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바타의 신체가 거꾸로 인간의 영혼을 물들이다
에리봉: 돈키호테주의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레비스트로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박해받는 자들의 옹호자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돈키호테주의의 본질이 현재 너머에 있는 과거를 재발견하고자 하는 끈덕진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훗날 레비스트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혹 존재한다면, 난 그에게 이 열쇠를 제공하고 싶군요.
-디디에 에리봉 대담, 송태현 역,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50~151쪽.
문자 없는 부족들이 보기에 문명인의 가장 독특한 습관 중 하나는 ‘메모하는 습관’이라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종이 부족’이다. 혹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메모하여 쌓아두는 종이 부족. 문자 없는 부족을 처음 만났을 때 문명인들은 궁금했다. 그럼 당신들은 어떻게 중요한 기억을 정리하고 보관하는지 묻자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종이가 아니라 온몸에 쓴다고.
정형화된 문자가 아니라 체험의 느낌 자체를 온몸에 기록하니 종이도 펜도 필요 없다. 그들은 문자가 아니라 체험의 총체 자체를 온몸의 세포로 기억한다. 그들은 문자가 없어서 열등한 종족이 아니라 문자가 없기에 문자로부터 자유로운 종족이 아닐까.
기억을 축적하여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기억의 상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더욱더 진화된 메모의 기술을 발명한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기억할 것이 많아진 문명사회에서 현대인은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대체하는 ‘기억의 아바타’를 만들어 늘 턱없이 부족한 기억의 용량을 보충한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의 신체는 기억을 활용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닐까.
휴대폰이나 컴퓨터가 없을 때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꼭 연락해야 하는 곳의 전화번호 정도는 자연스럽게 외웠고, 스스로에게 중요한 대부분의 정보는 ‘몸 바깥의 기계’가 아니라 ‘마음속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명인과 명창의 기술을, 장인의 노하우를, ‘메모리칩’으로 전수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의 기예는 오직 그들의 몸 안에 있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길은 오직 ‘몸’과 ‘말’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뿐이다. 우리는 ‘기록의 기술’을 얻는 대신 ‘구전의 지혜’를, 몸으로 기억하는 아날로그적 정보처리기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순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가 날아가는 순간, 패닉 상태에 빠진다. 나보다 나를 더 잘 기억하는 영혼의 분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아바타』에 등장하는 과학자들과 엔지니어들, 군인들은 ‘문자 없는 부족’인 나비족의 정보처리능력을 불신한다. 언옵타늄이라는 위대한 광물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절대로 지구인과 협상하지 않으려는 나비족의 ‘어리석은’ 선택에 코웃음을 친다. 문자가 없기에 열등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대둥한 협상이 불가능하며, 그들에게서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며, 그런 야만인들은 얼마든지 학살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원시문명에서 ‘그들과 우리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과 우리의 같음’을 찾으려 했던 레비스트로스의 태도는 바로 진보를 자처하는 문명의 어둠,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잔혹성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끌었던 구조주의 혁명은 문명의 바다 속에서 문명의 바깥 공기를 탐지하는 거대한 사유의 잠망경이었던 셈이다.
아바타 프로그램은 원래 ‘나비족’의 신체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하여 원격 조종이 가능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영혼으로 아바타의 육체를 원격조종하여 나비족을 교란시키는 스파이로 만드는 것이 아바타 프로그램의 본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제이크가 ‘열등하고 야만적이다’라고 생각했던 나비족은 그의 상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지옥이라 믿었던 곳에서 천국을 발견했고, 자신의 적들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사랑과 우정을 배워나가고, 사육되고 조련되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교감하는 동물-친구까지 만나게 된다. 그는 이제 인간의 영혼으로 아바타의 육체를 원격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의 신체가 거꾸로 인간의 영혼을 물들이는 행복한 역설에 빠져드는 것이다.
신화의 사고에서 동물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며, 털가죽을 벗으면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 처녀들을 유혹해 결혼하거나 동물과 인간 사이에 아이를 만들거나 하는 것도 가능했다. 인간 역시 변신하여 동물로 변할 수가 있었습니다. 늑대인간에 관한 전설은 그런 신화적 사고에서 탄생한 것이지요. (……) 늑대인간이나 흡혈귀 드라큘라가 십자가를 싫어한 것은 십자가가 변신을 금하는 구속 원리를 의미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유럽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십자가가 상징하는 구속 원리에 의해 ‘이교’의 사고가 제압을 당해왔습니다. (……) ‘이교’의 예술이 트랜스를 지향하는데 비해, 그리스도교의 예술은 ‘구속’에서 창조의 원리를 발견하려고 하지요. 그 사이에는 깊은 도랑이 파여 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예술인류학』, 동아시아, 2009,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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