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 간서 & 후서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 간서 & 후서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11:09
728x90
반응형

 간서(間序)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표풍부종조 취우부종일 23

 

드센 광풍[飄風]은 한 아침을 마칠 수 없고, 거센 소나기[驟雨]는 한 나절을 끝낼 수 없다. 그러나 광풍 후에도 산들바람은 불게 마련이요, 소나기 후에도 보슬비는 내리게 마련이다. 하느적 거리는 미풍은 곰팡이를 쫓아내고, 흐느적 거리는 보슬비는 새 생명을 움트게 한다. 분명 표풍이었고 취우였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를 어떠한 역사적 효능으로 생각하질 않았다. 자신의 십자가의 결과론이나 그것이 가져올 혁명적 변화를 예측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아니다. 한 가닥의 소망이라도 그것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묵묵히 십자가에 오른 것이다.

 

나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의 언어는 나 개인의 언어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언어를 공유하는 착종(錯綜)된 언어공동체의 기나긴 축적으로 형성된 지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나는 나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이 보다 참된 삶을 갈망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제도 이전의 사태다. 제도적 개혁만이 우리시대의 진정한 개혁이라는 생각은 망상이다. 제도적 개혁 그 자체가 언어공동체적인 자각의 기반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러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나의 신념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나는 승리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승리를 승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리라는 사회적 결과에 대한 하등의 기준도 나의 내면에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자(莊子)의 말대로, 말은 뜻을 전달키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말은 결코 뜻을 다 전달할 수 없다. 말로써 말을 형량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황소궁둥이에는 쇠파리가 들끓는다. 그러나 그것은 황소의 생명력이다. 황소가 죽음이라면 그의 궁둥이에는 구더기만 드글거릴 것이다. 쇠파리들이 황소의 앞길을 막는다고 앵앵대는 것은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가끔 꼬리를 휘젓는 일은 있을지언정 쇠파리 때문에 앞길을 그르치는 법은 없다. 오늘도 황소는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갈 뿐이다.

 

이천년 삼월 십일일 밤

무정재에서

 

 

 

 

 후설(後說)

 

 

이로써 일단 나의 강의를 도경(道經)을 끝맺는 것으로써 마무리 지으려 한다. 시간이 되는대로 덕경(德經)(38장부터 81장까지)을 마저 다 쓰고 싶다는 말만 남겨두고 싶다. 의사로서의 내 임무와 연구에 다시 한번 몰두해보고 싶기 때문에 곧 공부방향의 회전이 불가피할 것 같다.

 

그러나 이 도경(道經)의 내용이 덕경(德經)의 내용을 충분히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경(道德經)전체의 논리와 느낌을 포착하는 데는 이미 집필된 세권의 책만으로도 충족할 것이다. EBS 56회 강의 내용이 노자에 관한 한 너무 불충분하여 마음에 걸렸는데, 3권의 내용으로 내 마음에 남은 거리낌을 말끔히 씻을 수 있어 여한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 무정재 내 책상머리에서 EBS 강의를 끝내는 셈이다.

 

철학은 지식의 나열이 아니다. 철학은 반드시 깨달음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철인들의 저작이 바로 그들의 삶에서 깨달은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그 깨달음을 내가 깨달아 다시 독자들의 깨달음으로 옮겨놓는 것을 나의 사명으로 삼았다.

 

언어란 본시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뜻이란 본시 삶의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논리가 아니고 느낌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책을 읽어서는 아니 되고 느껴야 한다. 나는 나의 깨달음과 느낌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희열을 EBS 강좌를 통하여 만끽했다. 그것은 책이라는 문자매체와 TV라는 영상매체의 몽따쥬가 이룩한 쾌거였다.

 

학문이란 정직해야 한다. 학문이란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 공유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일상언어로 명료하고 쉽게 풀이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학문의 장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쉽게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정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자신이 명료하게 알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우 고도의 학문적인 수련과정이 요구되는 것이다. 나의 글은 쉽게 쓰여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배면에 깔린 나의 엄청난 학문적 수고는 참으로 범인들이 함부로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침묵할 지어다! 내 삶의 고뇌를 어찌 다 말에 담으리오.

 

엊그제 동네 국악하는 제자들이 모이는 곳이 있어 그곳에 잠깐 들렀는데 벽에 우연히 시 한 수가 걸려 있었다. 그냥 무심코 읽어 내려가는데 내 눈에 참으로 뜨거운 눈물방울이 맺힌다. 어려서부터 가까이 뵈었던 함석헌선생의 시였다. 당신의 삶의 느낌을 그냥 적으신 것 같다. 당신의 삶의 고뇌가 이러했으려니 생각하니 내 마음의 큰 위로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새 역사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 한 사람만을 원할 뿐이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맡기며 마음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마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위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 두거라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 웃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찬성 보다도

아니,”하고 머리 흔들 그 흔한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천년 사월 육일

밤 여덟시 오십칠분

무정재에서 탈고

뜰 앞 목련 봉오리 터질 때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노자한비열전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고전 > 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용옥 - 노자와 21세기 목차  (0) 2021.05.19
노자와 21세기, 81장 -  (0) 2021.05.11
노자와 21세기, 80장 -  (0) 2021.05.11
노자와 21세기, 79장 -  (0) 2021.05.11
노자와 21세기, 78장 -  (0) 2021.05.1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