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풀무는 비어 있기에 끊임없이 바람이 생성된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앞서 말했듯이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은 이 5장의 가장 오래된 층대를 형성하는 프라그먼트(fragment)로서, 왕본(王本), 백서본(帛書本), 죽간본(竹簡本)에 공통되며, 이 삼자(三者)간에 문자(文字)의 출입(出入)이 거의 없다(문자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異體字들만 있을 뿐이다).
왕필은 탁(橐)과 약(籥)을 독립된 의미체로 보았다. 탁은 대장간에서 쓰는 풀무[排橐]로 보았고, 약은 ‘생황’ 정도나 되는 악기[樂橐]로 보았다. 그런데 많은 주석가들이 ‘탁약(橐)’은 두 글자가 함께 대장간에서 쓰는 풀무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나 역시 동감이다. 아마도 탁은 겉 나무 상자를 가리키고 약은 그 속을 왔다 갔다 하는 피스톤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노자』의 구절들이 고고학적으로 실증될 수 있는 당대의 기물들의 실제적인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 템플(Robert Temple)이 지은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China-Land of Discovery and Invention)』을 보면 ‘복동식 풀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73~75쪽). 아주 단순한 장치인데 피스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으로 다 쉼이 없이 바람을 내는 기발한 구조인 것이다.
내가 살던 천안의 큰 재빼기에도 대장간이 있었는데 둥그런 화덕 옆으로 진흙으로 이긴 벽면 속에 이러한 풀무가 장착되어 있었다. 아마 그것도 이러한 복동식 풀무였을 것이다. 이 간단한 복동식 풀무의 발명이 중국의 야금기술의 비약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온도가 떨어질 기회가 없다). 서양에서는 단동식 풀무조차 역사에 등장한 것이 기원전 2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16세기 경에나, 이 복동식 풀무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래되어 복동식의 아이디어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풀무의 찌그러들지 않는 통을 노자는 하늘과 땅에 비유한 것이다.
땅이 통이 만약 무엇으로 꽉 차있다면 바람이, 움직일수록 더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풀무가 비어있다는 것, 그리고 그 빈 곳에서 끊임없이 바람이 생성(生成)되어 나온다는 것, 이것이 지금 노자가 우리의 우주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풀무의 비유가 물리학적으로 정확한 계(界)를 설정하고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엔트로피의 감소와 증가의 전체적 발란스를 전제로 한 어떤 순환적 모델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순환하는 빔이야말로 의 원천인 것이다. 이것은 매크로한 우주의 전 체계에 대한 노자의 생각인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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