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갈등의 파문이 이는 두 경우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동독인들은 일인당 평균 매년 2.3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자살률.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남편 드라이만의 눈을 피해 거물급 정치인 헴프 장관을 만나며 자신의 예술적 생명을 보호받는 크리스타. 드라이만은 아내의 불륜을 알면서도 눈감아준다. 그는 심약한 아내가 자신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는 함부로 아내를 단죄하지 않고 아내를 이해하려 한다. 그는 아내의 사랑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아내가 사라진다면 자신의 삶도 예술도 사랑도 끝나리라는 점을 알기에 더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아내가 또 다시 헴프 장관과 밀회를 가지기 위해 집을 나가려는 순간, 드라이만은 아내의 불안한 움직임을 눈치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붙잡고 싶다.
드라이만: 집에 혼자 있는 것도 싫고 아무것도 써지지 않아. 예르스카가 죽은 후로 더 이상 글을 못 쓰겠어. (잠시 머뭇거리며) 당신도 날 떠나 버릴까봐 두려워.
크리스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어린애처럼 왜 그래? 그래도 오늘밤엔 나가야 돼.
드라이만: (짐짓 모르는 척) 어디?
크리스타: 옛 동창이 오기로 했어.
드라이만: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게 사실이야?
크리스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무슨 소리야?
드라이만: (체념한 듯, 그러나 간절한 표정으로) 다 알아.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제발 가지 마. 당신은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 없어. 모든 게 날 위해서라는 거 알아. 당신의 연기생활을 위해서라는 것도. 날 믿어줘. 크리스타 마리아. 당신은 여전히 훌륭한 예술가야. 앞으로도 항상 그럴 거야, 난 알아. 관중들도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의 비위 따위 맞춰주지 않아도 돼. 가지 마……. 그 사람한테 가지 마.
크리스타의 눈빛은 남편의 절절한 고백을 듣고 심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자신의 두려움과 수치심조차 끌어안는, 남편의 더 큰 사랑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녀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자신이 헴프 장관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신의 연기생활도 남편의 작가 생활도 위협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마치 남편의 인내심을 실험하듯 그를 다그친다. “그래. 당신은 마음껏 글만 쓰면서 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아?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사람은 신념만으로 살 수는 없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도 예르스카처럼 되고 싶어? 난 싫어! 그러니까 가야 돼.”
예르스카의 자살 이후 두 사람에게는 건널 수 없는 마음의 장벽이 생겨버린 것 같다. 저 비참한 죽음이 우리의 말로(末路)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선택할 정도로 우리의 신념이 견고한지, 예술의 끈을 놓치고도 우리가 여전히 인간답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확실해져버렸다. 크리스타는 드라이만의 영혼 가장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까지 끌어내어 그를 압박하지만, 그는 그 두려움마저 그녀의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어. 내가 마음대로 당신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겠지. 하지만 부탁할게. 하지 마. 당신 자신을 소중히 여겨줘.” 크리스타는 이미 가장 소중한 사람 앞에서 철저히 무너진 자존심을 수습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린다.
한편 이 조용한 부부싸움마저 낱낱이 엿듣고 있는 비즐러의 마음속에서는 전에 없던 갈등의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으로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침투한 자동화된 국가의 명령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는 자동인형처럼 순종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입력된 명령 프로그램대로 행동해왔던 과거를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비즐러는 이제 진심으로 ‘자신의 머리’로 사유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고뇌하며 망설이고 머뭇거리기 시작한다. 이 주저함, 망설임, 머뭇거림이야말로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문턱이 아닐까.
아렌트는 발견한다. 전쟁, 학살, 감금, 절멸, 박해, 나치스가 행한 이 모든 절대적인 악의 근원에는 괴물성이나 마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악의 근원에는 (……) 지독한 평범함과 진부함, 나치라는 대타자의 언어와 법에 대한 고착에 다름 아닌 ‘파시스트적’ 스노비즘이 있었던 것이다. 악은 평범하다. 악은 악에 대한 의지나 열정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의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즉 아렌트가 ‘순전한 무사유’라 명명하게 되는, 그런 능력의 결여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9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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