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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 10. ‘에고’와의 내전(內戰)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 10. ‘에고’와의 내전(內戰)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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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에고와의 내전(內戰)

 

 

에고이스트는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나 부드러움과 유사한 그 어떤 것도 체험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감정들을 전혀 모른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자기보호는 일체의 사랑스럽고 애틋하며 미적인 요소들을 결여한 차갑고 가혹한 정서적-의지적 태도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44~45.

 

 

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수많은 대상 중에 평등하게 자기를 포함시키는 건 어쩐지 은밀한 반칙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경쟁상대를 제치고 유독 출중한 자기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사랑해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사랑은 나에게 아무런 자기중심적즐거움을 약속해주지 않는 불안하고 낯설고 이질적인 타자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이끌리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지원과 이한규는 에고이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자신을 돌보는 일을 자주 까먹는 사람들이다. 송지원은 북한에 있는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막노동을 하면서도 진심으로 나는 이 일에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이한규는 이혼한 후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딸 윤지에게 양육비를 부쳐주느라 자기 몸에서 나는 지독한 홀아비 냄새도 모른 척한다. 송지원은 가족을 못 만난 지 6년이 넘었고 이한규의 가족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그들이 속한 조직은 그들을 버렸고 그들 주위엔 이제 살가운 친구도 선후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족만을 생각하고 조직조차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사연 많은 두 룸메이트들은 사실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타인들이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눈에서 서로의 가여운 분신을 본다. 우리는 처음에 전혀 다른 존재인 줄로만 알았다. 쫓아야 하고 쫓겨야 하는. 이해관계가 너무나 분명히 대립하는 선명한 적.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우리는 너무 닮았다. 너와 살을 부대끼며 같은 식탁과 같은 변기와 같은 현관을 쓰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너와 나는 조직이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가 어떤 조직에 있든 우리는 조직적으로 살 수 없는 인간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조직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못하면서 조직에서 배운 신념은 잊지 못하는 서글픈 족속들이다. 우리는 조직의 이해관계에 내 모든 개인적 삶을 끼워 맞출 수 없다는 점에서 유난히도 닮았다. 우리는 기계의 부속품이기엔 너무 제멋대로인 나사들이니까. 기계의 부속품으로 살기엔 인간적인 삶의 냄새를 너무 그리워하니까. 우리는 똑같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정체성의 껍질을 완전히 벗지 못한 지금, 아직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일 뿐이다.

 

 

내 앞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의식의 시야는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환경과 그가 자신 앞에서 보는 대상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 나는 그를 미학적으로 체험하고 완성해야만 한다. 미학적 활동의 첫 번째 단계는 나를 그 사람(타자) 안으로 투사(감정이입) 하여 그의 내부에서 그의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체험하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즉 나는 나 자신을 그의 위치에 놓아야 한다. 이를 테면 그와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 실제로 고통 받는 인간의 내면에서 체험되는 삶의 상황은 나를 자극하여 도움, 위안, 인식의 사유 등과 같은 윤리적 행동을 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나 자신을 그 안으로 투사하는 것 다음에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 즉 고통 받는 인간의 외부에 있는 나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한다. (……) 만약에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타자의 고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는 병리적인 현상이 발생할 것인데, 이는 타자의 고통에 감염되는 것에 불과하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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