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는(보이지 않는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되어 있다.
-한나 아렌트, 서유경 옮김, 『과거와 미래 사이』, 푸른숲, 2005, 11쪽.
우리 사회의 각종 갈등 처리비용이 무려 300조라고 한다. 공익광고는 이 무시무시한 갈등의 해결 방안이 서로를 향한 따뜻한 배려와 이해심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 모두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서로를 존중해주면 저 엄청난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갈등은 단지 따스한 휴머니즘의 악수로 망각될 수 있을까. 우리가 각종 공공기관에 ‘민원’을 호소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저희 부서 관할이 아닌데요’ 같은 회피의 낱말들이다. 그렇게 ‘모두의 책임’은 ‘아무의 책임’도 아니라면, 과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하는 일들을 ‘얼굴 없는 사무적 행위’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매순간 아직 보이지 않는 갈등의 전초전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모든 책임의 화살을 회피하면서.
비즐러는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면서, 처음에는 자신이 ‘한 짓’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드라이만에게서 체제를 위협하는 저항의 기미를 찾는 동안, 정작 무너지는 것은 크리스타의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즐러는 단지 ‘정보’를 채취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동경하던 타인의 ‘삶 자체’를 착취하는 결과를 낳는다. 비즐러는 타인의 삶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장 존재 가장 밑바닥에 숨어 있던 공포와 고독을 만나게 된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의 대리인일 뿐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누구를 위한 ‘공인된 범죄’ 행위인가.
드라이든과 크리스타를 향한 비즐러의 격정은 단순한 질투를 넘어 자신이 오랫동안 억압해온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콜걸과 사무적인 섹스를 나누지만 그런 건조한 관계는 그의 지독한 외로움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비즐러는 콜걸에게 “조금만 더 함께 있어줘”라고 부탁해보지만, 그녀는 다른 손님이 있다며 “나랑 함께 있으려면 한 시간 더 예약하세요”라는 무미건조한 거절의 신호만 남기고 떠난다. 기계적인 섹스를 넘어, 단지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벌거벗은 외로움을 알게 된 비즐러는 비로소 조금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자신이 놓여 있는 자리를, 자신을 그곳까지 밀어낸 세상의 중력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즐러가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소년을 만나는 장면은 그 첫걸음이다.
소년: 아저씨, 정말 국가안보부에서 일하세요?
비즐러: 국가안보부가 뭐하는 곳인지 아니?
소년: 네, 나쁜 놈들이에요, 우리 아빠를 잡아갔어요.
비즐러: 그래? 이름이……?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소년의 아버지 이름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그는 괜스레 아이가 안고 있는 공을 물끄러미 가리킨다.) 네 공 말이다, 네 공의 이름이 뭐니?
소년: 아저씨 이상해요, 왜 공에 이름을 붙여요?
그는 처음으로 ‘내 눈에 비친 타인의 삶’을 넘어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자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모든 행위들이 확연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소년과의 만남에서 그는 자신이 모든 것에 번호를 매겨 그것에 관한 정보를 목록화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 기계장치가 되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관객은 감시 기계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비즐러를 보며 질문하게 된다. 그는 아마도 ‘천인공노할 악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의도하지 않은 모든 악행 또한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인가. 그가 직접 통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는 지배의 권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가. 진정 아무도 통치하지 않는 통치는 가능한가. 관련 법률이 없고 범행의 증거가 없으면 처벌받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데 본질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경험에서 생기는 현실성이 박탈됨을 의미한다. 사적인 삶에서 박탈된 것은 타자의 존재이다. 타자의 시점에서 보면 사적인 삶을 사는 인간은 현상하지 않으며, 따라서 마치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된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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