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신을 소중히 다루는 법
버림받음은 (……) 뿌리 뽑힌 잉여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 뿌리 뽑혔다는 것은 타자가 인정하고 보장하는 장소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자란 세상에 전혀 속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박미애 옮김,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06, 279쪽.
비즐러는 비로소 자신에게는 없지만 드라이만 부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지만, 자신의 말을 믿고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오직 자신에게로만 쏟아지는 친밀한 시선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렌트는 이 친밀한 시선이 미치는 공간, 즉 친밀권(intimate sphere)을 ‘사회적인 것’의 위력, 그 획일주의의 힘에 저항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재발견한다. ‘인간의 마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하는 사회의 힘, 인간의 내적 영역에 침입해오는 사회’에 대항하여, 자기가 ‘자기다움’ 발휘할 수 있는 공간. 존재와 외관이 분열되지 않은 투명한 공간, 그것이 바로 ‘친밀권’이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 부부를 감시하는 자신의 임무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크리스타에게 가장 소중한 무엇을 지켜줘야 한다고 느낀다. 본능적으로 크리스타의 예술 또한 드라이만과 그녀만이 나눌 수 있는 그 아름다운 시선 속에서 가능함을 깨달은 것일까. 그는 드디어 도청용 헤드폰을 벗고 거리로 나와 크리스타의 ‘진짜 육신’과 만나기로 한다. ‘오프라인’의 세계에서 바라본 그녀는 ‘온라인’의 세계에서 훔쳐본 그녀보다 훨씬 아름답고, 쓸쓸하고, 무참하다.
크리스타: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자신을 향해 낯선 남자 비즐러가 다가오자 크리스타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역력하다.) 귀찮게 하지 말아요.
비즐러: 질란드 부인.
크리스타: (자신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자 놀라며)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비즐러: 당신은 절 모르지만 전 당신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진짜니까요.
크리스타: (체념한 듯이) 배우는 진짜가 아니에요.
비즐러: 하지만 당신은 진짜예요. 당신을 무대에서 봤어요. 당신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죠. 지금 당신처럼요.
크리스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알아요?
비즐러: 난, 당신의 관객이에요.
크리스타: 이만 가봐야겠어요.
비즐러: 어디 가십니까?
크리스타: 옛날 동창을 만나러요.
비즐러: 그래요? 거짓말할 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군요.
크리스타: (비로소 비즐러에게 흥미가 생긴 표정으로) 그래요?
비즐러: 네.
크리스타: 제가 아직도 당신이 아는 크리스타-마리아 질란드일까요? 당신이라면 당신 목숨보다도 중요한 사람을 떠나겠어요? 예술을 위해 몸을 버리겠어요?
비즐러: 예술을 위해 몸을 버려요? 별로 좋은 거래는 아니군요. (진심을 가득 담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따스하게 응시한다) 당신은 최고의 배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크리스타: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우울의 커튼이 걷힌 듯하다)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요.
비즐러는 그날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을 본다. 크리스타가 비즐러와 헤어진 후, 비즐러의 눈앞에는 듣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보지 않아도 보이는 장면이 펼쳐진다. 크리스타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달려간 것이다. 비즐러가 가짜 크리스타를 만나기 위해 외출한 동안, 그 대신 드라이만의 집을 도청하던 동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들은 드라이만 부인이 동창을 만나러 가는 문제를 두고 싸웠고 그녀는 결국 만나러 갔다. 드라이만은 집에서 괴로워했다. 약 20분 후, 드라이만 부인이 돌아왔는데 드라이만 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둘은 사랑을 나눴다. 그녀는 다시는 드라이만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는 ‘이제야 영감을 되찾았어’라고 말했다. 곧 새 희곡을 만나게 되리라 사료된다. 왜 그녀는 갑자기 변했을까? 난 지금 그녀가 드라이만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비즐러는 흐뭇한 눈빛으로 동료의 보고서를 읽으며 짧게 코멘트를 덧붙인다. “훌륭한 보고서군.”
비즐러는 크리스타의 눈에 스쳐가는 두려움과 절망을 응시했다. 그가 그녀의 ‘관객’이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중의적으로 들린다. 그는 그녀의 연기를 감상하는 최고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연극 밖 그녀의 진짜 삶을 훔쳐보는 파파라치적 관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즐러는 이제 그 두 가지 역할을 넘어선 또 하나의 응시를 발견한다. 바로 크리스타의 눈에 스쳐가는 두려움과 절망을 응시하는 것, 그녀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사랑과 예술의 힘을 꿰뚫어 보는 것. 비즐러는 인간을 정보의 창고로만 생각해온 자신의 ‘무사유’를 깨닫는다.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 이후, 완전히 꺼진 줄로만 알았던 그의 인간적인 영혼의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고통을,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 깨어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사유’가 초래한 타인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비로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감시하는 대상의 삶은 과연 어떤 빛깔로 둘러싸여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저토록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버린 세상의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기 말이 타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응답받는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 회복되는 자존 또는 명예의 감정은, 타자로부터의 멸시나 부인의 시선, 혹은 일방적인 보호의 시선을 물리칠 수 있게 한다. 자기주장을 실행하고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장소에서는 긍정되고 있다는 감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이토 준이치, 윤대석/류수연/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이음, 2009,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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