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의 성과와 한계②
그러나 일본의 낙관은 국공합작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우선 장제스가 예전과 달리 강력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게다가 규모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늘 국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인 홍군이 항전에 동참했다. 화북의 홍군은 팔로군(八路軍)으로, 화남과 화중의 홍군은 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되었다. 홍군을 이끌던 주더(朱德, 1886~1976),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린뱌오(林彪, 1907~1971) 등 유격전의 명수들은 비로소 ‘진정한 적’을 맞아 벼르고 있었다.
베이징과 톈진을 함락시킬 때까지는 그런대로 일본의 일정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산둥과 산시에서 팔로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정예 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미 예정된 3개월'을 넘어섰고, 일본 측의 희생도 예상외로 엄청났다. 전쟁 개시 5개월 만에 간신히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로 3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잔인한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다.
단기전의 구상은 실패했지만 일본은 역시 강했다. 난징을 점령하자 황해에 면한 중국의 요지는 모조리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초기 전황은 10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순식간에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제압한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은 100년 동안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100년 전과의 차이는 적의 자세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중국을 영토적으로 점령하거나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경제적 이권만 뜯어내려 했을 뿐이다. 그 반면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대륙 전체를 한반도처럼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초기에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것은 똑같지만 이후의 사태는 크게 달랐다】.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서쪽의 우한으로 옮겼다가 우한이 점령당하자 다시 오지인 충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후퇴를 계속하면서도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광저우마저 점령해 중국의 해안 전체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군수품을 보급받기 시작했는데, 항구라는 항구는 모조리 일본에 점령당한 탓에 보급품을 미얀마와 윈난을 거쳐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당시 미국은 일본에도 석유와 철, 기계 부속 등 군수물자를 대량 수출하고 있었으니 중국만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단기전의 문제점은 바로 이 시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선이 너무 넓어져버린 것이다. 일본군의 병력으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남북으로 무려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 반면 중국은 내륙으로 몰린 덕분에 근거지만을 집중 방어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내륙 방면으로 더 이상 진격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단기전을 계획한 일본군은 처음부터 도시와 철도, 도로, 통신선을 중심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중국 서부의 산악 지대로 갈수록 기동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중국은 전면전을 피하고 홍군의 특기인 초토화 작전과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맞섰다.
42.195킬로미터를 뛰는 마라톤에서도 35킬로미터 지점이 가장 어렵다고 했던가? 일본군은 2000킬로미터 이상을 숨 가쁘게 달려 왔지만, 우한에서 충칭까지 600킬로미터를 앞두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여기서 전선은 교착되었다. 1938년 말부터 1941년 말까지 3년간 전쟁은 전형적인 지구전과 소모전의 양상이었다.
▲ 제국주의의 학살극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패잔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사진은 당시 양쯔 강 연안에 쌓인 중국인들의 시신이다. 공식적으로는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30여만 명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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