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 사람의 힘
드라이만: (자살한 예르스카에 관한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내 원고 괜찮을 것 같지 않나?
친구 1: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어.
친구 2: 이런 글을 여기서는 펴낼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신이 우릴 버렸나봐.
친구 1: 서독의 잡지사에 보내보는 건 어떻겠나? 거기는 제한규정이 별로 없으니 말야.
드라이만은 드디어 ‘행동’을 감행한다. 모든 것을 걸고 예술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몸짓, 그것은 글쓰기였다. 이제 이 글쓰기의 ‘수신자’가 바뀐다. 국내의 삼엄한 검열장치를 통과하지 않고 직접 외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드라이만은 언론계 및 예술계에 있는 친구들과 상의 끝에 서독의 『미러』지에 자신의 글을 싣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필자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동독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타자기를 구해 사용하며, 그 ‘위험한 타자기’를 아내 크리스타도 모르게 거실과 서재 사이의 ‘문지방’에 감춰둔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드라이만의 글이 서독뿐 아니라 유럽 각지의 언론에 전파되고, 드라이만의 ‘익명의 글쓰기’는 동독의 자유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노와 연민을 자아내게 된다.
동서독의 관계가 긴장 국면입니다.
최근 『미러』지는 동독의 익명의 작가가 쓴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기사는 동독의 자살 상태를 조사한 것으로 가장 충격적인 것은 유명한 연출가 예르스카가 5년간의 연금 생활 끝에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르스카는 올해 3월 5일 자살했으며 1977년 이래로, 동독 정부는 자살자 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럽에서는 오직 헝가리만이 동독보다 자살자 수가 많다고 합니다.
-영화 『타인의 삶』 중에서.
드라이만의 원고는 부메랑이 되어 동독 내부로 다시 전파되고, 마침내 동독의 문화계 관리들은 이 ‘위험한 글쓰기’의 주인공으로 드라이만을 지목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더 이상 자신과 만나주지 않는 크리스타에 대한 사심을 끊어내지 못한 헴프 장관은 마치 복수라도 하듯 크리스타를 직접 수사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크리스타를 구속하고 심문해봐.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야. 뭐든 정보를 알아내면 그녀는 풀어주게. 어찌됐든, 그녀를 무대에서 보고 싶으니까.” 헴프 장관의 비열한 명령의 의미를 알아챈 비즐러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크리스타의 입에서 드라이만의 비밀을 밝혀내려 할 것이고, 아내의 입으로 남편의 삶을 붕괴시키는 잔인한 형벌을 크리스타에게 내리려 하는 것이다.
이제 비즐러에게는 적당히 윗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크리스타의 신원을 보호할 수 있는 미봉책을 넘어서는, 존재의 결단이 필요해진다. 어떻게 눈에 띄지 않게 크리스타를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어떻게 내 삶의 모든 안전을 버리고 한 사람, 아니 두 사람, 아니 그들에게 걸린 모든 예술가의 자유를 지켜줄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비즐러 한 사람의 손아귀에는 지금 동독 예술가들의 자유 전체가 걸려 있다. 이 한 사람의 결단으로 역사가 바뀔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단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명령의 결정권자가 아니라 명령의 수동적인 실행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역사의 행로를 결정하는 기로 위에 서 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힘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행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만 어느 순간 한 사람의 힘은 이토록 커질 수 있다. 비즐러는 지금 자신도 모르게 커져버린 스스로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역사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고, 역사의 살해자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는 것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내보이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며 인간 세계에 현상한다.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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