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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 12.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의형제와 미하엘 바흐친[피사체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앵글을 찾아서] - 12.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

건방진방랑자 2021. 7. 2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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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

 

 

우리는 타인의 육체를 포옹하거나 덮어주면서 육체 안에 갇혀 있고 육체로 표현되는 그의 영혼을 포옹하거나 덮어주는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

 

흔들리는 눈빛 연기가 힘들었다. 겹겹이 싸인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 답답했다. 상황 상황마다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감정선을 정리하고 이런저런 욕심을 버리고 눈빛으로 많이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캐릭터가 밋밋해질까 걱정도 하고…… 눈으로만 감정을 전달하는 게 힘드니까 나중에는 감독님께 못하겠다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배우 강동원 인터뷰 중에서

 

 

두 사람은 함께 살면서도 서로의 앞모습보다는 옆모습이나 뒷모습에 익숙하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겹겹이 포장된 상대방의 내면을 읽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옆모습과 뒷모습은 앞모습만큼 의식적인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앞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옆모습과 뒷모습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감정을 간수하지 못하곤 한다. 송지원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뒷모습의 쓸쓸함은 고스란히 이한규의 망막에 맺히고, 이한규가 미처 통제하지 못한 옆모습의 무력감은 고스란히 송지원의 눈동자에 맺힌다.

 

 

이한규: (자조 섞인 표정으로 체념한 듯이) 남의 돈 가져다가 내 행복 찾는 게 자본주의야.

송지원: 사장님은 남의 마누라나 찾아주는 게 행복합니까? 사장님은 사람들이 돈으로만 보이세요?

 

 

 

 

남편에게 구타당하다가 간신히 탈출한 필리핀 여인을 둘러싼 두 사람의 논쟁이다. 온수영. 그녀의 한국이름이다. 온수영을 그녀의 법적인 남편이 아닌, 그녀가 너무도 그리워한 친동생에게 데려다준 후. 그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몸싸움까지 벌이고 한참동안 티격태격 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걸린 몸값을 포기한다. “기준아. 그냥 가자.” 이한규가 필리핀 여인을, 아니 이제는 한국인이 된 온수영을 놓아주는 순간, 송지원의 굳은 얼굴에서는 오랜만에 해맑은 미소가 번진다. 둘은 이제 이전보다 한결 편안하게 서로의 앞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제 두 사람은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며 미행하고 도청하는 사이지만, 서로의 안부를 가장 먼저 걱정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음을. 두 사람이 몸싸움을 하며 바닥을 뒹굴 수 있는 것 또한 따스하고 온화하게 친밀감을 표현할 수 없는 무뚝뚝한 남자들의 우정 표현법이 아닐까. 그들은 남편에게 구타당하다가 끝내 도망친 필리핀 여인의 모습에서, 힘겹지만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기 시작한 그녀의 모습에서, 그들이 오래전에 잊어버린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알아보는, 서로 닮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치명적인 흉터가 아니었을까.

 

 

 

 

 

다음날 아침, 난데없는 차례상이 조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송지원은 놀란다. “다행히 마트가 문을 열었네. 늦었지만 차례 지내려고.” 이한규는 송지원에게도 예를 차리도록 하고 부모님의 지방까지 대신 써준다. “지방 쓸 줄 몰라? 어머니 성씨가 어떻게 되나? 안동 김씨?” 멋진 붓글씨로 지방을 척척 써내려가는 이한규의 옆모습을 보며 송지원은 든든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낀다. 차례상 앞에서 절을 올리는 송지원의 서글픈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한규의 눈빛에서는 전에 없이 무섭도록 차분한 단호함이 스쳐간다.

 

그리고 마침내 송지원에게 고백하듯 뇌까린다. “요즘은 이북에서도 제사 지낸다지?” 송지원은 경악한다. ‘그림자가 건네주었던 주머니칼을 꺼내 이한규를 겨냥한다.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표정으로, 이한규는 말한다. “앉아라. 제사 지내는데 설마 잡아가기야 하겠냐?” 드디어 송지원의 굳게 닫은 에고의 빗장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노크로 열리는 순간이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왜 날 데리고 있었어? 왜 신고 안했어?”

 

 

나는 자신을 사랑하듯이 가까운 이를 사랑할 수 없으며, 더 정확하게는, 가까운 이를 사랑하듯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만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보통 행하는 모든 행위들의 총합을 그에게 전이시키는 것뿐이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 2007,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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