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락된 시대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잡는다면 그 후 한반도 역사에는 상당히 긴 누락 기간이 생기게 된다. 서력기원으로 셈하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시기는 기원전 2333년으로 알려져 있다(후대에 문헌상으로 추정한 연대인데, 오늘날 우리 역사를 ‘반만 년 역사’라고 부르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 시기는 중국의 오제(五帝) 가운데 요(堯) 임금 시대에 해당한다. 물론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기원전 2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은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어쨌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그 연대로 가정하고 역사를 추적해보자. 고조선이 세워진 이후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는 사뭇 달라진다. 중국의 경우 요와 순 임금으로 신화적인 오제 시대가 끝나고 우 임금이 하나라를 열어 왕조 시대를 시작하며, 계속해서 은(殷)나라와 주(周)나라로 이어지게 된다(은나라부터는 유적으로써 실존했음이 입증된 왕조 시대다). 그러나 단군이 한반도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시기는 무려 1000년 이상이 지난 뒤 중국에서 주나라가 탄생할 무렵이다.
그럼 그동안 단군은 뭘 했을까? 신화에 따르면 고조선을 세운 뒤 단군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기고 수백 년 동안 나라를 더 다스린 다음 중국 주나라의 무왕(武王, 기원전 1169~1116)이 즉위하던 해(기원전 1122년)에 무왕이 파견한 기자(箕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아사달에서 190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전한다. 이건 물론 사실이 아닌 신화다. 하지만 신화에서도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고, 또 달리 ‘비빌 언덕’이 없는 우리로서는 신화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원전 24세기에 등장한 단군이 기원전 12세기까지 1000년 이상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신화는 어떤 역사를 담고 있을까?
우선 단군이 그토록 오랜 기간 왕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2천 세에 가깝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사실 세계적으로 보면 그런 장수만세 설화는 드물지 않다. 점토판으로 전해지는 수메르의 왕들도 200~300년씩 재위한 기록을 많이 남겼을뿐더러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는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에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800~900년씩 장수를 누린 인물들이 연달아 등장한다【그에 비해 비슷한 시기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거의 정상적인 재위 기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집트 문명이 고대 세계 최고(最古)의 선진 문명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비록 단군처럼 무려 1908년이나 산 인물은 신화 가운데서도 거의 최고 기록에 해당하지만 어쨌든 그런 내용의 신화는 흔하다는 이야기다.
그 내용 자체는 물론 사실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건질 게 없을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수메르의 왕들과 아담의 자손들은 실제로 장수한 게 아니라 아마도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짙다. 예컨대 아담이 930년을 살았고, 그의 아들 셋이 912년, 또 셋의 아들 에노스가 905년을 살았다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는 실제로 그 개인들이 그렇게 장수했다는 뜻이 아니라 아담과 셋과 에노스가 각각 930년, 912년, 905년에 달하는 각 시대의 ‘건국자’라는 뜻일 것이다. 아직 왕조의 개념도 없었고 문자의 발달도 미약했던 때였으니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면 굳이 지배자의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이며, 더욱이 후대의 평범한 지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선배이자 영웅의 이름을 계속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이집트의 파라오들이 호루스의 환생임을 자처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후대의 서양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잘 알려진 사례는 로마 시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의 경우다. 그는 원래 이름이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였으나 양아버지가 죽자 재빨리 그 이름을 자기 이름 속에 끼워넣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중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받아 다시 한번 개명하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을 잘 써먹은 경우다. 그밖에 고대 아시아의 사르곤, 키루스, 알렉산드로스, 또는 중세 서유럽의 왕명으로 자주 등장하는 샤를(카를, 찰스, 카롤루스)이나 앙리(하인리히, 헨리, 엔리케) 등의 이름들도 모두 위대한 조상의 이름을 후손이 대대로 써먹은 사례다】.
그렇다면 단군도 한 명의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일종의 왕가 이름이었거나, 혹은 동양적인 정서를 더 고려한다면 직함의 명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단군은 지배집단의 이름이거나 지배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전승되면서 마치 특정한 사람의 이름인 것처럼 바뀌었을 테고, 더 후대에는 건국 시조로 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기자에게 왕위를 넘길 때까지의 천여 년 동안 단군이 어떤 일을 했고 고조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즉 이 시기는 한반도 역사에서 누락된 공백기다. 이렇듯 나라를 세운 시기에 관한 기록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는 데 비해 그 후의 기나긴 시기에 관한 기록이 일체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군신화가 후대에 창조되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하지만 그래도 중국의 연대와 맞추려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만큼 단군신화의 기본 골조는 무척 오래 전부터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단군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고려 시대의 문헌이지만, 단군신화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언제 생겨난 것으로 봐야 할까?
▲ 고대의 왕명록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기록된 고대의 왕명록이다. 연대로 치면 우리의 단군에 앞선 시대의 왕들인데, 이들 역시 단군에 못지 않게 수백 년씩 장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실제로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아마 이들을 대표자(혹은 건국자)로 하는 왕조들이 수백 년 동안 존속했다는 뜻일 터이다.
지금까지 말한 단군신화의 성격을 정리해 보면 그 시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①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한반도의 토박이들을 다스렸다.
② 단군은 그 토박이들에게 미작 중심의 농경 문명을 전달했다.
③ 단군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지배집단과 관련된 명칭이다.
④ 단군은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할 때까지 한반도 역사를 이끌었다.
①에서 우리는 단군 이전에도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들과 달리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 기존의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온 인물이다. 여기서 하늘이란 곧 한반도가 아닌 다른 곳을 뜻한다고 보면 단군은 한반도의 외부에서 온 지배자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의 어머니가 한반도 원주민이 아닌 웅녀라는 사실도 그 점을 강조해준다.
이 추론에 ②의 내용을 더하면 단군은 오래 전부터 미작 농경이 발달해 있던 중국에서 온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중국의 중원은 황허라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으므로 충분히 가능하다). 그 전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말하자면 진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미작 농경을 하지 않았으며, 문명의 단계도 아주 낮았을 것이다. 게다가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천제 환인의 ‘서자’라는 사실은 단군의 뿌리가 중국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또 ③은 단군이 한반도인들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 오랫동안 자기 고향에 해당하는 중국과 별다른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향을 등진 기간이 실제로 천여 년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상당한 기간 동안 지배집단이 (단군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릴 만큼 지배집단의 성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단군 집단은 애초부터 중국에서 삶의 기반을 완전히 잃고 동쪽으로 대규모로 이주해온 무리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④는 주나라가 세워진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단군 지배집단이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에 해당하며, 한반도가 다시 중국 역사와 접촉하게 되는 과정을 말해준다.
이런 해석을 통해 단군신화의 탄생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단군 신화는 중국에서 밀려난 어느 부족이 동쪽으로 와서 현지의 원주민(한반도인)들에게 미작 농법을 전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집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신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최소한 중국에서 주나라가 성립된 이후일 것이며, 그 지은이는 단군의 ‘진짜 후손’들일 것이다. 그들은 직계 조상인 단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까지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그런 신화를 만들었을 것이며, 주나라 계통의 새로운 지배집단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전쟁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그 양위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나 마찰은 없었던 듯하다)【단군의 후손들이 구술로만 조상 신화를 남긴 게 아니라면 그들은 아마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 한자가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이며,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기원전 2세기를 넘지는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명이 존재하는데 문자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단군조선에서도 모종의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럼 그건 어떤 문자였을까? 일설에 따르면 우리의 옛 글자에 가림토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나중에 훈민정음의 토대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어쨌거나 가림토든 뭐든 당시에 사용하던 문자는 한자를 변형시켜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자도 최종적으로 정형화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말 진 시황제의 시대였고 그 이전까지는 지방마다 쓰는 글자와 문법이 달랐다. 고조선 문자는 그런 한자의 변종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조선 문자가 우리 고유의 문자 한자냐를 논하는 것 역시 쓸데없는 일이다】.
그럼 단군은 어떻게 되는 걸까?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일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단군이 그 전부터 한반도에 살고 있던 우리의 진정한 조상들을 다스린 지배집단일 뿐이라고 보면 그는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니다. 그러나 그 아득한 옛날에 이주민과 원주민의 구별이 그리 뚜렷한 것일 수는 없다. 더욱이 원주민이라고 해도 동질적인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며 단일민족의식 같은 건 더더욱이 없었다(단군의 지배를 ‘정복’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반도에 선진 문명을 전하고 최초의 나라를 세운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다. 결국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역사적으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에도 걸핏하면 종교와 역사학계에서 벌어지는 단군을 둘러싼 ‘역사적인 논쟁’ 따위에 이제 더 이상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중국에 주나라가 성립하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단군의 시대는 갔고 이제 기자의 시대가 왔다. 무혈 쿠데타를 산뜻하게 성공시킨 기자는 어떤 인물일까?
▲ 두 점의 단군 영정 위쪽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 지정한 단군의 표준 영정이고, 아래쪽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그려진 영정이다. 자세나 얼굴이 닮은 것으로 보아 왼쪽 영정이 오른쪽 것을 참고했음 직하다. 이런 영정은 우리 민족이 생물학적으로 단일한 혈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어딘지 그 의도가 ‘불순’해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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