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인물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않는 지탱점
송지원: 그런데…… 부인은 왜 떠나신 거예요?
이한규: (원망도 미움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으로 담담하게) 내가 잘 못 해줘. 애 엄마는 영국인이랑 재혼했어. 알버트라고. 알버트가 애 이름을 영국식으로 지었다는데, 에이미래 에이미. 에이씨! 애 이름을 에이미가 뭐야, 에이미가!!
송지원: (이런 순간에도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이한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이한규: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딸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주고 싶어.
송지원: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자신의 딸을 생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목소리가 발화하는 순간들이 있다. 분명히 내가 한 말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싶은 낯 뜨거운 순간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홀로 얼굴이 붉어지는, 겸연쩍고 민망한 고백. 두 사람은 매일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자동차를 타고 같은 방을 쓰면서 점점 더 그런 일들이 잦아진다. ‘사무적인 분위기’에서라면 전혀 나눌 필요가 없는 사적이고 내밀한 대화의 흔적들이 조금씩 늘어간다. 서로를 향한 자잘한 감정의 주름들이 늘어갈수록 ‘참수리 7호(송지원의 닉네임)’의 보고서는 점점 짧아진다. 이한규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는 것일까.
추석이 되자 ‘인터내셔널 테스크포스’에도 달콤한 휴가가 찾아온다. 찾아갈 곳도 궁금한 곳도 없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전국 노래자랑’만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 송지원. 이 황금 같은 휴일에 만날 사람도 없냐, 여자친구도 없냐고 묻는 이한규에게 송지원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누굴 만나요? 서울엔 친구 없어요. 여자한텐 관심 없어요.” 무척이나 공사다망한 듯이 부랴부랴 옷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이한규의 뒷모습을 확인한 송지원은 재빨리 이한규를 미행하러 따라나선다. 잠시 긴장을 늦출 뻔 했으나,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창조해낸 ‘공적 임무’를 잊지 않은 것이다. 이한규가 아직 국정원의 일원이라 믿는 송지원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인 셈이다.
감독의 시선은 인물의 내면과 외면을 비추는 마음 속 카메라의 완급을 조절한다. 망원경의 시선으로 송지원을 비출 때 그는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유능한 ‘공작원’으로 보이지만, 돋보기의 시선으로 그의 차가운 얼굴을 확대해보면 고뇌와 절망과 신념이 교차하는 그의 우수 어린 표정이 드러난다. 현미경의 시선으로 그를 비추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변수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의 입장에서는 유능한 인재지만 누구에게도 아주 사소한 상처도 주기 싫어하는 세심한 성격 때문에 ‘그림자’처럼 냉혹한 킬러가 될 수 없다. 여기에 ‘이한규의 시선’이 더해진다. 이한규의 시선 또한 크게 세 가지로 분리된다. 남파 공작원 송지원을 바라보는 직업적 시선과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온 한 남자를 바라보는 인간적 시선. 그리고 자신과 동거하는 룸메이트를 바라보는,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없는 서로에게 이제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되어버린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제3의 시선.
이렇듯 한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토록 다양한 감성의 렌즈가 필요하지 않을까. 송지원이 스스로가 처한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면 아래는 여전히 자신인 채로 수면 밖을 바라보는 잠망경의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바흐친은 작가가 주인공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는 단지 주인공에게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있는 그대로’ 흠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에게 성격을 입히고 신념을 주입하고 대사를 녹음시키는 작가가 아니라, 어느새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된 주인공에 대한 무조건적인 흠모야말로 작가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위치가 아닐까.
무조건적인 흠모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불안과 그 현기증을 참아내면서 주인공의 있는 그대로의 전체를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작가는 단지 주인공에게 거리를 두거나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작가의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불완전한 전체로서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주인공의 외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불안한 지탱점’들을 찾아가는 과정. 작가는 그 과정에서 창조적 다중인격이 되어야 한다. 그 어떤 인물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형되는 과정 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작가-감독은 인물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고 인물과 완전히 거리를 두지도 않는 ‘자기만의 지탱점’을 매 순간 창조해야 한다. 바로 그 불안한 지탱점에서 아름다운 캐릭터가 탄생한다.
여기서 문제는 작가가 주인공에게 이론적으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님을 강조하자. 주인공의 외부에 있는 필수적인 지탱점을 발견하기 위해서 (……)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발견해야 할 것은 주인공의 전 세계관이 주인공의 존재론적이고 직관적이며 구체적인 전체 안에서 단순히 한 요소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가치의 중심을 강제로 부여받는 존재로서의 주인공에게서 아름다운 것으로 주어져 있는 존재로서의 주인공에게로 이동해야만 한다. 주인공의 말을 듣고 그에게 찬성하는 것 대신에 작가는 현재의 충일성 속에서 주인공의 모든 것을 보아야 하며, 그 자체의 그를 흠모해야만 한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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