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깨에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
이한규: (송지원이 미행하여 자신의 통화를 도청 중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영국에 있는 딸에게 전화한다.) 알버트가 피아노 가르쳐 줬어? 새 아빠 좋아? 아빠가 더 좋아?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 디카? 그건 그쪽에도 사도 되잖아. 아빠가 돈 더 보내줄 테니까 엄마한테 사달라고 그래. (명절이라 바쁜 일도 전혀 없으면서) 아빠 바빠서 그만 끊을게.
송지원: (이한규의 통화를 도청하던 중, 깊은 한숨을 내쉰다. 딱히 도청할 내용조차 없는 이한규의 신산한 삶이 안쓰럽다. 지독하게 고독한 저 중년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송지원의 가명 박기준을 향해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이한규가 보낸 문자메시지: 기준아. 저녁에 나 맛있는 거 좀 해줄래?
이한규의 가슴 시린 문자메시지가 도착하는 순간, 송지원의 가슴 속에서는 칼바람이 스쳐간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경계심을 내려놓는 순간.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6년 동안 남모르게 증오해왔던 옛 친구, 손태순이 나타났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아니었어도. 갑자기 이한규와 송지원 사이에 조심스레 흐르던 인간적 연민의 감정선이 뚝 끊기고 본래의 긴장감이 되살아난다. 이한규에게 생활비를 타쓰고 있는 손태순의 몰골은 말이 아니다. 초라한 행색에 심각한 알콜중독까지. 손태순을 미행한 송지원은 텅 빈 집에서 머그컵에 소주를 부어 먹는 손태순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겨우 이따위로 살라구 조국과 동무까지 팔아먹었네? 간나새끼, 너 때문에 변절자 취급 받고…….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라!” 손태순을 때려눕히고 부질없이 항변하는 송지원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술에 절어 저항할 힘도 없이 그저 맞고만 있는 태순을 주먹으로 때리는 지원. 그의 주먹에는 원망보다 무력한 절망이 서려 있다. 멱살을 잡힌 채 숨을 헐떡이던 손태순의 입술에서는 핏물과 함께 뜻밖의 절규가 비어져 나온다. “사, 살고 …… 살고 싶다.”
친구 태순에게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지원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하여 북에 있는 가족을 탈출시키기 위해 애쓴다. 그러던 중 또 다른 엄청난 사건이 터져버린다. 집에서 함께 뉴스를 보던 이한규와 송지원은 각기 다른 이유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북한이 급작스레 ‘핵실험’을 선언하여 국제사회가 들썩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간신히 화해 무드로 돌아섰던 남북관계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한다. 송지원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이한규 또한 당혹스럽다. 송지원을 이용해 그림자를 잡으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못한 이한규는 지원의 손목시계에 몰래 최첨단 GPS. 그들 사이에는 아직 건널 수 없는 존재의 장벽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어깨 위에 아직 무겁게 닻을 내리고 있는 ‘조직’의 안개를 제거하고 나면, 상처받은 개인만이 남는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마음속에 ‘당’과 ‘국정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가까워진 서로의 관계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름다운 필리핀 아내를 되찾아달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고객’ 앞에서 송지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는다. 아내를 구타했다는 말까지 자랑 삼아 떠들어대는 고객 앞에서 송지원은 ‘살아남기 위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심하다. 송지원은 우울한 얼굴로 이한규에게 묻는다. “저 사람 아내 우리가 찾아주면……. 또 때리겠지요?” 이한규의 얼굴에서도 송지원과 같은 빛깔의 우울함이 스쳐지나간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 속에서가 아니라 타자 속에서만 직관적으로 확신에 차서 체험된다. 나는 자신의 외적 세계와 전혀 동종적이지 않다. 왜냐 하면 내 안에는 항상 그 세계에 대립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어떤 것, 다시 말하면 그 안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나의 내적인 자기 활동성, 외부세계를 대상으로 직면하게 만드는 나의 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적인 나 자신의 자기활동성은 자연과 세계를 모두 능가한다. 나는 항상 세계에 대한 행위 속에서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체험하는 선을 따라가는 출구를 갖고 있다. 나는 마치 완전히 자연적으로 주어진 소여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구멍 같은 것을 항상 가지고 있다.
-미하엘 바흐친, 김희숙·박종소 옮김, 『말의 미학』, 길, 2007,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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