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뿐, 목적론적 존재가 아니다
왕필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왕필은 ‘불인(不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목적론적 이념이나 그 이념의 사슬 속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왕필의 불인(不仁)의 해석은 탁견(卓見)이다! 그것은 희랍인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세계를 에이도스(eidos, 형상)와 휠레(hyle, 질료)의 목적론적 인과사슬로 해석한 후, 그것이 기독교의 초월신관의 ‘그랜드 디자인’ 아이디어와 맞물려 중세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목적론적 신학체계를 대성(大成)시켰던 그 모든 위대한 서구전통의 전면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기 저 아름다운 백합꽃을 보라! 솔로몬의 찬란한 보석 옷보다도 더 아름다운 저 백합꽃을 보라! 그것이 과연 신의 디자인을 찬양키 위해 피어 있는가? 왕필은 말한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그것은, 우리의 손가락이 다섯 개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마치 다섯 손가락 모양의 장갑을 끼기 위하여 그렇게 생겨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개그맨의 우스꽝소리 이상의, 논리적 오류의 자격조차 없는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땅이 짐승 먹으라고 풀을 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짐승이 풀을 먹는다는 사실 때문에 풀의 존재가 짐승을 위하여 있다고 하는, 그 ‘위하여(telos)’의 목적론적 사유야말로 인간이 자연에 부여하는 최대의 오류요, 모든 종교가 인간을 기만하는 함정이라는 것이다. 이 함정에 한번 걸려 들기만 하면 우리 인간은 영원히 신이라는 존재를 위하여 만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성스러운 비젼의 사기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왕필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요새말로 하면은 에코체인(eco-chain)이다. 즉 먹이사슬이요, 생명의 순환이요, 생태의 고리다. 그런데 이 사슬이 목적론적 의미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그러하다고 인식할 때만이 우리는 자연의 순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목적론적 가치를개입시키면 반드시 북한산을 마구 훼손하고 안산, 낙산, 남산, 관악산, 닥치는 대로 다 훼손하면서 어떠한 목적론적 구실인들 다 둘러댈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어떠한 존재가 반드시 목적론적 전제가 있어야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럿셀경의 말대로, 그것은 ‘상상력의 빈곤’ 일 뿐인 것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이 하나의 명언을 보다 진실하게 이해하자! 보다 깊게 깨닫자! 그리고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이십일세기(二十一世紀)를 맞이하자! 이 천지(天地)의 동포(同胞)들이여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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