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단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단군)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7:48
728x90
반응형

 1장 신화에서 역사로

 

 

분명한 시작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조(始祖)를 둔 민족만큼 부러운 게 또 있으랴? 시조가 있으면 민족의 기원과 역사의 시작이 분명하다. 다만 그렇게 분명한 시작은 역사가들에게 의지할 만한 출발점을 주지만, 그와 더불어 커다란 숙제도 안겨준다. 출발점 자체를 해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는 미궁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기원의 역사중에서

 

 

우리 역사는 처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 이유는 단군(檀君)이라는 민족의 시조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를 봐도 우리 역사만큼 시조가 분명한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단군은 시조보다 국조(國祖)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시조에 해당하는 존재는 흔히 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시조들은 거의 모두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땅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가 결혼해서 오시리스를 낳았고 오시리스가 누이인 이시스와 결혼해서 민족의 시조에 해당하는 호루스를 낳았다고 믿었다(그래서 이집트의 역대 파라오들은 모두 호루스의 환생으로 자처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가 크로노스를 낳았고, 그가 레아와 결혼해서 올림포스의 최고신 제우스를 낳았다고 생각했다이집트와 그리스의 신들은 민족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를 만든 창조자이므로 처음부터 근친혼을 통해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신화의 게브와 누트는 쌍둥이이며, 그들의 부모인 슈(공기의 신)와 테프누트(습기의 여신)도 쌍둥이 남매다. 다만 슈와 테프누트는 태양신 라()가 혼자 힘으로 낳았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가이아만 카오스 속에서 홀로 태어났을 뿐 우라노스는 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크로노스와 레아도 오누이 사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에선 동물을 등장시킬지언정 그런 근친혼이 없다. 아마도 이는 유학 이념의 영향일 것이다. 유학에서는 현대까지도 동성동본을 금지할 정도로 친족 개념이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알려진 시기(기원전 2333년으로 추정)보다 훨씬 후대에 생겨났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보기로 하자. 호루스와 제우스는 인간이 아닌 신이지만 이집트 세계와 그리스 세계를 창조했으므로 사실상 두 민족의 시조라고 봐도 될 것이다(민족의 시조란 원래 일반 백성인 법이 없고 신이거나 최소한 지배자의 신분이다).

 

 

이렇듯 신이 다스리는 세계가 먼저 출현하고 그 다음에 인간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시대, 즉 역사 시대가 개막되는 게 민족신화나 건국신화의 기본 코스다. 그런 점에서 단군왕검이라는 인간이 주인공인 우리의 단군신화는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

 

물론 단군도 신과 관련된 인물이기는 하다. 그의 아버지 환웅은 천제(天帝)인 환인의 서자였다. 하늘에서도 서자는 차별을 받았을까? 그는 일찍부터 하늘 세상보다 인간 세상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 관심에 대한 보상으로 아버지에게서 바람과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 태백산태백산은 오늘날 한반도 북부 또는 랴오둥(遼東)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라는 땅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세운다.

 

아무리 비천한 인간 세상이라지만 신의 아들로서 신의 도시를 세웠는데 홀아비의 몸으로 다스릴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환웅은 아내를 구한다. 그러나 범상한 여인이 그의 아내가 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의 아내는 희한하게도 사람이 아닌 동물 출신이다. 마침 사람이 되려 하는 곰과 호랑이가 있어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 인내력을 테스트한다. 결국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루함을 견딘 곰이 승리해 여성이 되었고, 환웅은 사람의 몸으로 변신하여 그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비록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반인반신(半人半神)이지만 단군은 온전한 인간이므로 이집트나 그리스 신들의 경우와는 엄연히 다르다. 비교하자면 그 신들보다는 로마의 건국자인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가깝다. 쌍둥이의 어머니는 인간 세상의 공주였지만 아버지는 전쟁의 신 마르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의 쌍둥이는 마르스의 자식답게 로마를 건설하자마자 곧바로 인근 부족과의 싸움박질에 몰두한 반면, 단군은 고조선(고조선의 는 후대의 이씨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조선이었다)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평화롭게 다스리는 데 주력한다.

 

차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단군이 농경문명에 적합한 건국 시조였다는 점이다. 로마가 세워질 무렵(기원전 753년으로 전해진다) 로마 인근에는 여러 부족들이 나름대로 도시를 세우고 활기차게 문명을 건설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군은 로마의 쌍둥이에 비해 훨씬 안정된 권력을 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경쟁자도 없었을뿐더러 단군은 자신의 백성들, 즉 원래부터 그곳에 살던 사람(한반도 원주민)들에게 전혀 새로운 농경문명을 전했기 때문이다.

 

단군이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농경문명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는 점, 이 두 가지 사실은 단군신화를 출발점으로 삼는 한반도 문명의 대략적인 성격을 결정한다. 단군은 인간의 신분이므로 한 민족의 조상이 되기에 아주 적합하다. 또 농사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땅이 가장 중요하다. 농사 기술을 전해준 조상과 농사를 지을 땅, 이것은 곧 한반도 문명이 장차 조상 숭배와 농경을 토대로 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오늘날에도 그런 문명의 자취는 뚜렷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아들 중심주의와 효 사상이 그 흔적이다. 전자는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로, 후자는 전통적 미덕으로 간주되지만 사실 두 가지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농업 사회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농사 기술과 농토를 물려받는다. 다른 말로 바꾸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생산수단 전체를 아버지에게서 전해 받는 셈이다. 그러니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딸보다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며,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어느 덕목보다 중시하는 게 자연스럽다(이런 현실적 이해관계를 이념적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한 게 바로 유학이다). 문제는 농경문명을 탈피한 현대 도시 사회에서도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시대적ㆍ공간적 불일치를 빚는다는 데 있다.

 

 

곰족과 호랑이족? 고구려 중대에 그려진 각저총 벽화의 씨름 장면이다. 희미하지만 오른쪽의 나무 아래에 단군신화의 두 주인공인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게 보인다. 그것으로 미루어 단군신화는 고구려시대까지도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당시 두 부족의 상징이었다면, 이 씨름의 승자는 아마 곰족의 대표선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한 가지 더 있다. 무릇 인류 문명이란 세계 어디서나 수렵채집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발생했다. 따라서 모든 문명은 당연히 농경을 기본으로 한다(문명의 탄생 자체가 정착 생활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니까). 그렇다면 단군이 한반도 토박이들에게 농경문명을 전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일 수 없다. 정작 특이한 일은, 단군은 그냥 농경 문명이 아니라 첨단의 선진 농경문명을 전해주었다는 점이다. 그게 뭘까?

 

그건 바로 미작(米作) 농경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우기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도 초보적인 농경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쌀은 한반도에서 가장 늦게 경작되기 시작한 작물에 속한다. 태고적 한반도인들은 조, 기장, 보리, 콩 등을 먼저 경작했고 그런 작물들을 바탕으로 원시적 농경문명을 일구었다. 그러나 단군은 한반도인들에게 미작 농경을 권하고 퍼뜨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군이 새삼스럽게 토박이들에게서 지배자로 인정 받기 어려웠을 것이며, 감히 천제의 후손임을 자처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환웅의 특기도 바로 쌀 농사와 관련된 중요한 요소들(바람과 비와 구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쌀은 기본적으로 아열대성 작물이다. 동남아시아의 경우 아주 일찍부터 쌀을 재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기후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황하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의 중원 지역 역시 한겨울에도 평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고 강우량 또한 1년 내내 일정하기 때문에 미작에 적합한 조건이다. 그에 비해 한반도는 기온도 낮을뿐더러 강우도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내리기 때문에 저수 시설이 없으면 논 농사에 필요한 많은 물을 대기가 어렵다. 게다가 한반도는 예나 지금이나 평야가 적고 산지가 많은 지역이다. 반도 남부는 좀 덜하지만 여기도 논 농사를 지을 만한 대규모의 농토는 부족한 데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곳은 더 춥고 더 평야가 부족한 반도 북부의 평양이다(이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으로 추정되지만 랴오둥에서 한반도 북부 사이의 어느 지점인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미작 경영은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지고 보면 이후 역사 시대 내내 우리 민족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처음부터 여건에 맞지 않는 미작 농경을 주업으로 삼은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미작 농경을 암시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신화의 내용에서는 비슷한 점이 없지만 문명의 성격에서는 단군신화와 대단히 흡사한 게 바로 중국의 건국신화다. 중국의 경우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에 이미 초보적인 농경술이 발달했다. 삼황(三皇)의 시대에 중국에서는 농사가 발명되었으며, 오제(五帝)의 시대에는 농법이 완성되었고, 바로 뒤에 하()나라를 건국하는 우()는 황허의 치수(治水)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의 왕조 시대, 즉 본격적인 역사시대를 열었다. 즉 중국의 건국신화는 중국이 미작 중심의 농경문명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단군신화는 그런 중국의 건국신화를 본떠서 후대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단군신화의 그 분명한 시작은 어느 시점에선가 창조되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아니 그보다 단군은 혹시 중국에서 한반도로 와서 미작 농경문명을 전래한 인물은 아닐까동남아시아처럼 기후 조건 자체가 유리한 경우가 아니라면, 쌀 농사에서는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를 알게 해주는 역법이 중요하다. 중국에서는 오제(五帝)의 첫 왕인 황제(黃帝)의 시대에 역법이 만들어졌다고 전하는데, 그 덕분에 중국은 동남아시아 문명보다 훨씬 선진적인 문명을 만들 수 있었고 일찍부터 왕조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지금은 누구나 달력을 쉽게 구입해서 사용하지만, 과거에는 천체의 운행을 알지 못하면 달력을 만들 수 없었다. 달력이 없다면 왕의 생일 같은 행사도, 군대가 모이고 이동하는 날짜도 확정할 수 없을 테니 국가 체제가 성립할 수 없다. 아마 단군은 중국의 역법을 가져와서 한반도인들에게 전해주었을 것이다. 달력이 있어야만 고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생겨날 수 있었을 테니까?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분명한 시작

누락된 시대

두 번째 지배집단

중국과의 접촉

지배인가, 전파인가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