날로 여기 저기 긁히고 마모된 옛 그림을 복원하는 이모의 손길.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잃어버린 시간을 기약 없이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을 닮았다. 아직 형태와 명암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희미한 그림은 아스라이 멀어지는 연인의 뒷모습처럼 애잔한 정조를 뿜어낸다. 이모는 소식이 끊인 애인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으로 말한다.
“한참 보고 있다 보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 작가도 모르고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은 몰라. 하지만 이 그림을 복원하면서 알아낸 게 하나 있어. 몇 백 년 전 큰 전쟁 속에서 그려진 그림이란 거.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천방지축 마코토의 표정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영문도 모르는 아련한 그리움에 물든 마코토의 골똘한 표정. 마코토는 전쟁의 포화와 시간의 침식을 견디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 그림을 보며 그녀 자신이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아직 찾을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시간의 그림자를 만나고 있다.
이윽고 마코토는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시간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타임 리프를 하기 전에는 잘 들리지 않았던,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의 속삭임을. 이모를 만난 다음 날 자원봉사부 학생들이라며 여자 후배들이 마코토를 불러세운다. “마코토 선배! 저희 자원봉사부인데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요즘 고스케 선배랑 늘 같이 계시던데요?” 마코토는 당황한다. 고스케랑 친한 것이 이 친구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그러고 보니 후배들의 무리 중에 유난히 한 소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선배님들 사귀는 거 맞죠? 사귀시죠? 사귀는 거 맞죠?” 마코토는 어리둥절하고, 한 소녀의 얼굴은 더더욱 붉게 물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언제부터 이 친구들은 나와 고스케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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