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우풍영의 날조
『논어』를 읽을 때, 간결한 ‘자왈(子曰)’의 형태를 취하거나, 제자들의 자(字)를 직접 호칭하거나, 노나라 밖으로 출사(出仕)하지 않은 직전제자의 전승이나, 공자보다 일찍 죽은 안회나 자로가 등장하는 파편과 같은 것들은 대체로 고층대에 속하는 파편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공자왈(孔子曰)’한다는 것은 공자학단 밖의 사람들이 공자를 객관화시켜 부르는 말이므로 후대의 전승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사이에서 오가는 기다란 대화형식을 취한 것, 아규먼트(argument, 주제)의 성격이 강한 것, 그리고 드라마적인 구조를 갖춘 것들은 대체적으로 후대에 성립한 것으로 간주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진(先進)」의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자로(子路)ㆍ증석(曾晳)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시좌(侍坐)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특기할 사실은 중석(曾晳)의 답변이 제일 나중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무우풍영(舞雩風詠)’의 답변내용만을 공자가 허여(許與)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로ㆍ염유ㆍ공서화 3인이 나가고 난 후에 증석 혼자만이 공자 곁에 남아, 공자와 사적인 정담을 나누며, 나간 3인의 답변내용을 분석검토하는 공자의 멘트를 듣는다. 이것은 명백히 공자 교단내의 증석의 위치가, 자로ㆍ염유ㆍ공서화에 비해 한 레벨 높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자의 증석에 대한 허여의 차원이 타 3인과는 질적으로 격상되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로를 내보내놓고 자로 등 뒤에서 공자가 증석과 멘트를 나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불성설의 상황이다. 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감지된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지다. 맹자(孟子)는 바로 증자계열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이다. 이 파편은 증자 - 맹자 계열에서 증석 - 증자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꾸민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先進)」 25 본문에서 자세히 분석하겠지만 기존의 파편들을 조합하여 새롭게 공자상을 구성한 증자학파외의 작품일 수도 있다. 증석은 증자의 아버지가 아닌 전혀 가상적 인물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증자가 들은 공자의 말로서 기록되고 있는 파편들은 대부분 후대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조작적 성격이 강하다. 증자는 공자 최만년에 입학한 제자였으며 공자와 직접 심오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기회가 없었다. 「이인(里仁)」 15편의 그 유명한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하여 증자가 ‘충서(忠恕)’ 운운한 종류의 파편도 그 실제상황이 의심되는 것이다. 증자계열에서 자파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드라마이며 역사적 공자의 원래사상을 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충서를 공자사상의 일관된 본질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논어』를 분석해 들어가는 작업은, 끊임없이 재미있는 텍스트의 비평(textual criticism)의 묘미를 제공할 수도 있고, 텍스트의 원형을 복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또 텍스트의 무한히 가능한 새로운 배열이나, 텍스트 자체의 교정이나 변형에 의한 새로운 의미의 발굴을 가능케 해줄 수도 있지만, 최종적인 문제는 이러한 문헌비평의 궁극적 성과가 과연 『논어』의 오리지날리티를 바르게 변(辨)할 수 있으며 더 나은 공자의 이해로 우리를 다가가게 하는가, 하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질문에 매우 회의적 답변을 내린다. 『논어』 그 텍스트를 아무리 분석해도, 『논어』를 아무리 재배열해도, 『논어』를 아무리 변형시켜도, 우리의 시각을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공자의 말씀이라는 어떤 오리지날리티로 우리를 데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변형된 텍스트가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에 비해 더 우수하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 무수한 고증학자들의 땀방울이 황하의 물결처럼 도도히 흐르기만 하는 『논어』의 탁류 속에 족적없이 명멸할 뿐이다.
우리가 해석해야 할 것은 『논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논어』, 이천여년을 묵묵히 흘러내려온 『논어』라는 의미체계,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는 인간들의 의식의 장 속에 새겨진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논어』라는 텍스트는, 이미 그 오리지날리티의 시비를 떠나,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그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공자라는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논어』로 돌아가자!(Return to the Analects!)
『논어』 그 자체로 회귀하라는 나의 외침은 매우 소박한 요구이지만, 이러한 소박한 요구는 결코 소박하지가 않다. 『논어』라는 텍스트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의 이해는 공자 그 인간에 대한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의 의미가 맥락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공자라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는 또 다시 『논어』라는 텍스트에서만 발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파라독스에 우리는 봉착한다. 결국 이러한 파라독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논어』라는 텍스트와 공자라는 인간 사이를 왕래하는 우리 인식의 변증법적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시험적인 모델들을 요구한다. 『논어』는 분명 공자라는 인간의 삶의 구조 속에 던져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공자의 삶의 구조를 변증법적으로 전제할 것인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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