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자람
나라와 민족의 꼴이 제법 갖추어지면서 중국, 인도, 일본은 독자적 발전의 시대를 맞는다.
제국 체제로 접어든 중국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이자 국제 질서의 핵으로 자리 잡는다. 중국과 달리 인도는 내내 분권화된 역사를 전개하다가 결국에는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를 끊고 치열한 내전의 역사로 접어드는데, 그 결과 무사 정권이 탄생하게 된다.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1. 중화의 축
죽 쒀서 개 준 통일
기원전 221년 최초로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나서 진(秦)의 왕인 정(政)이 최초로 한 일은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중국 대륙이 하나의 강력한 제국을 이루었으니 과거 제후들의 호칭인 왕(王)이나 공(公)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만든 새 호칭은 바로 황제(皇帝)였다. 그는 최초의 황제가 되므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보통 그를 진시황(秦始皇)이라고 부른다. 또한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짐(朕)’이라는 호칭도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진 제국은 존주양이(尊周攘夷)를 이념으로 하는 전통의 제후국 출신이 아니었다. 서쪽 변방에서 오로지 자체의 힘만으로 국력을 키워 중원의 패자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운신의 폭이 한결 자유로웠다. 진시황에게는 존주의 명분도, 양이의 의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중앙집권을 실시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복속된 제후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모르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중앙집권은 반드시 필요했다. 주나라 시대에는 주 왕실이라는 정신적ㆍ이념적 중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게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 봉건 질서를 제도적으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 제도는 군현제(郡縣制)였다. 군현제는 통일 이전부터 진시황을 충실히 보좌해오던 법가 사상의 책략가인 이사(李斯, 기원전 280년경~기원전 208)의 건의로 시행되었다.
각 지방을 독립국처럼 다스리던 제후들이 사라졌으니 우선 그들의 통치를 대신할 행정 기구가 필요했다.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36개 군(郡)으로 나누고 각각의 군을 군수(郡守), 군위(郡尉), 군감(郡監)이 관장하도록 했다. 또 중앙에는 승상(丞相, 국무총리 격), 태위(太尉, 국방장관 격), 어사대부(御史大夫, 검찰총장 격)의 3공(三公)과 오늘날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9경(九卿)을 두었다. 이로써 황제를 권력의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성립되었다【사실 군현제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도시국가 형태의 봉건시대를 거쳐 통일 국가가 수립되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군현제와 비슷한 관료 행정제도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낯익은 정부 부서의 편제는 물론 군수라는 직함도 이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행정 기구만 갖추었다고 통일 제국의 기틀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행정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의 측면에서도 통일되지 않으면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진시황(秦始皇)은 지역마다 달리 쓰던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고, 문자도 예전부터 진이 사용하던 전서체(篆書體)만 사용하게 했다. 중국에서 한자가 생겨나고 쓰인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지역마다 서체가 달라져 거리가 먼 곳끼리는 같은 한자라도 서로 식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억지로 통일하려면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각국의 교류가 활발해져 이미 통일의 기반이 숙성되어 있었고, 오히려 그간 도량형이나 문자가 서로 달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통일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 시황릉(여산릉) 진시황은 ‘최초의 황제’답게 즉위 초부터 자신의 능을 짓기 시작했다. 산시의 여산에서 발굴된 시황릉은 무려 사방 500미터나 된다. 능의 동문 밖에서 발굴된 이 6000개의 병사 인형들은 시황릉을 수비하는 부대로, 실물 크기에 제각기 표정이 다르게 제작되었다. 시황릉의 공사에는 연인원 70만 명의 피와 땀이 필요했다. 현전하는 역사 유적은 대개 당대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요구했다.
앞서 말했듯이,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남쪽의 오랑캐(초나라)’는 중원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또한 전국시대에 서쪽 변방에서 발흥한 진이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중원 서부 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화 세계로 들어왔다. 끝까지 ‘오랑캐’로 남은 것은 북방의 이민족들뿐이었다. 북방 이민족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중국이 통일되었다는 것은 이제부터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 간에 벌어질 기나긴 투쟁을 예고하고 있었다(만약 전국 7웅 중에서 북동부에 터를 잡은 연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면 북방 민족들도 중화 세계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사전 대비가 만리장성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서쪽의 중앙아시아까지 6000여 킬로미터나 길게 뻗은 만리장성을 전부 다 쌓은 것은 아니다. 원래 전국시대에는 성을 둘러싼 공방전이 치열했던 탓에 각국은 방비를 위해 성을 많이 쌓았다. 그러나 중국이 통일되었으니 이제 성 따위는 별로 필요치 않았다. 북방을 방어하는 성벽만 있으면 되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대부분의 성을 파괴한 다음, 북방에 자리 잡은 성들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서로 연결시켰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게 만리장성이다(만리장성은 그 후에도 계속 연장되고 개축되어 처음보다 더욱 길어졌다).
진시황 자신은 변방 이민족 출신이었지만, 만리장성은 더 이상의 이민족을 중화 질서에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리장성은 단지 물리적 용도만이 아니라 중화 세계의 범위를 한정하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만약 만리장성이 더 후대에 축조되었다면 만주와 한반도까지 중화 세계에 편입되었을지도 모른다.
유사 이래 최초로 탄생한 통일 국가의 기틀을 다지겠다는 진시황의 열의는 대단했으나 그만큼 부작용도 심했다. 우선 그의 통치는 너무 과격했다. 법가를 신봉하고 한비자(韓非子)를 존경한 그는 법가 이외의 사상을 일체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진기(秦紀, 진의 역사)와 농서, 의학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고 460여 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역사에 길이 남을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켰다. 이런 진시황(秦始皇)의 혹독한 사상 탄압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낳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후대인들처럼 유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아직 각 지방에서 힘을 완전히 잃지 않은 옛 제후국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또한 대규모 건축 사업도 문제가 되었다. 만리장성은 용도라도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진시황이 시작한 각종 건설 사업, 예컨대 아방궁이나 여산릉의 축조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요역(徭役)의 부담을 안겼다. 가뜩이나 농민들은 오랜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맞아 꿈에 부풀어 있었기에 실망과 좌절이 더했다.
그래도 시황제의 생전에는 그와 같은 지식인과 농민 들의 반발심이 겉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210년 지방 순례 중에 그가 병으로 급사하자 그간 곪았던 고름이 터져 나왔다. 황제가 죽자마자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환관인 조고(趙高)였다. 그는 황제의 둘째 아들을 끼고 음모를 꾸며 실권을 장악했다. 욕은 좀 먹었어도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秦始皇)으로서는 죽 쒀서 개 준 격이었다. 그러나 조고는 권력을 차지했어도 최초의 황제가 누린 권위마저 갖지는 못했다.
▲ 책을 태우고 산 사람을 묻고 앞마당의 왼쪽에는 금서로 분류된 책들을 불사르는 분서(焚書)가, 오른쪽에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하는 갱유(坑儒)가 진행되고 있다. 누가 금서를 가지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면 관리들이 즉각 들이닥쳤다고 하니 현대의 이데올로기적 사상 탄압보다 훨씬 혹독했던 셈이다.
촌놈이 세운 대제국
반란은 농민들이 먼저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뒤를 잇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지 불과 1년 만인 기원전 209년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주동자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하급 장교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농민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내 일반 농민도 가세하면서 삽시간에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반란군은 황허 이남의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 1년 가까이 맹위를 떨쳤다. 내친 김에 진의 타도를 목표로 삼은 진승은 장초(張楚)라는 국호까지 정하고 자신을 왕으로 자칭했다(국호에 초가 붙은 것은 옛날의 강국 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이듬해 반란은 간신히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은 진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진승과 오광이 ‘그리운 옛날’을 들먹인 것은 그만큼 옛 제후국들의 힘이 아직 살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과연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계기로 통일 이전의 6국(전국 7웅 가운데 진을 제외한 나라들) 세력들이 각자 자기 지방에서 들고일어나 옛 제후국의 부활과 계승을 표방했다. 그러자 수십 년 전의 세력 판도가 금세 부활했다. 다른 반란 세력들은 그런대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옛날 진과 당당히 맞섰던 강적 초의 후예들은 역시 만만찮았다. 옛 초의 귀족 출신 항량(項梁)은 초의 왕족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군을 조직했는데, 이들 세력은 옛날을 그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세를 떨쳤다. 항량이 전사한 탓에 전권을 인수받은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는 드디어 관군의 핵심인 장한(章邯)의 군대를 물리치고 기원전 206년에 진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패기와 용맹으로 무적이었던 항우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된다. 바로 항우와 달리 왕족 혈통도 아니고 변방의 하급 관리에 불과한 유방(劉邦, 기원전 247년경~기원전 195)이라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거병할 무렵 유방의 군대는 초라한 농민군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그는 명망 있는 초의 귀족에다 정규군을 거느린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처음에 그의 군대는 항우의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진을 무너뜨릴 때까지 두 사람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패권은 하나였다. 진이 멸망하자 두 사람은 6년간 치열한 결전을 펼쳤는데, 결과는 유방의 대역전승이었다. 항우를 무너뜨린 유방은 새 제국 한(漢)을 세웠으므로 두 사람의 결전은 훗날 초와 한이 싸우는 장기판으로 이어졌다. 패배한 초패왕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자결로 삶을 마쳤다.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중국 역사상 가장 미천한 신분의 ‘촌놈’이 천하의 대권을 장악했다(1500년 뒤 명을 건국하는 주원장은 정규군을 거느리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홍건군紅巾軍이라는 명칭을 가진 군대의 두목이었다). 촌놈 유방(劉邦)의 승리는 옛 제후국의 귀족과 백성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운 옛날’에 대한 향수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드디어 안정된 통일 제국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잠시의 분열기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劉邦)은 기원전 202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한의 고조(高祖)로 즉위했다. 새 세상이 되었으니 제도도 바뀌어야 했으나 워낙 진시황(秦始皇)이 기틀을 잘 잡아놓은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한은 진의 중앙 관료 기구인 3공과 9경도 그대로 유지했고, 진의 관료 제도도 거의 답습했다. 손보아야할 것은 행정제도, 즉 군현제였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수백 년간의 분열기를 극복하는 첫 단추는 이미 진의 군현제가 제시한 바 있었다. 다만 군현제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중앙집권제는 필요하지만 군현제처럼 강력한 제도는 부작용이 컸다. 게다가 평민 출신의 한 고조는 진시황보다 권위도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군현제와 옛 봉건제를 병용해 새로이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했다.
군현제는 전국을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 현을 두는 제도였으므로 중앙집권을 도모하기에 유리했으나, 군국제는 군의 편제만 그대로 두고 지역에 나라[國]의 위상을 부여하는 것이었으니 중앙집권을 반쯤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군국제는 수도인 장안(長安) 부근만 중앙집권제로 통치하고 각 지방에서는 봉건제를 실시하는 절충책이었다.
사실 오래 전 주나라 시대의 봉건제를 재활용하겠다는 고조의 결심에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문제가 깊숙이 개재해 있었다. 개국에는 공신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을 배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마냥 우대하다가는 지방들이 분립하는 봉건시대로 되돌아갈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한 고조는 개국공신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성씨인 유(劉)씨 일가들도 함께 제후로 봉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차후 중앙 권력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온갖 구실을 붙여 공신 제후국들을 하나씩 제거했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금세 현실로 드러났다. 지방 관리의 임용이나 재정 등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던 제후들은 옛날처럼 독립국으로 행세하려 했다. 그래서 고조의 사후에 후임 황제들은 일가붙이인 동성(同姓) 제후국마저 억압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차츰 국가 권력은 자리를 잡아갔지만, 아직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한 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제였으며, 종국에는 한족 중심의 중화 세계마저도 바뀌게 하는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 홍문의 사건 홍문(鴻門)에서 유방이 살아남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중국 민족은 한족(漢族) 대신 초족(楚族)이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항우는 유방을 불러 연회장에서 살해하려 했다가 유방의 부하인 번쾌(樊噲)의 기지와 용맹, 충절에 감복해 그를 살려 보냈다. 그 장면을 되살린 게 위 그림이다. 왼쪽에 항우와 유방이 위, 아래로 앉아 있고 오른쪽 아래 서 있는 인물이 번쾌다.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전국시대를 거치며 초(楚)ㆍ오(吳)ㆍ월(越) 등 남중국의 이민족들도 중화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고, 때마침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서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세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원과 북중국에서 보기에는 오와 월보다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북방 민족들은 여전히 오랑캐로 배척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들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중원 세력이 일찌감치 그들을 배척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북방 민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 남중국 민족들은 중원의 질서를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고자 애썼지만, 북방 민족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생활 방식과 자주적이고 강인한 기질로 인해서 남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원의 선진 문화를 높이 평가했지만,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
중국 대륙이 분열기에 있을 무렵에는 북방 민족에 대한 견제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제국이 들어서자 그들은 갑자기 중원 문화에 최대의 적으로 변했다【이때부터 생겨난 전통으로,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예외 없이 개국 초 북변을 정리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때로는 그 여파가 한반도에까지 미쳤다. 7세기에 수와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며, 14세기 말 신생국 명이 당시 한반도의 신생국인 조선을 경계한 것도, 17세기 초 후금(청)이 대륙 정복을 눈앞에 두고 후방 다지기의 일환으로 조선을 정벌한 것도 맥락을 같이하는 사건들이다】. 이때부터 중국과 북방 민족 간에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고, 북방 민족들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늘 경계하고 경원(敬遠)하는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한대에 중화세계가 완성되면서 남방의 이민족들은 모두 ‘한족’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중화의 외부, 즉 비중화 세계의 ‘오랑캐’된 것이다.
당시 북방 민족들 가운데 최대의 세력을 떨친 민족은 흉노(匈奴)【흉(匈)은 오랑캐이고 노(奴)는 종이라는 뜻이니 결코 좋은 이름은 아니다. 물론 중국의 고대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였다. 바야흐로 중원 세력과 북방 세력, 중화와 비중화가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신흥제국 한이 안정을 찾아갈 즈음, 흉노 역시 묵돌선우(冒頓單于)라는 걸출한 영웅의 영도 아래 크게 발흥하는 중이었다【중국 역사서를 참고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한자 표기의 문제다. 예를 들어 묵돌선우(冒頓單于)라는 이름은 고대의 중국 역사가들이 한자로 표기한 것일 뿐 한자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 한자명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모돈단우’가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의 명칭을 표기할 때는 훈역보다는 음역, 즉 뜻보다는 발음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smith가 대장장이라는 뜻이라고 해서 Smith라는 서양 이름을 ‘대장장이’라고 옮기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冒頓單于라는 이름의 실제 발음은 당시 한자어의 발음이 어떠했는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경 사회의 수호자인 중원의 통일 제국과 유목 사회의 대표자인 북방의 흉노의 대치는 갈수록 첨예해졌다. 사실 개국 초기만 해도 한은 흉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흉노 정벌을 위해 대규모 부대를 동원했다가 묵돌선우의 책략에 빠져 하마터면 자신마저 포로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호되게 쓴맛을 본 고조는 어쩔 수 없이 외교 노선으로 전환해 흉노와 화친을 맺고 매년 흉노에게 대량의 조공을 보냈다. 명분상으로는 천하의 주인을 자처했으면서도 사실상 흉노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 화친을 위해 시집가는 왕소군 흉노와의 오랜 싸움으로 불안정했던 한나라는 평화와 안정이 필요했다. 이에 한은 흉노에 조공과 더불어 미녀도 바쳤는데, 대표적인 이가 왕소군이다. 그의 설화는 흉노와의 화친 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인으로 윤색되어 중국 고전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과연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후 6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출한 황제 한 무제(武帝) 때였다. 고조가 신생 제국 한의 명패를 올렸다면, 무제는 오랜 통치 기간(기원전 141 ~ 기원전 87) 동안 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비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한 군주였다.
우선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부터 제정했다. 역사상 첫 연호답게 그것은 ‘기원을 세우다’라는 뜻의 건원(建元)이었다. 그전까지는 제후국마다 각기 나름대로 해를 셈했으므로 혼란이 많았다.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이상 공동의 연호를 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의 의도는 그보다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나중에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도록 강요했다. 연호는 단일한 중국 문화권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문화권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중화적 자부심의 발로였다【우리나라에서도 고대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로 중국 문화권에 합류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역사서나 심지어 판소리에서도 해를 셈할 때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썼다】.
연호가 통일되니 자연히 역법(曆法)도 통일될 수밖에 없다. 무제는 태음력과 태양력을 합쳐 태초력(太初曆)을 만들었다. 원래 역법은 농경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이것도 무제는 연호처럼 주변국들에 중국의 것을 쓰도록 강요했다. 무제 이후로 역대 황제는 매년 달력을 만들어 주변국들에 하사하는 것을 전통으로 확립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따르면 하늘의 뜻, 천리를 받은 천자는 중국의 황제 한 명뿐이므로 아무나 함부로 달력을 만들 수는 없었다. 연호와 마찬가지로 역법도 중국 황제의 종주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기준은 군주ㆍ영토ㆍ백성 등 몇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흔히 경시되는 중요한 요소는 달력이다. 군대를 소집하고, 관료 회의를 열고, 심지어 왕의 생일이나 국가 기념일을 정하는 데도 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지금이야 누구나 달력을 쉽게 가질 수 있고 전 사회, 나아가 지구촌 대부분이 같은 달력을 쓰고 있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까다로운 역법을 알아야 만들 수 있는 데다 달력은 주권 국가의 상징이었으므로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 피와 땀을 흘리는 말 한 무게는 당시 서역에 ‘제비를 밟고 달린다’는 한혈마(汗血馬: 겨드랑이에서 피가 섞인 땀을 흘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나왔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말을 구하기 위해 원정대와 상인들을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동기들이 모여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건은 간쑤성에서 출토된 청동 한혈마다.
또한 무제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공식 선포했다. 제국이 탄생하고 60여 년이라는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에 걸맞은 사상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진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에 싫증을 느낀 지식인들이 법가에 도가 사상을 결합해 만든 황노(黃老, 말 그대로 황제와 노자의 사상을 결합했다는 뜻이다)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진의 경험에서 보듯이 법가 사상이 중앙집권적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가는 지나치게 독선적인 탓에 사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자동차는 배터리 전력의 힘으로 시동이 걸리지만 달릴 때는 다른 동력, 즉 휘발유의 힘을 사용한다. 시작할 때는 순간적인 에너지의 집중이 필요하므로 법가가 좋았으나 새 왕조가 출범한 뒤 정상 궤도로 돌입하면서부터는 법가처럼 인위적인 제도보다 뭔가 주나라 시대의 봉건 질서처럼 아름답고 몸에 맞는 자연스런 질서가 필요했다. 어디 그런 게 없을까?
답은 바로 유학이었다. 유학이라면 충과 효를 기본으로 하는 사상이다. 주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사회 질서를 대변하면서도 (당시로서는) 낡고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지 않은 신흥 학문, 바로 유학이 새 질서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상적 무기였다. 더구나 유학은, 공자(孔子)의 생애에서 보듯이, 원래 생겨날 때부터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사용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는 학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무제는 당시의 대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공자가 유학을 정치사상으로 확립하고 ‘구매자’를 찾아 나선 지 350여 년 만에 그의 꿈은 결실을 본 것이다. 이때부터 유학은 2000여 년 동안이나 동아시아 사회와 국제 질서의 이념적 뿌리로서 역할하게 된다.
▲ 제국의 건설자 한 무제 우리 역사에서는 한4군을 설치한 인물로 악명이 높지만 중국역사에서 한 무제는 진시황(秦始皇)이나 한 고조 유방(劉邦)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미약한 통일 제국 한을 일거에 강대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흉노를 물리치고 서역에까지 진출하는 등 탁월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유방이 통일 제국의 뼈대를 만들었다면, 한 무제는 거기에 살을 붙인 인물이다.
흉노 정벌의 도미노
한 무제는 내치에서 뒤늦게 국가 기틀을 만드느라 애썼지만, 정작 그의 야심은 바깥에 있었다. 바깥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이 튼튼할 수 없고, 바깥을 안정시키려면 정복과 복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대내적으로 분주한 상황에서도 대외 정복 사업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건국 이후 한을 괴롭혀온 흉노와의 대결이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단순히 방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멀리 고비 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정복을 지휘한 인물은 위청(衛靑)과 그의 조카인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흉노 정벌의 부산물로 무제는 바라던 것 이상의 큰 소득을 얻었다. 바로 서역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무제는 서역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흉노의 포로들에게서 서역을 알게 된 무제는 장건(張騫)에게 군사를 주어 서역으로 파견했다. 장건(張騫)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대월지(大月氏, 고대국가 박트리아)까지 가서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과 페르시아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장건이 개척한 동서 교통로는 이후 당 시대에 비단길(실크로드)이라는 중요한 무역로로 쓰이게 된다【】중국의 입장에서 ‘개척’된 것일 뿐 원래 비단길은 수천 년 전부터 현지 상인들이 이용하던 교역로였다. 그런데 당의 비단이 유럽 세계에 많이 수출되어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원래 흉노 정벌을 목적으로 시작된 무제의 팽창정책은 무제 자신까지 포함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가히 유라시아 전역이 연관된 변화였다. 중국 북방에서 밀려난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도미노 현상처럼 거대한 민족 대이동이 빚어진 것이다. 우선 흉노가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는 바람에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대월지의 부족들이 남쪽으로 밀려나 인도에서 쿠샨 왕조를 열었다. 또한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한 흉노의 한 갈래는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북부를 거쳐 중부 유럽까지 갔다. 당시 문명의 오지였던 중부 유럽의 게르만족은 그들을 훈족(Hun)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5세기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는 초기 유럽의 민담 속에 무시무시한 전설의 마왕으로 전해졌다).
흉노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은 서양 고대사에 일대 풍파를 가져온 민족대이동을 일으킨다. 4세기부터 이탈리아 북부의 게르만족은 로마 국경을 자주 넘었고, 결국 476년에는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게르만족의 다른 일파인 루마니아의 고트족은 동유럽의 끝에서 서유럽의 끝으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서고트 왕국을 건설했으며, 독일의 반달족은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넘어갔다. 중부 유럽에 눌러앉은 흉노의 일파인 마자르는 수백 년 뒤 헝가리를 건설하게 된다(Hungary의 어원은 바로 흉노의 Hun이다). 결국 한 무제의 흉노 정벌은 중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물론 당시 한 무제는 자신이 한 일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난적인 흉노를 물리쳤다는 게 중요했다. 그 뒤에도 무제는 팽창정책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는 월남을 복속시키고 동북 방면에서는 한반도를 공략했다. 당시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터를 잡고 있었다. 한에 대해 강경책으로 대응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적을 맞아 한껏 저항했지만 흉노마저 제압한 한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위만조선은 한에 의해 멸망하고 그 지역에는 네 개의 군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진번(眞蕃)ㆍ현도(玄菟)의 한4군(漢四郡)이다【한4군은 군이라는 이름만 보면 중국 내의 군현과 똑같았지만, 중국 본토가 아닌 주변 지역의 군현은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4군 가운데 세 곳은 얼마 안 가 랴오둥 지역으로 물러났고, 낙랑군만이 남아 있다가 313년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멸망했다. 그때는 이미 본체인 한이 멸망하고 100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인데, 한4군이 사실상 독립국의 위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곳만이 아니라 당시 무제는 변방 지역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키고 군을 설치한 다음 군대를 철수하는 전략을 즐겨 구사했다(한4군 이외에도 월남 지역에는 9군, 남서 지역에는 6군, 북서 지역에는 4군이 설치되었다).
점령지를 군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만들고 물러나는 전략은 둔전제(屯田制)라는 중요한 제도를 낳았다. 둔전은 말 그대로 군대가 주둔한 곳의 토지를 가리키는데, 처음에는 북서 방면의 변방을 수비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점령지의 경우에는 보급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병사들이 오래 주둔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제는 병사들과 함께 농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국경을 방어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과 군량을 자체 조달하도록 했다. 둔전의 생산물은 전량 군수물자로만 사용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둔전제는 이후 역대 왕조에서 변방을 수비하는 기본 방침으로 자리 잡는다(중국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고려와 조선에서도 둔전을 기본적인 국경 방어 체제로 이용했다)【사실 둔전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도시 국가 체제에서 영토 국가 체제로 발전한 데 따르는 필연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도시국가는 각 성곽을 중심으로 영토를 거느리는 점(點) 개념의 국가인 데 비해, 영토 국가는 선(線) 개념의 국가다. 그래서 도시 거점보다 성과 성, 도시와 도시를 잇는 영토의 개념이 중요해졌다】.
무제의 대외 정복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주변국들을 복속시켜 안정을 꾀했고, 동아시아는 물론 멀리 서역에까지 제국의 위명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돈이 많이 드는 게임이었다. 정복에는 막대한 군비가 지출되었다. 군대가 한 번 원정을 떠났다 하면 몇 달씩 걸리는 데다 부대 편성도 대규모였다. 이에 비하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열국이 벌인 전쟁은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정복 전쟁이 오래 지속되자 국가 재정은 금세 바닥나버렸다.
어떻게든 재원을 마련해야 했던 무제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재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농민들에게서 지나치게 많이 거두어들이면 자칫 농업 사회의 근본이 뒤흔들릴 수도 있을뿐더러, 사실 농민들이 가진 것이라고 해봐야 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국시대부터 상당한 부를 쌓은 상인 계층에게서 갹출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무제는 묘안을 생각해낸다. 상인들이 돈을 버는 품목은 바로 소금과 철이다. 그래서 무제는 소금과 철의 민간 유통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전매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물론 소금과 철의 유통으로 부유해진 상인들에게서 이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둘 수도 있었지만, 국가가 독점한다면 그 수익은 세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제는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물류’를 도맡았다. 우선 균수법(均輸法)을 시행해 상인들 대신 정부가 직접 물품의 구입과 운송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를 위주로 했는데, 이 정도라면 오늘날의 조달청 업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일반 물품까지 취급했다. 이 때문에 물자 보급이 원활치 못해 물가가 상승하자 이번에는 물가 안정을 위해 평준법(平準法)을 시행했다. 외견상으로 이 조치들은 국가가 상인의 이익을 빼앗은 것에 해당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치와 행정에 이어 경제마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 흉노의 병사들 후대에 한족 중심의 역사가 주로 전해진 탓에 북방의 이민족들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는 동안 그들도 꾸준히 발전했다. 한대 초기만 해도 북방의 흉노는 한의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했다. 그러나 한 무제의 공략으로 흉노는 중국에서 힘을 잃고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민족대이동은 유라시아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이렇듯 강력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갖추었다면 한 제국은 오랫동안 존속하고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한은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나라다. 그러나 한은 무제의 지배 시절이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제국이 왜 일찌감치 퇴조기에 접어들었을까?
초기의 권력기관은 앞에서 말한 3공 가운데 우두머리인 승상이 관할하는 승상부(丞相府)였다. 그러나 무제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인데다 대외 정복 사업이라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명제가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승상부는 위축되었고 모든 것이 황제의 전권에 맡겨졌다. 하지만 거대한 통일 제국을 황제 혼자서 일일이 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제는 실무를 담당할 행정 기구를 측근에 두었는데, 이것이 내조(內朝)였다. 원래 내조는 한 초기에 어린 황제들이 연속 등장할 무렵에 중앙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당시에는 실권이 별로 없었다가 무제 시절부터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조를 담당하는 인물들이 황제를 어떻게 ‘내조(內助)’하는가에 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커지고 할 일이 많아졌으므로 실무자급의 관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그래서 일찍이 무제는 인재가 부족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것이 훗날 과거제도로 발달한다). 아직 실무를 담당할 만한 직업 관료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 내조가 그 일을 맡을 수밖에 없다. 내조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하는 중요한 역할이므로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인물들로 채워야 한다. 황제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들이라면 가족이다. 그렇다면 황족일까? 아니다. 바로 외척이다. 천자는 세상에 단 한 명이기 때문에 직계가족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 소수의 황족을 제외하면 황제와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처가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내조는 주로 외척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무제처럼 명철한 판단력과 강력한 권위를 가진 군주라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다 해도 후대에도 걸출한 황제들이 계속 배출될 수 있을까? 이 우려는 금세 사실로 드러나고 만다. 무제 이후 권한이 커진 내조는 승상부를 누르고 최고의 권력기관이 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황제의 외척이라고 해서 꼭 현명하고 유능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더구나 무제의 사후 한의 황제들은 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외척들의 입김이 더욱 거세다. 이리하여 내조 정치는 곧바로 외척 정치가 된다.
이러한 외척 정치는 마침내 제국의 숨통마저 끊어버린다. 우선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8∼기원전 33) 이후부터는 왕씨 가문이 누대에 걸쳐 외척으로 실권을 잡는다. 급기야 그 집안의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이라는 자는 어린 황제를 제멋대로 옹립하고 시스로 가황제(假皇帝)라고 자칭하기에 이른다. 8년에 가황제는 마침내 ‘진황제’가 된다. 왕망은 교활하게도 요순시대 선양의 형식을 빌려 어린 황제에게서 황위를 빼앗고, 국호마저 신(新)으로 바꾼다. 명칭 그대로 새 나라를 건국한 셈이다.
유씨 황실을 왕씨 황실로 바꾸자 이제 전국이 다시 빈 도화지가 된다. 여기에 왕망은 마음껏 그림을 그린다. ‘새 나라’답게 ‘신나게’ 과감한 개혁 조치를 연달아 시행한 것이다. 화폐제도를 개선하는가 하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그간 농민들을 괴롭혀온 대토지 독점을 막는다. 빈민 구제에 힘쓰고, 균수법과 평균법을 본받아 상공업 개혁도 실시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 치우친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얼치기로 만든 새 왕조는 그의 부실한 개혁조차 지탱해줄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외척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심지어 나라까지 빼앗는 것을 본 유씨 황실은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한 데 힘입어 23년에 나라를 되찾았다. 다시 유씨가 황족이 되었고 왕망(王莽)이 통치한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한 제국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의 것을 전한, 뒤의 것을 후한이라 부른다(전한의 수도는 장안, 후한의 수도는 그 동쪽인 뤄양이었기 때문에 각각 서한과 동한이라고도 한다).
역사적인 역사서 사마천(왼쪽)은 한 무제의 미움을 사 거세의 형벌인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20년에 걸쳐 고대 중국 최고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오른쪽)를 완성했다. 『사기』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표(表), 서(書)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이후 기전체(紀傳體)라는 형식으로 정립되어 중국 공식 역사서의 편찬 방식이 된다(12세기에 간행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기전체로 되어 있다). 삼황오제의 전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역사 등은 대부분 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외척과 환관의 악순환
후한은 시기적으로만 전한과 구분될 뿐 권력 구조와 각종 제도 등은 전한 시대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답습했다. 이는 곧 전한시대의 문제점들이 후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왕망(王莽) 같은 모리배(謀利輩)조차 개혁을 구상했을 정도라면 다시 복귀한 제국 정부가 당장 개혁에 착수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과제는 제국을 재건하고 왕망 시대의 후유증을 치유한 후한의 첫 황제인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 정권의 몫이었다.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관료 정치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한 무기는 역시 유학이었다. 후한 초기의 황제들이 유학을 적극 장려한 덕분에 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속에서 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겨나고 토론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당시 유학의 발달에 기폭제가 된 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대립이었다. 지금의 문학과 옛 문학의 갈등은 사실 한 제국 초기부터 있었던 문제다.
일찍이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 사건으로 유가의 경전과 주석서 들은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한 무제가 유학을 국학으로 공인하자 당장 그 문제가 시급해졌다.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장려하려는 학문의 교과서들이 없는 것이다. 마침 다행스런 점은 진(秦)의 통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학 경전들의 내용을 재구성해 새로이 학문으로 정립했는데, 이것이 금문학이다. 그런데 아무리 국가적으로 서적들을 소각하고 폐기했다 해도 각 가정의 장롱 속에 고이 간직되어온 문헌들까지 일일이 찾아내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시황의 폭압이 지나고 유학이 공인되자 민간에서는 옛날의 경전과 주석서 들을 주섬주섬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것을 금문학과 대비시켜 고문학이라고 불렀다.
전한 시대에는 무제 시절에 집대성된 금문학이 주로 연구되었으므로 고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기간 동안 학설을 정비하고 체계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후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학이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되자 고문학파는 금문학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광무제 시대까지만 해도 고문학을 배척하고 금문학을 장려한 덕분에 금문학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사본이 원본을 따를 수는 없는 법, 점차 고문학의 학문적 성과가 금문학을 능가하게 되었다. 후한의 중기를 넘어서면서부터는 고문학이 확고한 우위를 점했으며, 옛것과 새것을 두루 연구하고 섭렵한 통유(通儒)들도 출현했다. 이렇게 학파 간의 대립과 토론이 활발해지면서 유학은 점점 깊이를 더해갔다.
이대로 별 탈 없이 진행되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유학(儒學)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관료 집단이 형성되었을 터이다. 원래 유학은 치국과 평천하를 목표로 삼은 데서 보듯이 현실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 학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한의 현실 정치는 그렇게 평온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유학 세력이 장차 국가를 운영할 힘을 축적하는 동안 현실의 정치 구도는 다시 부패하기 시작했다.
▲ 후한의 ‘무제’ 중국 역대 왕조들의 역사는 건국 초기에 영명한 군주가 등장했다가 점차 무능한 군주가 들어서면서 부패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신생국이나 다름없는 후한을 성장시킨 인물 역시 첫 황제인 광무제다. 그는 전한의 한 무제에 비견되는 역할을 했으나 인물됨은 전혀 달라 온유하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호족 세력들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아우르고 통합하는 정책을 구사해 일종의 제휴 권력을 유지했다.
2세기 초반부터 나이 어린 황제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전한을 멸망시킨 바오밥 나무에 대한 경계심도 점차 엷어졌다. 외척 정치가 부활한 것이다. 나이 어린 황제는 섭정을 필요로 했고, 섭정은 자연히 외척이 도맡았다. 하지만 여기서 전한과는 다른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어릴 때 즉위한 황제는 나이가 들면서 친정(親政)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당시 발달한 유학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척의 힘을 물리치려면 황제의 개인적 세력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왕당파(王黨派)가 있어야 한다. 외척이 아니면서 외척만큼 의지할 수 있는 세력, 황제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환관(宦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답일지언정 정답은 아니었다. 외척은 밀어낼 수 있었으나 환관이 그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이 허점을 노리고 권좌에서 물러난 외척이 다시 환관을 밀어내고 권좌에 복귀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후한 말기에 들어서는 외척 정치와 환관 정치가 맞교대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환관 정치는 일찍이 춘추시대 제 환공(齊 桓公)의 시대에도 있었고, 진 제국의 환관 조고(趙高)도 승상의 지위까지 올라 전횡을 일삼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환관 정치의 시작은 후한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후한의 정치적 환경은 전한 시대와는 달랐다. 우선 유학 세력이 있었다. 유학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은 이미 비판적인 시각을 충분히 갖추고 현실 정치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외척ㆍ환관 정치의 부패상을 목격한 그들은 강력한 반정부 여론을 형성하고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이것을 청렴한 의견, 즉 청의(淸議)라고 부른다. 수도 뤄양만 해도 3만여 명의 유학자들이 있었던 데다 유학은 그 원리상 향촌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학문이었으니, 당시 유학 세력의 반발은 전국적인 양상을 띠었다. 당연히 환관들은 황제를 움직여 유학 세력을 탄압하고 나섰다. 그들은 두 차례에 걸쳐 유학자들을 유배시키거나 옥에 가두거나 심지어 사형시키는 혹독한 탄압 정책으로 맞섰다. 일단 이 대결은 환관 측의 승리로 끝났고, 유생들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의 패배는 아직 정치 세력화될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래서 정부 시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지식인 운동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들과 달리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수권(受權)’ 능력, 즉 군대를 갖춘 세력도 있었다. 바로 지방호족들이었다.
▲ 오늘날의 뤄양 후한의 수도인 뤄양의 오늘날 시가지 모습이다. 현재 개발 공사가 한창인데, 공사 현장에서 후한 시대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또다시 분열의 시대로
후한은 처음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역시 황족이긴 했으나 원래부터 황위 계승권자인 게 아니라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이처럼 후한 시대에는 한 황실의 일족이나 옛 전국시대 명문가의 자손, 전직 고위 관리,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호 등이 지방 호족으로 각지에 군림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
호족은 전한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이 성장할 만한 여건이 좋았다. 철제 농구가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관개시설이 확대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하고 황무지도 많이 개간되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로운 통일 제국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계급 분화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대토지 소유자가 대거 출현했다. 이들은 농민에게서 토지를 사들여 겸병하거나 황무지를 대규모로 개간해 토지를 더욱 늘려갔다. 이렇게 해서 늘어난 토지는 더러 노비들을 시켜 경작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하호(下戶)라고 부르는 가작인(假作人, 당시에는 토지를 빌려주는 것을 假라고 했다)에게 맡겼다. 이것이 소작농의 시작이다. 하지만 말이 소작이지 소작인들은 지주에게 거의 예속되어 있어 노비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신분이었다. 게다가 하호들은 주로 몰락한 농민이나 유랑민, 빈민들이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기 몸뚱이밖에 없는 처지였다.
대토지 소유자들이 그냥 토지를 많이 가진 대지주에 그쳤다면 굳이 호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경유착은 오늘날만의 부패 현상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면 그것으로 부를 얻고 싶고, 부를 가지면 그것으로 권력을 사고 싶게 마련이다. 지방에서 경제적인 실권자가 된 대지주들은 차차 정치적인 영향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중앙집권제 아래 묶여 있다. 하더라도 중앙정부가 전국 각 지방을 일률적인 정도로 통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거의 독립국이었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제후국들의 역사적 경험도 있다.
옛날의 제후라, 좋지! 당시 제후국들은 각국을 떠돌던 책략가나 지식인들을 받아들여 인재로 삼았다지 않은가? 호족들은 그런 선례를 본받아 집 안에 수많은 식객을 거느리고, 이들의 지식과 재능, 그리고 힘을 자신의 두뇌와 손발로 활용했다. 또한 호족들은 다른 지역의 호족과 통혼하거나 여러 가지 경제적 관계를 맺어 긴밀한 유대의 그물을 형성했다. 자연히 지방의 행정조직이나 관료들은 호족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커진 지방의 호족들은 점차 본격적인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문벌 귀족으로 발전해갔다. 호족에 뿌리를 둔 이 신흥 귀족들은 마침내 400년간 군림해온 한 제국의 문을 닫고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새 시대의 문을 열고자 했다.
부패한 외척ㆍ환관 정치에 호족들의 등쌀이 더해지고, 게다가 그 영향으로 탐관오리들이 들끓게 되자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져갔다. 강력한 시황제의 진 제국도 진승과 오광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면서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보다 훨씬 오래 존속한 한 제국의 말기도 비슷했다. 후한 중기부터 치솟던 농민들의 분노는 이윽고 184년에 대규모로 터져 나왔다.
이번의 농민 반란은 진승과 오광의 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선 중국 전역에서 36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농민이 일제히 봉기한 것은 규모로 보나 조직력에서 보나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노란 깃발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린 이 반란군은 장각(張角)을 우두머리로 삼고 치밀한 모의 끝에 거사한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황건 반란군은 정신적ㆍ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후한 중기부터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짐에 따라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황노 사상이 만연했다. 이것은 점차 황노 신앙으로 바뀌어 종교적인 색채를 강렬하게 띠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를 토대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 교에 가입할 때 쌀 다섯 말을 바친 데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라는 종교 교단이 형성되었다(사회 엘리트 = 유가, 일반 민중 = 도가의 공식은 10세기 넘어서까지도 기본 구도였다).
당시 한의 정권은 외척이 잡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조직적이고 이념적이고 강력한 반란군을 맞아 외척 정권은 총력을 기울여 대항했다. 우두머리인 장각이 죽자 황건의 난의 주류는 어느 정도 진압되었으나, 그 불길은 작은 불씨로 변해 오히려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지방 호족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사병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던 데다, 황건의 난에 맞서기 위해 중앙정부는 지방 호족들의 군사 활동을 허락하고 장려한 터였다. 이제 비축된 힘을 가지고 실력 행사에 나설 때다.
호족들은 앞다투어 군비를 확장하고 자기 영지의 방어에 나섰다. 환경이 맞으면 방어는 쉽게 공세로 전환된다. 얼마 안 가 호족들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처럼 각자 나라를 세우고 독립국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호족들에게 자체 경비를 권장할 정도로 허약해진 중앙정부는 더 이상 통일 제국을 이끌어갈 힘이 없었다. 220년 후한 황실은 지방 호족 출신의 신흥 귀족인 위(魏)나라의 문제(文帝)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나라를 넘기고 말았다. 이로써 최초의 통일 제국인 한은 410년의 사직(왕망 시대 제외)을 뒤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 분열 속의 발전
『삼국지』의 막후에는
후한 말기 황건적(黃巾賊)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각 지방을 할거(割據)한 호족들의 세력 판도는 한동안 매우 혼란스러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분할과 정립의 구도가 고착되었다. ‘정립(鼎立)’의 ‘정(鼎)’이란 원래 세 발 달린 솥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의 세 발은 위(魏)ㆍ오(吳)ㆍ촉(蜀)의 삼국인데, 이들이 벌인 60여 년간의 전쟁이 소설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진수(陳壽)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와는 다른 책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같다】의 소재가 되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세력 판도에서도 선두를 달린 주자는 후한의 무관 출신인 조조(曹操, 155~220)가 세운 북중국의 위나라였다. 조조의 가문은 후한의 정치를 쥐고 흔든 환관이었다. 그 반면 촉한(蜀漢)의 유비(劉備, 161~223)는 황실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남중국 내륙의 형주(荊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실 유비가 황실의 후예라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당시 호족들 가운데 유씨는 흔한 성씨였다. 한 고조 유방(劉邦) 시절부터 공이 신하들, 심지어 투항해온 북방 민족의 수장들에게까지 유씨 성을 하사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손권(孫權, 182~252)은 옛날 전국시대의 강국인 오나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양쯔강 이남의 옛 오나라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조가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졌다면, 강남의 곡창지대에 있는 손권은 경제적으로 풍요한 상황이었다. 요컨대 삼국은 당대의 실력자(魏), 적통(嫡統)의 상속자(蜀漢), 전통의 계승자(吳)라는 신분으로 맞선 셈이다.
이런 식의 대립에서는 으레 적통과 전통보다는 현실적인 힘이 말하게 마련이다. 삼국 정립기의 기본 구도는 오와 촉한이 힘을 합쳐 위의 남하에 맞서는 형세였다. 조조의 위는 일찌감치 후한의 헌제(獻帝)를 끼고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각지의 호족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화북 전역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조조는 꿈꾸던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고, 그가 죽은 해인 220년 그의 아들 조비(曹丕, 187~226)가 헌제를 핍박해 후한의 문을 닫고 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촉한은 명신인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도움으로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치고 명맥을 유지하지만, 결국 263년에 위에 병합되고 말았다. 손권의 오는 조금 더 버티다 280년에 위(魏)의 뒤를 이은 진(晋)에 의해 멸망했다.
소설 『삼국지』는 이 과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그 막후에 있다. 삼국 정립기는 전란으로 얼룩진 시대였으나 그와 동시에 여러 가지 내외적 개혁과 쇄신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삼국이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부국강병에 힘썼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ㆍ한 시대의 경험에서 노출된 모순이 해결되고 새로운 통일을 위한 토대가 조성되었다.
특히 삼국 중 가장 강성했던 위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각종 개혁을 단행했다. 새로운 관리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 병역제도인 병호제(兵戶制), 세금 제도인 호조제(戶調制) 등 본격적인 국가 체계의 골격이 모두 이 무렵에 만들어졌고, 둔전제(屯田制)도 새로이 정비되었다.
후한 시대는 외척과 환관이 중앙 정치를 주무르고, 호족이 지방행정을 좀먹은 탓에 늘 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 그러나 인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많은 편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후한 중기에 발언권을 높였다가 정권의 철퇴를 받고 한 발 물러난 유학 세력은 그 뒤로도 계속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발전해 상당한 인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인재를 어떻게 하면 적절히 발탁하고 중용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정책이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다. 이 제도는 각 군마다 중정이라는 인재 발탁요원을 배치해 관내의 인재를 아홉 가지 등급에 따라 분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재가 필요할 경우에는 그 등급을 참고로 임용할 수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는 긴 전란기였으므로 병력의 장기적인 공급이 중요했다. 종전까지 전통적인 병역제도는 백성을 징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전란이 잦아 백성들의 이동이 심한 데다 호족들이 마음대로 유민들을 흡수해버린 탓에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사태를 시정하기 위해 조조가 도입한 병호제(兵戶制)는 병역을 대상자 개인이 아닌 그 가족 전체에게 맡기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도망치면 아들에게, 형이 도망치면 아우에게 병역이 계승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연좌제보다 심한 악법이었으나 당시에는 합리적인 개선이었다. 그전에는 일반 백성들 전부가 평생 동안 병역의 의무를 지고 국가의 부름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징발되었지만, 병호제가 시행되면서 병역 대상자가 확정되었고, 시기도 대충 예측이 가능해졌다. 물론 국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국가 상비군’을 마련할 수 있어 대만족이었다.
▲ 『삼국지』 중국 역대 왕조에서는 새로 들어선 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사진은 위 오촉 삼국 정립기의 역사를 다룬 서진의 진수가 지은 『삼국지』의 일부다. 소설 『삼국지』는 후대인 원대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연의』다. 역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소설보다 역사서 『삼국지』다. 이 책에는 한반도 고대사에 관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 고대사에도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留記)』와 『신집(新集)』,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 등이 있었다고 하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
특히 중요한 것은 둔전제(屯田制)였다. 이 제도는 한 무제가 처음 도입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변방에서 군사적 목적으로만 사용했을 뿐이고 전국적으로 폭넓게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의 위나라였다. 병호제(兵戶制)처럼 이것도 역시 전란기였기에 가능한 제도였다. 잦은 전란으로 주인 없는 토지가 늘어난 게 문제였다. 자칫하면 또다시 후한 시대처럼 호족들이 겸병해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조는 호족을 대신해 국가가 그 토지를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주인 없는 토지나 새 개간지가 생기면 국가가 유민이나 가난한 농민들을 모집해 경작하게 하고 조세를 받는 것이다(국가가 지주로서 소작료를 받는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둔전민은 군 태수의 지배 아래 놓이지 않고 국가의 직접 관리를 받았으므로 국가 재원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둔전제는 위가 진으로 바뀌면서 폐지되지만, 나중에 고대의 가장 혁신적인 토지제도인 균전제(均田制)의 모태가 된다. 그리고 호조제 역시 전통적인 인두세(人頭稅) 대신 호(戶)를 단위로 세금을 부과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이후 조세제도가 발달하는 계기가 된다.
그 밖에 삼국시대에는 대외적인 팽창도 이루어졌다. 분열기에 팽창이라면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삼국의 경쟁적인 부국강병책에 힘입어 중화 세계는 전체적으로 더욱 넓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방의 오나라가 삼국 가운데 당당히 한몫을 차지함으로써 양쯔 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중화 문화권에 편입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강역상으로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그 지역도 중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한 제국 시절 내내 중원과 거리를 두고 겉도는 처지였다. 더 남쪽의 산월(山越) 때문에 마음 놓고 위의 남하에 맞서지 못한 오나라는 50여 년이나 걸려 간신히 산월을 제압했으며, 이후 해외로 진출해 대만을 손에 넣고 멀리 인도 지역과도 수교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삼국시대에 뒤이은 남북조시대에는 강남 지역이 처음으로 중국 역사의 주 무대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위의 동북 방면 공략으로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된 것은 우리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덕분에 역사책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 고대 한반도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위와 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촉한도 양쯔강 상류의 쓰촨(四川), 윈난(雲南), 구이저우(貴州) 등지를 복속시켜 강역의 확대에 기여했다.
▲ 둔전제의 고향 삼국 정립기는 전란의 시대였으나 여러 가지 정책이 실험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둔전제다. 사진은 조조가 196년 최초로 둔전제를 실시했던 광대한 허도(許都)의 모습이다. 당시는 백성들이 이 넓은 땅을 버리고 유민이 될 정도로 난세였다.
고대의 강남 개발
권력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위는 삼국을 통일하고도 오래가지 못했다. 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으로 한 제국의 뒤를 이었지만, 한 황실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실력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힘센 자가 나올 경우 위나라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강적 촉한을 물리치는 데 빛나는 공을 세운 호족 가문인 사마씨가 곧 그 실력자로 떠올랐다. 과연 그 가문의 사마염(司馬炎, 236~290)은 265년 위의 원제(元帝)에게서 다시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진(晋)을 세우고 초대 황제 무제(武帝)가 되었다.
춘추시대의 옛 제후국들 가운데도 서열 1위를 자랑하는 진이라는 국호를 재활용했다면 사마염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최대 문제는 정통성의 확립이었다. 진 무제는 애초에 없는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일가붙이들을 한꺼번에 제후로 봉했는데, 이게 엄청난 무리수였다. 정통성이라면 내가 근본 없는 황실과 다를 게 뭐냐? 신참 제후들은 자기 영지를 제멋대로 운영하고 아예 독립국으로 행세했다. 건국자인 무제가 죽자 그들은 즉각 ‘팔왕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후들이 10년 넘도록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눈들이 있었다. 어느새 중원의 맞수로 떠오른 북방 민족들이었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구도에서 북방 민족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한족으로 규정하고 한 제국이 세워진 이래, 북방 민족들은 오랑캐이자 한족의 영원한 적이 되었다. 한 무제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이들은 수백 년 동안 힘을 키워왔다. 4세기 초반 북방 민족들 중 강성했던 흉노와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의 다섯 민족을 중국 역사서에서는 5호(五胡, 다섯 오랑캐)라고 부른다. 이 5호는 삼국시대 60여 년간 위나라에 다소 눌렸으나 이제는 중원이 예전 같지 못하다. 이들은 차츰 자신감을 회복하고 호시탐탐 중원을 노린다.
중원 진출의 계기는 엉뚱하게도 ‘초청’의 형식이었다. 팔왕의 난을 일으킨 진의 어느 제후가 흉노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친다)의 전략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은 안방을 적에게 내준 격이었다. 흉노의 지도자 유연(劉淵)【한 고조의 화친책으로 당시 흉노는 한 황실과 통혼해 중국 황실의 성인 유씨를 가지게 되었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와 진을 접수하고 한 제국의 뒤를 이었노라고 선포한다. 316년 진 황실은 속절없이 흉노 앞에 무릎을 꿇고 50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 사건은 최초로 북방의 이민족에게 중원을 내준 계기였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흐름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흉노에 뒤이어 북방 민족들은 본격적으로 중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위(北魏)가 화북을 통일하는 439년까지 100여 년 동안 서로 다투면서 10여 개의 나라를 세운다. 다섯 오랑캐가 모두 열여섯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이 시기를 5호16국 시대라고 부른다.
한편 흉노에게 멸망당한 진의 귀족과 백성 들은 이듬해인 317년 강남으로 건너가 오나라의 도읍이었던 건업(建業, 지금의 난징)을 수도로 삼고 새 나라를 열었다. 뒤이어 중원이 북방 민족들의 놀이터가 되자 중원의 명문 세가와 호족 들도 속속 남하해 새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역사서는 이때부터의 진을 동진(東晋)이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진을 서진(西晋)으로 기록한다.
동진은 일찍이 삼국시대의 오나라가 닦아놓은 터전을 밑천 삼아 본격적으로 강남 개발에 착수했다. 양쯔강 이남은 원래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진ㆍ한 시대부터 원시적 농업을 해왔을 뿐 물을 이용한 선진적인 관개농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북에서 내려온 호족들은 이러한 유리한 환경에다 선진 농경 기술과 함께 데려온 이주민의 노동력을 결합시켜 습지와 호수만 즐비하던 강남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었다.
기술은 새것이라도 옛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토지가 늘어나자 호족들은 중원에서처럼 다시 토지 겸병에 나섰다. 그나마 이 경우에는 남의 토지를 빼앗는 게 아니라 새로 개척한 토지를 차지하는 것이므로 비교적 ‘건전한 토지 겸병’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 위에 중원의 선진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강남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중원에 필적할 만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동진은 지배층이 항상 불안정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주민 출신인 북방 귀족층과 오나라 이후 거의 토착민이 된 남방 귀족층은 수시로 대립했다(물론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뒤진 남방 귀족들이 대체로 눌려 지냈다). 게다가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생겨난 문제도 있었다. 화북을 장악하고 있는 이민족 국가들이 걸핏하면 남침해온 것이다.
휴전 상황에서는 자연히 군인의 입김이 세어지는 법이다. 끊임없는 남침 위협에 시달리자 동진 북부 국경의 요충지에 터전을 가진 군벌들의 발언권이 점차 강화되었다. 결국 이들이 황권(皇權)에 도전하는 일까지 터졌다. 진 한 시대부터 왕조의 말기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농민 반란이 때마침 일어나자 반란의 진압을 구실로 환현(桓玄)이라는 군벌이 제위를 찬탈했다.
The winner takes it all(이긴 이가 모든 것을 다 가지지)! 사랑을 묘사한 이 노래 제목은 그대로 난세의 법칙이 된다. 힘센 자가 최고라면 환현이 권력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은 적다. 이윽고 북방 군벌 휘하에서 여러 차례 무공을 세운 바 있는 무장인 유유(劉裕, 363~422)가 반란들을 모조리 진압하고, 420년에 진 황실의 선양을 받아 송(宋)을 건국한다(더 유명한 송 제국은 훨씬 후대인 10세기에 건국되는데, 중국 역사에서는 이처럼 국호가 반복되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 중원을 노리는 민족들 중원이 분열되고 약해지면서 수백 년간 눌려 지내온 북방 민족들이 기지개를 켰다. 삼국 정립기에 위의 통제를 받은 그들은 중원에 진(晋)이라는 약한 통일 국가가 들어서자 중원을 넘보기 시작했다.
따로 또 같이
남중국의 주인이 송으로 귀착될 때까지 북중국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중원에 진출한 북방 민족들은 유연(劉淵)이 한(漢)을 부활시킨 것을 필두로 전통적인 국호들을 총동원해 나라를 세웠다. 조(趙)ㆍ연(燕)ㆍ진(秦)ㆍ진(晋) 등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유명한 국호들이 부활했고, 심지어 삼대에 속하는 하(夏)까지 등장했다. 이 10여 개의 나라들을 ‘원조들’과 구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국호 앞에 전(前)ㆍ후(後)ㆍ동(東)ㆍ서(西)ㆍ남(南)ㆍ북(北) 등의 접두사를 붙였다(이를테면 後趙, 南燕, 前秦, 東晋 하는 식이다).
역사에는 통합과 분열의 시기가 교대하게 마련이지만 중국의 분열기는 특이한 데가 있다. 로마 제국 이후 분권화의 길을 걸은 유럽과 달리 중국 역사에서 분열은 늘 통일을 지향했다. 100년이 넘도록 여러 나라가 쟁패하는 난립상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통일의 기운은 서서히 무르익었다. 일단 전진(前秦)이 잠시 중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여세를 몰아 동진마저 통일하려던 전진은 비수(淝水)라는 곳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당한다. 그러자 전진의 휘하에 있던 부족들이 독립하면서 한꺼번에 일곱 나라가 생겨난다. 분열기에서도 가장 격심한 분열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후 약 50여 년간 분열이 이어진 끝에 마침내 439년 선비족의 척발(拓跋)씨가 세운 북위가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합했다.
드디어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왕조는 아니라 해도 남중국과 북중국에 각기 통일 왕조가 들어섰다. 이때부터 약 150년 동안 중국은 중원의 북위와 강남의 송이 공존하는 남북조(南北朝)시대를 겪게 된다. 하지만 북부와 남부가 내내 완벽한 통일을 이루었던 것은 아니다. 화북에서는 북위ㆍ동위ㆍ서위ㆍ북제(北齊)ㆍ북주(北周)의 다섯 나라, 강남에서는 송ㆍ제(齊)ㆍ양(梁)ㆍ진(陳)의 네 나라가 교대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예전의 극심한 분열기에 비해 안정된 바탕에서 역사가 전개되고 시대적 성격도 비슷하기 때문에 한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
중국 대륙이 남과 북으로 갈린 만큼 남북조시대에는 두 역사가 어느 정도 별개로 진행된다. 개략적으로 보면 북조에서는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중요하고 남조에서는 문화적 변화가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북부의 이민족 정권들은 5호16국 시대부터 기본적으로 한화(漢化), 즉 중국화 정책을 추구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물리력에서만 앞설 뿐 문화적으로는 중원의 한족 문화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지배층은 중원을 차지한 참에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농경 사회에 합류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중원에 입성하자 곧바로 부족제를 포기하고 유목민 부락을 해산한 것은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은 손에 쥐더라도 관료 행정에는 한족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민족 정권들은 한족 출신의 명문가를 정치와 행정에 참여시켜, 각종 관료제와 율령을 맡기고 조세 정책을 입안하게 했다. 특히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는 도읍을 한족 왕조들의 전통적인 수도인 뤄양으로 옮기고, 자기 성마저 중국식의 원(元)씨로 바꾸었다. 나아가 그는 복식과 제도, 의식, 풍습 등도 중국식으로 개혁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한화 정책은 이후 북조의 다른 나라들에도 이어졌으며, 더 긴 호흡으로 보면 수백 년 뒤에 등장하는 몽골족 정권(원)과 만주족 정권(청)으로 계승된다.
효문제가 한족 관료들을 시켜 만들게 한 정책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균전제(均田制)다. 485년에 한족 관료인 이안세(李安世)의 건의로 처음 시행된 균전제는 사실상 최초의 토지제도였다. 예전에도 토지제도가 없지는 않았으나 거의 다 제도라기보다는 원시적 관행에 가까웠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토지만이 아니라 농민들까지도 제후들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처음으로 도시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영토적 개념의 국가를 형성한 진 한 시대에는 미개간지도 워낙 많았고 토지의 소유 관계가 확고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중요했던 것은 토지보다 토지 생산물의 소유 여부였으므로 토지제도보다 지방 호족들에 의한 소작제도가 발달했다. 그러다 삼국시대에 들어 중국의 영토는 처음으로 ‘꽉 찬 느낌’을 주게 되었다. 그래서 앞서 본 것처럼 위나라의 조조는 후한 시대의 소작제도를 이용해 국가가 토지를 직접 운영하는 방식의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했다. 그 이후 여러 왕조는 위의 둔전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둔전제는 원래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토지를 사용하는 제도였다. 다만 지방 호족들이 소유한 토지는 건드리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토지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영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다. 위나라와 달리 화북의 통일 제국인 북위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국가 수입의 확대가 절실히 필요했으므로 둔전제를 보완하고 세분화해 균전제(均田制)를 만들었다.
균전제(均田制)는 토지 국유와 급전(給田)을 기본 개념으로 하는 제도다. 쉽게 말해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국가가 토지를 농민들에게 지급하고 경작시켜 일정한 비율의 세금을 받는 방식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제도지만 원래 제도란 처음 고안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제후들, 진ㆍ한 시대의 호족들을 토지 소유자로 당연시했던 당시로서는 국가가 토지의 주인이라는 발상은 무척 획기적이었다. 균전제를 시행하게 되자 국가는 단기적으로 전란 때문에 유민이 된 농민들을 정착시킬 수 있었고,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균전제는 이후 들어설 수ㆍ당 같은 통일 제국에 전승되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 윈강 석굴의 내부 ‘오랑캐’ 선비족이 세운 나라라고 해서 북위의 문화 수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당시 북방 민족들은 사실상 중원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북위 시대에 건축된 윈강(雲岡) 석굴의 불상들을 보면 당시 예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하기 1000년 전에 동양에서는 이런 웅장한 ‘천장 조각’이 제작되었다.
문화의 르네상스
남조의 네 나라(송ㆍ제ㆍ양ㆍ진)는 평균 수명이 40여 년밖에 안 된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나라는 전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군사력도 북조의 이민족 국가들보다 약했다. 그러나 중원의 호족과 지식인 들이 이민족 치하를 피해 대거 남하하면서 강남 지역의 귀족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처음으로 강남에 중원을 능가하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우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의 오(吳)와 동진(東晋), 그리고 남조(南趙)의 네 나라를 합쳐 보통 6조(六朝)라고 부른다. 이 6조시대에 남중국에서 발달한 귀족 문화(6조 문화)는 동양의 르네상스로 불릴 만큼 다채롭고 화려했다(시대로보면 서양의 르네상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니까 오히려 르네상스를 ‘서양의 6조시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와 경제, 제도와 문물 같은 것들은 사회생활을 통해 집단적으로 생성되지만, 예술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인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발달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6조시대는 예술이 숙성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6조 사회는 귀족 사회였다. 대중이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로 참여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근대 이후의 일이므로 고대에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려면 아무래도 귀족 중심의 사회여야만 했다.
6조시대에는 짧은 기간에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했던 만큼 황제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심지어 전통적인 명문 세기의 지위는 황제라 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렇게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문벌 귀족 사회가 정착된 덕분에, 예술적 자질을 타고난 개인은 마음껏 자신의 예술적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예술 역시 교회와 귀족들의 재정적 후원을 바탕으로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물론 개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귀족에게만 허용된 값비싼 취미였다. 당시의 귀족들은 자기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 데다 강남 지역 특유의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풍광에 사로잡혀 사뭇 탐미적인 자세로 예술을 추구했다. 수많은 문장가와 화가가 출현해 창작과 비평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그때까지 전인미답의 분야였던 예술 이론을 확립했다.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王羲之), 회화의 사조인 고개지(顧愷之),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예술가들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학 평론서로 꼽히는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도 이 무렵에 탄생했다. 6조시대에 확립된 문학과 예술의 기본 골격은 이후 당 제국에 계승되어 당을 중국 시문학의 최고봉으로 올려놓는 데 기여했다.
▲ 6조문화의 진수 문화는 안정기보다 분열기에 더욱 발달하게 마련이다. 고대 중국의 르네상스를 이룬 고개지의 그림(위)과 왕희지의 글씨(「난정서」, 아래)다.
이 시대의 문화 현상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상의 발달이다. 한 제국의 지도 이념이었던 유가 사상은 고문학과 금문학의 대립을 통해 큰 발달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유가의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허식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유가 사상은 원리상으로 현실 정치와 깊은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 점은 남북조시대의 분방한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마찰을 빚었다(개인주의의 측면에서 보면 6조시대의 문화는 이후까지 통틀어 가장 서양 문화와 가까웠을 것이다). 더욱이 후한 말기에 유학자들이 현실 정치의 참여를 위해 국가 권력에 도전했다 패배의 쓴잔을 맛본 경험은 지식인들의 좌절을 가져왔다.
유가에 대한 반발로 성행한 것은 도가, 즉 노장(老莊) 사상이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를 원조로 하는 도가 사상은 유가처럼 국가를 중심으로 보지 않고 개인을 위주로 여긴다는 점에서 6조 귀족들의 체질에 잘 맞았다. 또한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전란이 잦은 시대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어지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도가 사상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청담(淸談) 사상이라고 불렀는데, 그 한 예가 유명한 죽림칠현(竹林七賢)【완적(阮籍) · 혜강(嵆康) · 산도(山濤) · 상수(向秀) · 유령(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 등 7인】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도가 사상은 오로지 현실 도피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주로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게다가 사회가 차츰 안정되어가면서 유희적이고 탐미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두드러져 본격적인 사상으로 성숙되지는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후한 말기의 태평도와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의 교단으로서 면모를 갖춘 도가 사상의 한 갈래가 있었다. 동진의 갈홍(葛洪)은 이 도교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확립했으며, 북위에서는 이것을 정식 국교로 채택했다.
또 한 가지 이 시대의 중요한 사상적 변화는 불교가 도입된 것이다. 불교는 후한 중기에 서역에서 전래되었는데, 당시의 귀족들은 노장 사상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도가적인 관점에서 불교를 보았다. 이를테면 불교의 ‘공(空)’을 도가의 ‘무(無)’로 이해하는 식이다. 그 덕분에 초기 불교는 노장적인 성격이 짙었으나 불교는 적어도 도가보다는 체계화와 조직화의 가능성이 컸다. 즉 교단화할 수 있었던 게 장점이다. 그 덕분에 불교는 점차 노장사상을 누르고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교리상으로도 불교는 도가보다 친사회적이었다. 무엇보다 노장사상에서는 소극적인 현실 도피 외에 달리 실행할 교리가 없었지만, 불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바로 윤회와 업의 개념이다. 현실 도피라는 수단은 현세에만 적용될 뿐이지만, 불교의 윤회와 업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를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교의 도입으로 중국인들은 처음으로 육신만이 아닌 영혼과 영원의 문제를 고찰하게 되었다. 불교는 동진 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이어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서는 귀족만이 아니라 서민의 마음속에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한편 이민족들의 북조 사회에서는 불교의 호국적인 측면이 유목민족 출신 지배층의 호응을 얻어 정책적으로 장려되었다. 또한 불교가 융성하자 중국의 불교는 이 시기에 동방의 한반도로도 전래되는데, 남북조시대인 만큼 그 길도 두 가지였다. 371년에는 북조의 전진이 한반도 북부의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고, 384년에는 남조의 동진이 백제에 전했다. 신라에는 한참 뒤인 528년에 고구려에서 불교가 전해졌다.
3.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
중국 역대 왕조는 망할 무렵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 외적의 침입이나 농민의 반란과 같은 말기적 증상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의 부패와 대토지 겸병 같은 사회적 모순이 수백 년씩 덧쌓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모순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의 귀족 양견(楊堅, 541~604)이 새로운 통일 제국 수(隋)를 세우는 과정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넣어 외척 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제위를 양도받아 581년에 손쉽게 수 제국을 세웠다(5호16국이나 남북조시대의 여느 나라들처럼 춘추전국시대 유명 제후국들에서 국호를 따오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혹시 양견은 새로운 통일이라는 점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589년에는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陳)을 함락시켜 마침내 370년 만에 중국 대륙을 재통일했다.
그러나 수(隋) 제국은 40년도 채 못 가 당(唐) 제국으로 교체된다. 어쩌면 그렇게 800년 전의 진ㆍ한 교체기와 똑같을까? 오랜 분열기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뒤이은 새 제국들(한과 당)의 예고편 노릇밖에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시황(秦始皇)의 제국과 양견의 제국은 정확히 닮은꼴이다. 더욱이 비슷한 점은 두 나라 모두 죽 쒀서 남 준 격으로, 짧은 존속 기간 동안에 통일 제국의 터전을 잘 닦아놓고 나서 나라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진과 수가 크게 고장 난 자동차의 시동을 애써 다시 걸어놓았다면, 한과 당은 그 덕분에 평탄대로를 신나게 달린 셈이 되었다.
옛날의 진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대륙을 통일한 수 제국도 맨땅에서 시작하는 자세로 모든 제도를 재정비하거나 새로 갖추어야 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통일 제국에 어울리는 행정제도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구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우선 진ㆍ한 시대의 전통적 중앙 관제인 3공 9경을 3성 6부(三省六部)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각 부서의 이름만 약간씩 바뀌면서 당 제국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또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가 난립하다 보니 각 지방에는 행정 관청만 잔뜩 늘어났다. 신생국은 늘 ‘작은 정부’를 주창하게 마련이다. 수 문제는 공무원을 감축하기 위해 한 제국의 군현제(郡縣制)부터 유지되어오던 주(州), 군(郡), 현(縣)의 지방 행정제도에서 군을 없애고 주와 현만 남겨놓았다. 또 지방 수령이 가지고 있던 관리 임명권과 병권을 중앙 정부로 회수했다. 이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통일 제국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절반은 달성했다.
▲ 수 문제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진시황 이래 두 번째로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수 문제 양견의 모습이다. 그러나 수 제국은 400년 만에 이룬 천하통일을 불과 40년 만에 당 제국에 내주면서 진시황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관료제를 완성하려면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해야 한다. 종래의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위나라가 도입한 9품 중정제는 그 핵심인 중정이 부패한 인물일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많은 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귀족 세력은 9품 중정제를 악용해 세력을 키우고 관직을 기의 독점한 터였다. 귀족의 그런 전횡을 막으면서 더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관리 임용 제도는 없는 걸까? 고민 끝에 절묘한 답이 나왔다. 바로 과거제였다.
관리 후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고득점자를 관리로 선발하면 된다. 귀족의 자의적인 관리 임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 점수는 객관적이므로 누구도 합리성을 의심할 수 없다. 당대에는 관리 임용 제도로서의 의미가 컸지만, 과거제는 이후 필답고사로 필요한 인력을 선발하는 동양 특유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의 대학입시, 각종 고시, 입사 시험과 승진 시험 등 시험과 관련된 모든 제도는 과거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과거제가 과연 겉으로 표방한 취지만큼 합리적인 제도인지는 이미 출범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의문시되었다).
587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과거제(科擧制)는 다른 제도들처럼 후속 왕조인 당 제국 시절에 꽃을 피웠으며, 이후 20세기 초 청 제국 말기까지 1500년 동안이나 중국의 기본적인 관리 임용 제도가 된다【관리 임용 제도는 대개 왕권 강화를 위해 실시되는 게 보통이다. 중국에서처럼 한반도에서도 그랬다. 우리 역사에서 9품 중정제와 비슷한 것으로는 788년에 신라의 원성왕이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있다. 또 과거제는 958년 고려의 광종이 중국의 예를 좇아 처음 도입했다.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원성왕과 고려의 광종 모두 왕권 강화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점이 신라의 원성왕은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광종은 고려 초 치열한 왕자의 난을 치르고 즉위했다】. 이와 같은 수의 관제와 과거제 이외에 남북조시대의 균전제(均田制)와 부병제(府兵制) 등도 모두 당 제국에 그대로 이어졌다.
▲ 과거 시험장 수 문제가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제(科擧制)는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관리 임용 제도가 되었다(한반도에서도 고려 초에 광종이 처음 도입했다). 그림은 과거제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송대의 과거 시험장의 광경이다.
과거의 진 제국을 연상시키는 또 한 가지 닮은꼴은 대운하의 건설이다. 진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건국자인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煬帝)는 옛날의 진시황(秦始皇)처럼 여러 가지 대형 토목 사업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진의 만리장성에 해당하는 업적이 대운하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서쪽에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드는 세 개의 큰 강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황허(黃海), 화이허(淮河), 양쯔강(揚子江)의 세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큰 강이므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선박을 이용한 운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남북 방향의 운송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단점을 해소하려 한 것이 바로 대운하였다.
남조와 북조로 분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통일 제국이 들어섰으니, 수 양제로서는 강남과 화북을 잇는 교통로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610년에 완공된 대운하 덕분에 항저우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선박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쌀을 비롯한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화북으로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북조시대에 각개 발전을 통해 성장해왔던 강남과 강북이 이제 대운하로 이어졌으니 명실상부한 통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는 위업은 대개 백성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하므로 당대에는 욕을 많이 얻어먹게 마련이다. 오늘날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과 여산릉 등은 당대의 무수한 인명을 희생하고 재원을 탕진한 결과로 완성되었다. 물론 당대에는 문화유산으로 기획된 게 아니라 현실적인 용도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대운하는 물자 유통을 편리하게 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훨씬 실용도가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그 이익이 실현된 것은 당 제국 때였다는 점이다. 수 제국은 대운하 건설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특히 양제는 개인적으로도 비운을 맞았다.
오랜만의 통일로 중국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수 양제에게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중국의 분열기에 힘을 쌓고, 강성해진 북방의 ‘오랑캐’였다. 중원의 북방에는 한 무제 이래 오랜 토벌과 동화 정책으로 흉노가 사라진 대신 돌궐(突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국자 수 문제는 탁월한 이간책을 구사해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킨 바 있었다【흉노의 경우도 그랬듯이, 수 제국이 돌궐을 압박한 것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규모 민족이동을 낳았다. 서돌궐은 옛 흉노처럼 비단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로 가서 그곳의 작은 나라들을 짓밟았다. 게다가 명칭도 돌궐에서 음차되어 튀르크(Türk: 오늘날 터키의 어원)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튀르크는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 융화되어 족장의 이름에 따라 셀주크, 오스만 같은 명칭을 달게 되었다. 14세기부터 강성해진 오스만튀르크는 1453년에 서쪽 동유럽의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을 정복했다. 1000년 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과정과 비슷하다. 결국 한족 제국(한과 수)의 압박 정책, 한 무제와 수 문제의 북변 정리는 수백 년 뒤 멀리 두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도미노 효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누구도 기획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역사에는 이처럼 어떤 행위가 무의식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돌궐보다 조금 더 변방에는 그들보다 더 막강한 상대가 있었다. 한반도의 대표 주자인 고구려다.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한창이던 4세기 초반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수가 통일하는 6세기 말에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호령하는 강국이 되었다(한반도의 고대 삼국이 크게 발전한 것은 당시 중국이 분열기에 있었던 덕분이 크다). 수 문제는 한 차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포기했지만, 야심만만한 양제는 고구려를 복속시켜 명실상부한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마음 먹는다.
그 불타는 야심에 기름을 끼얹어준 게 바로 대운하였다. 지금까지 고구려 정벌을 어렵게 하는 최대의 문제점은 보급로였는데, 이제 대운하가 해결해주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침내 양제는 611년 전투군 113만 명에 함선 300척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나섰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고대사상 최대의 국제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보급로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던 양제의 의도와는 달리 수군은 고구려의 뛰어난 유격전술(그중 유명한 것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다)에 말려 참패하고 만다.
복수심에 불탄 양제는 이후에도 재차 3차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지만, 대규모 토목 사업에다 전쟁 준비로 민심이 등을 돌리고 각지에서 무수한 반란들이 일어나면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양제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부하의 손에 피살되고 만 것이다. 결국 그의 업적인 대운하는 신생제국 수의 명운과 아울러 그 자신의 목숨까지 재촉하는 결과를 빚었다.
진시황(秦始皇)과 수 양제, 만리장성과 대운하, 의도하지 않게 엄청난 역사적 결과를 낳은 북변 정리. 이렇듯 역사는 가혹하게 되풀이된다. 진 한 교체기와의 마지막 닮은꼴은 곧이어 새 제국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혼란스런 와중에 변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수의 장수 이연(李淵, 566~635)은 드디어 거사에 나서 수의 도읍인 장안을 점령하고 당 제국을 세웠다.
▲ 강국 고구려 후한의 몰락 이후 중국 대륙의 오랜 분열기를 틈타 한반도에도 강력한 고대국가가 생겨났다. 그림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로, 4세기경 낙랑을 몰아내고 한반도의 패자가 된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중국의 통일 제국 수와 당은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천하통일을 이루기 전에 고구려의 호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수ㆍ당 시대는 진 한 시대와 비슷한 출발을 보였으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국가의 성립은 수ㆍ당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진ㆍ한 제국은 다분히 봉건적 질서에 의존한 반면, 수ㆍ당 제국은 처음으로 율령(律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율령이란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데, 수 제국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당 제국 때는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이연은 수 양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반란 세력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3성 6부와 어사대(감찰 및 사법), 구시(九侍, 제사 주관), 감(監, 황실의 교육 담당) 등 중앙 행정 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핵심 관료 기구인 3성의 활동을 보면 당 제국이 이전의 국가들보다 훨씬 발달한 관료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전문 관료들로 구성된 중서성(中書省)에서 각종 정책과 제도, 황제의 명령 등을 입안해 제출하면 전통의 귀족들로 구성된 문하성(門下省)에서 그것을 심의해 가부를 결정한다. 여기서 통과된 정책은 상서성(尙書省)으로 넘어가 상서성 소속의 6부를 통해 시행에 부친다. 이처럼 통치 행위가 훨씬 전문화되었고, 황제와 귀족층의 합의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
이렇게 전문화되고 방대해진 관료 기구라면 예전처럼 황제의 명령만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그래서 법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율령이었다. 고조의 뒤를 이은 당 태종(太宗, 598~649)은 수문제의 개황율령(開皇律令)과 고조의 무덕율령(武德律令)을 참고해 정관율령격식(貞觀律令格式)을 만드는데, 이것으로 당 제국은 최초의 율령 국가로 발돋움한다(율령의 이름들은 모두 해당 황제의 연호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율은 형법이고, 령은 행정법, 격은 율령을 개정할 때 추가되는 법규, 식은 시행세칙에 해당한다.
신생국을 반석에 앉힌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시절 23년간은 ‘정관(貞觀)의 치’라고 불리는 번영기였다. 그는 내치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당의 강역을 크게 넓혔다. 우선 아직 잠재적 위협 요소로 남아 있던 북쪽의 돌궐을 마저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탕구트와 고창국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당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일대, 오늘날의 파키스탄까지 확장되었다. 이 정복 사업의 부산물이 바로 서역 교류다.
일찍이 한 무제 시절 서역에 파견된 장건(張騫)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비단길은 당 제국 때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동서 문화의 교류에 기여한다. 당의 전성기에 수도인 장안에는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리는 서역인들이 무수히 드나들었으며, 귀족들의 집에서는 서역풍의 요리가 크게 유행했다. 당시 장안은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국제 도시였다. 이처럼 국제 문화에 익숙한 분위기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도 크게 진작되어 천태종과 화엄종, 삼론종, 법상종, 정토종, 진언종, 그리고 달마(達磨)의 선종까지 각종 종파가 범람했으며, 이들 종파는 대부분 종단화되어 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 태종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다. 수 제국 때부터 중국의 숙제로 남아 있던 고구려 정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정복은커녕 그는 644년의 고구려 원정에서 안시성 주인 양만춘(楊萬春)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물러나고 말았으며, 화살에 맞아 한쪽 눈까지 실명하는 비극을 당했다. 이 원한은 그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 푼다. 당 고종은 고구려와 직접 맞붙지 않고 우회 전략으로 전환해 신라와 손을 잡고 동맹국 백제부터 공략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마침내 667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한족 왕조의 동북아시아 제패를 끝까지 사수한 최종 수비수였던 고구려는 역사의 지도에서 지워졌다(고구려의 저항을 끝으로 한반도는 이후 1200년간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고구려가 무너짐으로써 당 제국은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으며, 동쪽으로 한반도, 남쪽으로 월남,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북쪽으로 몽골에 이르는 방대한 중화 세계를 구축하고 그 중심이 되었다【일본의 경우는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역사를 출발했으나, 한반도에 친일본 세력인백제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중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관계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동안 중국의 당과 교류를 지속했지만 한반도와 달리 중화 세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살펴보는 일본사에서 그런 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 당과 조선의 이씨 부자 실제로도 부자간에 이렇게 닮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왼쪽은 당의 건국자 이연(李淵, 고조)이고 오른쪽은 그의 아들인 이세민(태종)이다. 당을 건국한 이씨 부자는 공교롭게도 800년 뒤 한반도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씨 부자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두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 ‘왕자의 난’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연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은 황태자로 책봉된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아버지에게서 황위를 물려받는다. 이세민과 이방원은 둘 다 골육상잔의 권력투쟁 끝에 건국자가 살아 있는 동안 권력을 강제로 양위받는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일뿐더러 우연이겠지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마저 같다. 형제를 살해한 당 태종과 조선 태종은 다행히 재위 시절 뛰어난 치적을 보였다.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아무리 관료제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천자라는 별칭(別稱)처럼 하늘에 이르는 것이었다【르네상스를 거치며 종교적ㆍ정신적 굴레를 벗고서야 비로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체제인 절대왕정이 탄생하는 서양 역사와 달리, 이미 고대부터 합리적인 관료제와 절대적인 황권이 공존한 중국의 역사는 서구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수수께끼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아버지가 이룩한 성과를 이어받아 과업을 마무리했을 뿐 개인적으로는 병약하고 무기력한 인물이었다.
신생국의 중앙 권력이 미흡하다면 아무래도 문제다. 이때 고종의 총애를 받아 권력자로 나선 인물은 놀랍게도 무조(武曌)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었다. 후궁의 신분으로 실권을 장악한 그 여성은 바로 역사에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로 기록된 측천무후(則天武后)다.
사실 무후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고종의 아버지인 당 태종의 후궁으로 황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태종이 죽을 무렵 그녀는 이미 아들 고종의 애첩이 되어 있었다【어린 나이에 후궁이 되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후궁을 아들이 물려받은 것은 황궁에서도 유학(儒學) 이념이 확고히 뿌리 내리지는 않았음을 반증한다. 유학이 중화 제국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된 지 수백 년이 지났어도 아직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강고한 성리학 국가로 알려진 조선도 초기에는 항렬의 관념조차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수양대군은 동생이자 정적인 안평대군이 숙모와 놀아났다는 나쁜 소문을 퍼뜨린 바 있는데, 설령 무고라고 해도 궁중에서 그런 소문을 조작할 정도라면 유학(儒學)이 궁중에서도 생활 윤리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고종에게는 황후가 따로 있었지만 황제의 애정을 잃은 황후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무후는 곧 그 껍데기를 폐위시키고 황후가 되어 황제 대신 국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30년 가까이 허수아비 황제로 살아가던 고종이 죽었을 때 무후는 제위를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아들들을 내세워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의 두 황제로 삼았다가 이내 폐위해버리고, 690년에는 드디어 직접 제위에 올랐다.
여제가 이상하다면 아예 나라를 바꿔주마. 제위에 오른 무후는 대담하게도 신성황제(神聖皇帝)라고 자칭하면서 국호를 주(周)로 바꾸었다(여기서도 주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들의 이상향이자 영원한 고향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도 부르는데, 제위를 잠시 찬탈한 것일 뿐 실제로 혁명적인 성격은 없었다.
측천무후의 지배는 15년간에 불과했다. 705년에는 아들 중종이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다시 황제로 복귀하면서 무후의 정치 실험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비해 그녀의 치세는 이후의 권력 구조에 상당히 의미심장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측천무후로 인해 관롱(關隴) 집단이 몰락했다는 점이다. 관롱 집단이란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일대의 귀족 집단을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오랜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한족화된 선비족의 귀족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와 당의 건국자인 양견(楊堅)과 이연(李淵), 나아가 두 나라의 개국공신 세력도 대부분 관롱 집단의 소속이었다. 개국한 지도 한참 되는 마당에 개국공신이라니, 눈에 거슬리는 그들을 측천무후가 가만 놓아둘 리 없다. 무후는 그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자신의 무씨 일가를 중용하는데(무후가 유달리 과거제에 집착한 이유도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두 번째 후유증이 생긴다. 바로 외척 세력의 성장이다. 무씨 일가 자체는 중종이 복위하면서 몰락했지만, 이를 계기로 외척 권력이 당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한 제국이 멸망한 것도 외척과 환관 정치가 주요 원인이었는데, 당 제국도 비슷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측천무후 시대의 직접적 후유증은 무후를 폐위시키고 복위한 중종 대에 벌써 드러난다. 그것도 바로 전의 폐해를 그대로 답습한다. 무후의 며느리이자 중종의 황후인 위(韋)씨가 정치에 관여하다 남편까지 독살한 다음 권력을 장악하고 일가붙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녀도 시어머니처럼 아예 제위를 차지해버릴까 고려하던 중 예종의 아들 이융기(李隆基)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복위시킨다. 그렇게 태자의 지위를 되찾은 이융기는 2년 뒤 아버지가 죽자 제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당의 6대 황제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다.
▲ 최초의 여제 한 고조 시절 고조의 황후인 여태후가 세도를 부린 일이 있었지만, 정식 여제로는 당의 측천무후가 최초다. 온갖 치장에 화려한 옷을 입고 환관들의 보좌를 받으며 걷는 측천무후의 얼굴에서 첫 여제로서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녀가 50년 동안이나 권력을 잡은 탓에 이후 제국의 권력 구조는 크게 변하게 된다.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태종이 ‘정관의 치’를 펼쳤다면, 현종의 치세는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외척 정치를 직접 깨부수고 황제가 된 현종은 당연히 외척과 환관을 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일까?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인륜을 저버리는 게 당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탓일까? 치세 40년 가까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원래 양국충과 사이가 좋지 않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은 양국충이 재상으로 전권을 장악하자 그것을 구실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안녹산의 부하 사사명(史思明)에게 이어졌고, 9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이것을 두 사람의 성을 따 안사(安史)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군이 장안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쓰촨까지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훗날 시성(詩聖)으로 추앙 받은 두보(杜甫)는 안사의 난으로 고생하는 전국 각지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시로 전해주었다.
그러나 두보가 묘사한 백성들의 고통은 안사의 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한 안사의 난도 안녹산과 양국충의 갈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정한 원인은 당 제국이 때 이르게 노쇠해가고 붕괴의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현종 치하의 개원의 치는 제국의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기의 시작이었다.
▲ 양귀비 서양의 클레오파트라에 해당하는 동양의 미녀인 양귀비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영웅들과 사귀었으나 양귀비는 시아버지인 현종과 불륜의 사랑을 나눈 대가로 현종의 사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국충이 중용된 것은 측천무후 시절에 외척 세력과 전통의 관롱 귀족이 무너지고 힘의 공백이 생긴 데도 원인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기는 대토지 겸병이 성행하면서 농민들이 몰락하는 것이었다. 무릇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항상 토지가 남아돌게 마련이다. 이전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새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기쯤 되면 새로 분급할 토지가 사라진다. 미개간지를 개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나라 살림은 갈수록 커진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넘기고, 그 토지를 부패한 지방 관리나 대토지 소유자 들이 사들이거나 빼앗아 겸병한다. 중기에 든 당 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관리의 횡포와 상업 자본, 고리대 자본의 압박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빈궁해졌다. 게다가 관료 기구가 팽창하고 변방에서 전란이 끊임없는 데다 황실의 사치까지 겹쳐 국가 재정도 메말라갔다.
당의 토지제도인 균전제(均田制)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고 국가에서 조세를 걷는 방식이다. 따라서 농민들이 주어진 토지를 제대로 경작해야만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나아지고 국가 재정도 튼튼해진다.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토지에서 이탈해버리면 모든 게 어긋날 수밖에 없다. 현종 대에 이르러 그런 현상이 대폭 증가했다. 균전제가 붕괴하는 것은 균전제에 뿌리를 둔 모든 제도가 무너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선 국가의 기틀인 국가 재정과 국방이 흔들린다. 균전제는 토지와 농민을 하나로 묶어 조세와 병역을 부담시키는 것이므로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 앞에서 본 일본의 조용조 제도는 당의 것을 모방했다)나 병역제도인 부병제(府兵制)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판이니 국가에서 조용조를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당장에 큰일은 나라를 지킬 병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균전제(均田制)를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해졌다. 제멋대로 소유권이 이전된 토지를 개국 초기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봐도 고육지책이지만, 결국 정부에서는 조세제도와 병역제도를 개선해서 버티기로 작정했다.
▲ 성인과 신선 당의 시문학은 오늘날까지도 고금을 통틀어 최고 수준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위쪽은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이고, 아래쪽은 시선(詩仙) 이백(李白)이다. 이백은 호방하고 낭만적인 시를 쓴 반면, 개인적으로 안사의 난 때문에 존경을 겪은 두보는 사회성이 짙은 시편을 많이 남겼다.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는 사회적 혼란이 두보 작품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우선 세금 제도에서는 조용조(租庸調)를 버리고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했다. 기본적인 골격은 토지를 부과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1년에 두 차례 징세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세’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 취지는 두 가지다. 첫째, 조용조는 먹을 것[租]과 입을 것[調], 그리고 국가사업이 있을 때 노동력을 부리는 것을 뜻하므로 모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이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고 다변화됨에 따라 농민만이 아니라 상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백성도 많아졌다. 조용조를 고집하면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방법이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게 양세법이다. 둘째, 토지가 거의 사유화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토지 소유가 엄존하고 있는 마당에 애초에 농민들에게 분급한 토지를 기준으로 세액을 매길 수는 없다. 그보다는 토지 소유자에게 재산세를 물리는 편이 낫다. 이리하여 양세법은 모든 세금을 토지 기준으로 단일화하고(조용조 제도에서는 정식 세금인 조용조 외에 잡세로 불리는 기타 세금들이 많았다), 이것을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내도록 했다. 6월에는 호세(戶稅), 11월에는 지세(地稅)를 받았는데, 백성들의 토지와 재산 소유 여부에 따라 세액을 매기고 현물 대신 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조용조(租庸調)가 전근대적 세제라면 양세법(兩稅法)은 고대에 성립되었어도 근대식 세제에 해당한다. 조용조는 토지의 사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양세법은 사적 토지 소유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양세법은 수명도 길어 20세기 중반 중국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환골탈태할 때까지 시행되었다. 하지만 현물 대신 화폐로 납부하는 방식은 화폐경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늘 실패했다. 명대의 은납제(銀納制)는 당의 양세법(兩稅法)보다 600년이나 뒤에 시행되었는데도 실패했다】.
양세법을 시행한 결과 정부는 농민 외에 상인이나 유통업, 숙박업자들에게서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토지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서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기틀이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법이다. 양세법도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조용조보다는 분명히 진일보한 세제였지만 더 나빠진 점도 있었다. 조용조(租庸調)의 경우에는 분급한 토지에 따라 세액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양세법의 경우에는 과세의 표준이 없었다. 양세법을 유지하려면 정확한 토지조사를 수시로 해야 하는데, 힘을 잃어가는 당 조정으로서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원래 중국에서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왕토 사상(王土思想)의 이념에 따라 나라의 모든 것이 왕의 소유였다. 토지 생산물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나 토지에서 소작료를 거두는 지주의 몫이지만, 토지 자체는 근본적으로 국가, 즉 천자의 것이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소유권의 양도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소유권의 개념 자체도 희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는 양세법(兩稅法)은 현실적으로 말끔하게 적용되기 어려웠다.
부패한 지방관들은 양세법이 도입되자 더욱 심하게 농간을 부려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한 화폐로 세금을 내는 금납제(金納制, 은납제와 같은 의미다)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곡물과 베를 수확하고 나서도 그것을 돈으로 바꿔 세금을 내야 했다. 물건을 팔아 돈을 사는 격이었으니, 과정에서도 농민들은 큰 손해를 보았다.
새로운 세금 제도가 좌초한 것과 더불어 병역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부병제(府兵制)는 원래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본으로 하는 징병제다. 즉 변방의 농민들에게 다른 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농한기에 군사 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해버리면 부병제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부병제의 가혹한 부담으로 인해 도망치는 농민들도 많았으니 뭐가 원인이고 뭐가 결과인지 모를 일이다).
병역 의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상비군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병역제도는 점차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와 직업군인 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종의 용병이므로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게 마련이다. 당 초기에는 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지만,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그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더 강력한 경비 체제로 절도사를 두었다. 당시 변방에서 절도사는 군사권만이 아니라 행정권과 재정권도 지니고 있어 왕이나 다름없었다. 모병된 병사들은 절도사의 사병(私兵)으로 전락했다. 안녹산이 손쉽게 장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병 조직을 거느린 절도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반란에 더욱 예민해진 정부는 변방에 둔 절도사를 국내 요지에 두루 배치했는데, 이들은 정부의 의도를 거슬러 번진이라는 군벌로 성장했다. 결국 훗날에 당은 이들 번진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당 제국이 실시한 조용조(租庸調)와 부병제(府兵制)는 한반도와 일본에도 도입되었다(그런 점에서도 당은 중화 세계의 기틀을 이룬 제국이다). 조용조는 신라시대에 도입되어 조선에도 존속했으며, 부병제는 고려가 채택했다. 일본은 앞에서 본 것처럼 중화 세계에 속했던 7세기 중반에 다이카 개신으로 중국의 문물을 전면 모방하면서 조용조를 시행했다. 다만 일본은 국가 통일을 16세기에나 이루었으므로 부병제(府兵制)는 시행할 수 없었다】.
이렇듯 사회경제가 무너지자 더 이상 율령 정치도 불가능해졌다. 당 제국을 있게 한 율령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치 현실은 더욱 혼탁해졌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외척과 환관은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인 정치 불안 요소였다. 측천무후와 위씨 황후의 몰락을 계기로 외척 세력은 잡았다 싶더니 이번에는 환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원래 환관은 개국 초부터 황실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던 집단이었는데, 현종 때부터는 직접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안사의 난에서 교훈을 얻은 후대의 황제들은 절도사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감군사(監軍使)를 보내 그들을 감독했는데, 환관들이 주로 그 업무를 맡았다. 이래저래 환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당 말기인 9세기에 이르면 환관들의 세력은 황제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환관들은 자신들을 제어하려 한 황제 두 명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세력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 다음부터는 자기들끼리 다투게 마련이다. 이윽고 환관들은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당쟁을 벌였다. 9세기 초반의 덕종(德宗) 이후 당 제국이 문을 닫는 907년까지 100년 동안 열한 명의 황제들 중 한 명만 제외하고는 전부 환관들이 옹립했다. 환관의 시험을 거쳐 제위에 올랐다고 해서 이 황제들을 ‘문생천자(門生天子)’라고 부를 정도였다(문생이란 과거에 갓 급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천자가 졸지에 환관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 절도사의 세상 당 중대에 절도사들의 배치 상황이다. 중앙이 튼튼하다면 아주 좋은 수비 형태겠지만, 안사의 난 이후 중앙 정부가 힘을 잃은 사정에 비추어보면, 절도사들이 국경을 수비게 아니라 오히려 중원을 둘러싼 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절도사들은 점차 번진으로 성장했고, 가장 힘센 절도사가 당 제국을 접수했다.
쓰러지는 세계 제국
균전제(均田制)의 붕괴로 뿌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중앙에서는 환관, 지방에서는 절도사의 전횡이 나날이 심해지자 당 제국은 이제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사실상 당은 이 무렵(9세기 초반)에 무너졌어야 하는데, 그나마 양세법(兩稅法)과 환관들의 당쟁이 멸망을 지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당 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후 중화 제국들의 원형이었다. 각종 법과 제도도 그렇지만 붕괴하는 과정도 그랬다. 개국 초기에는 너무도 완벽했던 제국이 쓰러지는 과정은 이후 중국 역대 왕조들에서 자주 보게 되는 전형적인 드라마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믿었던 양세법마저 약효를 잃자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재정을 늘리려는 일념에서 지극히 단기적인 처방을 내세웠다. 이를테면 소금의 전매를 강화하는 조치다. 소금 전매는 일찍이 한 무제의 ‘전매’특허였다. 1000년 전의 낡은 미봉책을 다시 꺼내 쓸 만큼 당은 말기 암 환자 같은 처지였다. 물론 그때도 듣지 않던 약이 이제 와서 들을 리는 만무하다.
소금을 전매한다는 방침에 소금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간당간당하던 당의 체력에 결정타를 가한 반란은 황소(黃巢)라는 소금 장수가 일으킨 난리였다. 황소는 과거에 낙방하자 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으로 소금 판매에 뛰어들었다. 국가 전매 품목을 사적으로 거래한다면 당연히 암시장이고 밀매다. 이 소금 밀매업에서 생긴 전국적 비밀 조직망은 황소의 거사에 긴요한 역할을 했다. 황소의 난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순식간에 맹위를 떨쳤다. 반란군은 장안으로 황소처럼 밀고 들어갔다. 소금 장사꾼에서 일약 제위를 차지한 황소는 국호와 연호도 새로 정했다.
그러나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질 게 없다고 생각하는 절도사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난리를 피해 달아난 황제가 도움을 요청하자 절도사 이극용(李克用)은 군대를 몰고 와서 황소의 세력을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자는 바로 황소 휘하에 있다가 투항한 주전충(朱全忠)이었다. 이극용이 공을 믿고 발언권을 내세우지 않을까 두려워한 정부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하책을 구상했다. 주전충을 절도사로 임명해 그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예상대로 신ㆍ구 절도사들은 서로 맞대결을 벌였다. 여기서 승리한 주전충은 내친 김에 황궁으로 쳐들어가 환관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 환관의 문하생인 허수아비 황제는 주전충에게 제위를 ‘선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은 허망하게 멸망했으나, 그래도 (짧은 기간 존속한 진과 수를 제외하면) 역사상 두 번째 중화 제국이었으므로 그 역사적 의의는 작지 않다. 실제로 당은 첫 번째 제국인 한을 상당히 업그레이드했다. 한 제국이 동북아시아 고대 질서의 주춧돌을 마련했다면, 당 제국은 그 위에 기둥과 벽, 지붕을 얹어 웅장한 건축물로 완성했다. 한이 영토적ㆍ정치적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다면, 당은 거기에 정신적ㆍ문화적 지배를 추가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붕괴의 후유증도 컸다. 중국을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으로 만든 당이 멸망함으로써 고대의 질서는 일단락되었다. 이제부터 동북아시아는 예전에 없던 새로운 국제 질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 장안을 점령한 황소 소금 장수 출신의 황소가 일으킨 반란은 쇠락하는 제국에 치명타를 가했다. 부하들이 둘러멘 수레를 타고 수도 장안에 입성하는 황소 앞에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린다. 안사의 난 시절에 현종이 쓰촨까지 피난을 갔듯이 황소의 난 때는 희종(僖宗)이 쓰촨으로 달아났다. 당시 당에 유학중이던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는 명문으로 당의 조정을 감격케 했다.
4. 중원과 북방의 대결
군사정권이 세운 문민정부
거대 제국 당이 쓰러지면서 중국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이래 40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았다. 당이 멸망한 907년부터 960년까지의 분열기를 5대10국 시대라고 부르는데, 남북조시대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5호16국 시대와 이름도 비슷하고,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가 떴다 지는 양상도 닮은 데가 있다. 사실 이 시기는 남북조시대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정치적 격변기였다. 제국의 심장을 쏜 주전충(朱全忠)은 후량(後梁)을 세워 5대의 첫 단추를 꿰었다. 5대는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로 이어지는 북방 이민족들의 다섯 개 중원 왕조이며, 10국은 전촉(前蜀)ㆍ후촉(後蜀)ㆍ형남(荊南)ㆍ초(楚)ㆍ오(吳)ㆍ남당(南唐)ㆍ오월(吳越)ㆍ민(閩)ㆍ남한(南漢)ㆍ북한(北漢) 등 주로 당 말기의 절도사들이 세운 10개 지방 왕조를 가리킨다. 5대는 맞교대 형식으로 바뀌었고, 10국은 서로 공존하면서 각축을 벌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한반도도 중국처럼 ‘후(後)’ 자를 붙여 옛 왕조의 계승을 자처한 시대였다는 점이다. 신라 말기에 궁예는 후고구려,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워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었다. 결국 궁예를 대신한 왕건이 936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재통일했다.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나라의 명칭만 비슷한 게 아니라 중국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신라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당이 멸망하고 중국이 분열기에 접어들면서 일어난 변화의 여파였던 것이다(신라 역시 당처럼 9세기부터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을 보였다). 이렇게 한반도 역사와 중국의 역사가 함께 맞물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한반도 역사에서 왕조 교체는 중국의 상황, 특히 ‘한족 왕조’의 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중국이 삼국 정립기와 남북조시대를 거칠 무렵(2~6세기)에는 한반도도 삼국시대였고, 당ㆍ송 교체기(10세기)에는 후삼국시대였다. 또 이후 중국이 남송으로 약화된 시기(12세기)에 고려에는 무신 정권이 들어섰고, 원에서 명으로 교체될 때(14세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명ㆍ청 교체기(17세기)에 조선왕조가 그대로 유지된 이유는 청이 만주족(여진족)의 왕조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불과 50여 년 동안 수많은 나라가 난립한 데서 알 수 있듯이, 5대 10국 시대의 나라들은 거의 다 정식 국가라기보다는 당 말기의 번진(蕃鎭)에 가깝고 군벌이 지배하는 체제였다. 또다시 힘센 자가 천하를 제패하는 형국이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번 분열기는 수백 년 전의 남북조시대에 비해 훨씬 짧았다. 점차 강한 군벌의 휘하로 작은 군벌이 모여들더니 이윽고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이런 대세에 편승해 최대 우두머리인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부하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송(宋) 제국을 세웠다.
▲ 문치의 무장 조광윤 절도사의 우두머리로 새 제국을 건국한 조광윤의 얼굴은 문관 같기도 하고 무관 같기도 하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문치주의를 추진해 당의 귀족 관료제보다 업그레이드된 사대부 관료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50여 년의 분열기를 거치면서 전통의 귀족 세력이 완전히 몰락했다는 배경이 있다.
송 태조 조광윤의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 제국이면 당연한 의무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자신은 절도사로서 새 제국을 열었으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어야만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돌팔매질은 하나, 문치(文治)에 입각한 군주 독재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중앙집권은 태조 자신이 절도사들의 우두머리였으므로 가능했지만, 문치주의는 다른 때 같으면 실현 불가능한 과제였을 것이다. 문치주의를 위해서는 전문 관료 집단이 필요한데, 당시까지 수백 년 동안 전통의 귀족 가문이 득세하면서 관료 집단의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송을 건국한 시기의 주변 환경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우선 5호 16국 시대를 거치면서 문벌 귀족 세력이 완전히 몰락했다. 일찍이 측천무후의 외척 정치 시대에 전통의 문벌 귀족(관롱 집단)이 크게 약화된 적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만 그랬을 뿐 사회경제적으로는 말기까지도 전혀 힘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당이 멸망한 뒤 50여 년의 군벌 시대를 주름잡았던 절도사들은 대개 이민족이거나 하층민 출신이었다. 명망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들은 손쉽게 문벌 귀족을 제압하고 재산까지 몰수해버렸다.
이제 전통적인 지배층은 사라졌다. 그럼 그 공백을 메울 새로운 사회 엘리트는 누굴까? 그것은 바로 사대부 세력이다. 원래 사대부란 봉건제의 주나라 시절 공(公, 제후), 경(卿) 아래의 지위인 대부(大夫)와 사(士)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후대에 오면서 의미가 달라졌다. 우선 한 제국 이래로 중앙집권적 제국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공과 경 같은 봉건 제후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직위들이 없어졌고, 그 아래의 사와 대부는 6세기에 과거제(科擧制)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국의 실무 행정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관료 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송대의 사대부는 후한 제국 이후 수백 년 동안 존속해 온 전통의 문벌 귀족과 달리 중소 지주 계층 출신이었다.
이렇게 당과 송은 시간적 거리가 불과 50여 년밖에 안 되지만, 정치와 사회의 성격에서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은 남북조시대의 귀족 정치와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 등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완성시킨 나라였지만, 송은 오히려 전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분열기 50여 년 동안 그렇게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렇지는 않다. 그 변화는 사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 제국의 틀 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50여 년간의 변화가 아니라 200여 년간의 변화가 된다(그래서 안사의 난 이후 송의 건국까지를 하나의 시대로 묶어 ‘당말오대(唐末五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 사대부의 생활 당 제국이 귀족 지배 체제였다면, 송 제국은 관료제 사회였다. 과거제(科擧制)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이들 신흥 지배 세력을 사대부라고 불렀다. 그림은 송대 사대부의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꽃피운 문화의 시대
문벌 귀족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 사격이라도 하듯이, 송 태조는 당의 최고 행정기관인 3성 6부에서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던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버렸다. 이에 따라 문하성이 지니고 있던 황제 명령에 대한 거부권도 없어져 황제의 전제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렇게 보강된 중서성과 더불어 군사권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을 두어 중서성과 추밀원의 2부(二府)가 최고 정책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한 지방 행정 기구로는 전국에 15개의 로(路)를 설치했는데, 절도사가 전횡하던 시대처럼 지방 권력이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로(路)를 관장하는 책임자는 따로 임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로에도 중앙 관제를 도입해 각 로를 부서별로 나누고 행정을 전문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렇게 관료 제도를 새로 정비하자 실무자급의 전문 관료들이 대량으로 필요해졌다. 옛날처럼 문벌 귀족이 공급하는 인력은 필요하지도 않거니와 이제는 그런 집단이 제거되어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필요한 인력을 수급할까? 답은 과거제(科擧制)였다.
물론 과거제는 당 제국 시대에 효율적으로 기능한 제도다. 하지만 당과 송, 두 나라는 과거제에서도 상당히 달랐다. 당 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문벌 귀족 출신의 정부 부서장들이 관장하는 별도의 구술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송의 과거제는 각 지방의 예선을 거친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황제가 직접 관장하는 전시(展試)를 치러 여기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전시 합격자들은 천자의 문생‘이라 부를 정도였다. 당 말기에 환관들이 옹립한 황제, 즉 문생천자에 비해 글자의 순서만 뒤바뀐 것 치고는 엄청난 차이다.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인력이 바로 사대부 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문민정부’를 표방한 송의 정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문치주의를 실시한 덕분에 송은 화려하고 찬란한 문화의 제국이 되었다.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은 그 이후까지 포함해 중국 역사상 송 시대에 가장 번성했다. 특히 회화는 송대부터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 잡았다. 당 시대까지 회화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거나 건축물을 장식하거나 종교적인 목적에서 제작되는 등 기능적이고 장식적인 역할이 위주였다. 그러나 송대에 와서는 회화 자체가 독자적인 예술 활동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직업적 화공이 아닌 사대부 출신 문인들의 문인화가 발달했으므로 주제나 기법도 매우 다양해졌다. 과거에 회화 과목까지 포함시킬 정도였다고 보면 시절이 한참 달라졌다. 는 것을 알기 어렵지 않다. 12세기 초반의 황제 휘종(徽宗)은 권력자이기 전에 뛰어난 화조화가(花鳥畵家)이기도 했다. 회화와 더불어 송대에는 음다(飮茶) 풍습이 성행해 다기를 비롯한 도자기 관련 산업과 예술도 크게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도자기의 최고로 치는 송자(宋瓷)는 특히 고려청자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문학에서도 송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시 문학은 당에 비해 처지지만【중국 문학에서는 지금까지도 당시(唐詩)를 능가하는 시는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송대에는 그 대신 사(詞, 일종의 노랫말)와 산문 문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서민 문화의 성장에 힘입어 소설도 인기를 끌었다(시 문학과 소설 문학의 관계는 귀족 문화와 서민 문화의 관계와 유사하다). 후대에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알려진 위대한 문장가들 중에는 송의 문인들이 여섯 명이나 된다.
▲ 황제의 작품 문치주의에 걸맞게 송대의 황제는 직접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오언시까지 첨부된 이 멋들어진 화조도는 화가로서도 유명했던 휘종의 작품이다(오른쪽 아래 글자 중 ‘宣和’는 휘종의 연호다). 그러나 예술가 황제 휘종은 재위 시절 대외적으로는 여진족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이후 소설 『수호지(水許誌)』의 무대가 되는 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송의 문치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문화적 현상은 학문의 발달이다. 송대에는 특히 유학(儒學)이 크게 발달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의 유학을 송학(宋學)이라는 별도의 용어로 부르면서 유학 사상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앞서 말했듯이 유학은 원리부터 현실 참여적인 사상이다. 그런데 유학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고, 한대에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로 채택되었으나, 당 시대까지도 사회에 완전히 침투하지는 못했다. 사실 충효의 예를 강조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수직적 상하 질서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삼는 유학의 성격은 지배자라면 누구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제국 이래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늘 유학을 정치와 사회의 지도 사상으로 도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학은 지배자의 짝사랑으로만 끝났다. 현실적인 학문이지만 현실에 녹아들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불우한 학문이었다. 후한 제국 시절에 유학은 환관 정치에 도전했다가 패배의 쓴잔을 마셨고, 당 제국 시절에는 도교와 불교에 밀려 오히려 퇴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 말기에 성행한 도교와 불교의 철학적 탐구 방식은 수백 년 동안 훈고학적 학풍에만 젖어 있던 유학을 크게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유학(儒學)이 불운했던 이유는 고비마다 환관이나 외척, 귀족 등 기존의 정치 세력의 반발을 만났기 때문이다. 역대 황제들은 언제나 유학에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황제 이외의 기득권층은 유학을 썩 환영하지 않았다. 유학적 세계관이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적 구조이므로 기득권층은 기껏해야 천자를 보필하는 관료 세력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기득권층’이 없어졌다. 당말오대의 200년에 걸쳐 문벌 귀족이 크게 약화되었고, 부패한 환관 세력은 당이 망하면서 주전충에게 모조리 도륙되었다. 똑같은 출발선에서 달리기를 한다면 유학은 언제든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균등한 출발선이 마련된 것이다. 더구나 유학을 숭상하는 신흥 사대부 세력은 문벌 귀족들의 장원이 무너지면서 새로이 생겨난 형세호(形勢戶)라는 지주층(송대에 발달한 형세호와 전호佃戶의 관계는 근대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기원이다) 출신이므로 경제적 배경도 튼실했다.
이렇게 주변 조건이나 주체 역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송학은 우호적인 토양에서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나중에 보겠지만, 송대에는 주변 이민족에게서 굴욕을 많이 당한 탓에 민족적 자각의 일환으로 존왕양이를 앞세우는 유학이 자연스럽게 힘을 얻기도 했다). 그전까지의 유학과 달리 송학은 단순한 국가 통치 이념인 것만이 아니라 철학적 체계성도 확보했다.
우주의 본체를 태극으로 보고 음양설과 오행설을 세운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비롯해 소옹(邵雍, 1011~1077), 장재(張載, 1020~1077),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는 후대에 북송 5자(北宋五子)로 불린다. 이들이 정초한 유학(儒學)의 이론은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에게서 완성된다. 주희는 기존의 유학이론을 집대성해 태극을 이(理, 불변의 이치, 만물의 존재 근거)로, 음양과 오행을 기회(가변적인 요소, 만물의 운동 원리)로 보는 이기론(理氣論)과 일종의 수양론인 성리론(性理論)으로 정립했다. 이것이 바로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고 불리는 송학의 완성판이다.
여기까지는 철학으로서의 유학이지만, 주희는 나아가 이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킨다. 불변의 ‘이’를 한족으로, 가변의 ‘기’를 이민족으로 환치하는 것이다. 그 의도는 명백하다. 한족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이민족은 모두 오랑캐라는 뜻이다. 비록 지금은 오랑캐의 힘에 눌려 있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한족 중심의 중화로 돌아오는 게 이치라는 이야기다. 결국 주희가 정립한 신유학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요체였다【당시 한반도 왕조는 고려였지만 성리학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의 송과 짝을 이루는 한반도 왕조는 후대의 조선이다. 조선에서 이기론은 16세기에 퇴계와 율곡의 논쟁으로 나타났고, 청의 침략을 받은 17세기에는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둘 다 급변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비중화 세계(청과 일본)의 거센 도전을 받은 중화 세계(명과 조선)의 이데올로기적 대응책이었다】.
▲ 백록동 서원 주희는 황폐한 이 백록동(白鹿洞) 서원을 부흥시켜 자신이 창시한 신흥 학문인 주자학(성리학)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제자들은 이 원을 계속 발달시켜 송학의 ‘성지’로 만들었다.
문민정부의 아킬레스건
송대에는 학문과 예술만 발달한 게 아니었다. 도시와 상업의 성장으로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서민 문화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해외 무역도 활발해 광저우(廣州)와 항저우 등 항구 도시들이 크게 번영했다. 또한 조선업과 제철업, 군수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도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게다가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송대의 발명품은 거의 다 세계 최초의 것들이다. 동양 세계의 4대 발명품 가운데 종이는 후한대인 2세기에 발명되었으나 화약과 나침반, 활판인쇄술은 모두 송대에 발명되었다. 지폐를 사용한 것도 세계 최초다.
문민정부를 토대로 했고 학문과 예술, 산업과 과학기술까지 두루 발달했으니 송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강국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송은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역대 중국의 통일 제국 가운데 가장 허약한 나라였다. 왜 그랬을까? 송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물리력에 있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 권력과 이를 보필하는 관료제는 완벽했지만, 송은 문치주의를 표방한만큼 아무래도 군사 부문에서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환경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문명이 발달한 것은 송만이 아니었다. 당말오대를 거치면서 중화 세계를 둘러싼 비중화 세계가 강성해졌다. 오히려 송 제국이 성장하는 것보다 한족의 전통적 맞수인 북방 민족들의 힘이 더 먼저, 더 빠르게 성장했다.
송이 건국될 당시 북방 민족의 판도는 거란족이 세운 중원 북쪽의 요(遼)와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북쪽의 서하(西夏)로 양분된 상태였다. 거란은 원래 당 초기에는 돌궐과 위구르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의 집요한 공세에 그들이 서쪽으로 멀리 물러나자 거란은 그 공백을 틈타 세력을 키웠다. 그러던 중 당이 멸망하고 중원이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던 916년에 거란은 대거란국(大契丹國, 936년에 중국식 국호인 요로 바꾼다)을 세웠다. 신생국은 10년 뒤 만주의 터줏대감인 발해를 병합했으며, 5대 군벌 국가의 하나인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중원 북동부의 비옥한 지대인 연운(燕雲) 16주(지금의 베이징이 있는 지역)를 획득했다【북방 민족들에 관해서는 중국 측 기록 이외에 별로 전하는 게 없기 때문에 막연히 그들이 문화적으로 크게 뒤처진 것으로 여기기 쉽다. 특히 우리 역사는 일찌감치 한족 문화권에 합류한 탓에 스스로를 한족과 동일시하고 예로부터 북방 민족을 경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우리 역사를 통해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시기는 고대 삼국시대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한반도 왕조들은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국 한족 왕조에 내주었기 때문에 ‘대외 관계‘가 사라지고 한반도 내의 역사만 전개했다(중국에 이민족 왕조가 들어설 때는 중화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족 왕조의 편에서 항쟁했다). 거란의 요는 문화적으로도 결코 후진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란 문자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불교를 발전시켜 대장경도 조판했다. 이 대장경의 영향으로 고려대장경이 조판될 수 있었다. 당시 거란의 이름은 유럽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현재 홍콩에 있는 영국계 항공사의 명칭이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인데, 마르코 폴로가 거란을 캐세이로 부른 데서 연유한다】.
아직 신생국인 송의 입장에서 북방의 동향은 잠재적 위기 상황이었다. 그저 대외적으로 안정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태조는 요와 무역을 계속하면서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로 제위를 물려받은 태종(太宗, 939~997)은 같은 정세를 다르게 판단했다. 애초에 의도가 달랐을 수도 있다. 그는 형의 뜻을 거슬러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다시피 했고 황제가 된 뒤 조카를 사실상 살해했으므로 권력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태종은 미수복지 연운 16주가 못내 아까웠다. 그래서 979년과 986년에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요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일패도지(一敗塗地)였다.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송은 이후 국경을 폐쇄하고 통상을 단절하는 노선으로 바꾸었는데, 이게 또 문제였다. 요는 송의 경제 보복 조치에 군사 보복 조치로 대응했던 것이다. 태종이 말썽만 일으키고 죽은 탓에 그 불똥을 그의 아들 진종(眞宗, 968~1022)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1004년 요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 부근까지 쳐들어오자 송은 실지 회복은커녕 수도
사수에 사력을 다해야 했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던 양측은 마침내 화의를 도모하기로 하고 전연(澶淵)의 맹약을 맺었다.
그 조약의 결과로 송은 요의 상국(上國), 즉 ‘형님 나라’라는 명분을 얻었다. 그러나 조약에서 송이 얻은 것은 그게 다였다. 형(송)은 아우(요)에게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주기로 했다. 또 형은 잃어버린 땅 연운 16주를 완전히 포기하고 현 상태의 국경을 유지하며 다시는 국경 부근에 군사 시설을 설치할 마음을 먹지 말아야 했다. 말이 형님이지 송은 요에 매년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는 ‘조공 국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굴욕도 굴욕이거니와 송은 이후 요가 여진족의 금에 망할 때까지 100년 이상이나 공물을 바쳤으니 그로 인한 재정적 피해도 막심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송의 대외 관계는 서하와의 접촉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송은 요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북의 탕구트족을 섣불리 복속시키려 했다가 오히려 그들의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역효과를 빚었다. 그러자 송은 거란과 상대할 때처럼 또다시 국경을 폐쇄하고 무역을 금지하는 노선으로 돌아섰다. 탕구트의 대응도 거란과 똑같았다. 1038년 그들은 서하를 세우고 송과 싸웠다. 놀랍게도 결말마저 다를 바 없었다. 7년간의 전쟁 끝에 송은 결국 화의 정책으로 돌아섰다. 전연의 맹약에서처럼 송은 상국의 명분을 얻은 대신 매년 은 5만 냥과 비단 13만 필, 차 2만 근을 주고 무역을 재개하기로 했다.
이렇듯 명분을 확보하고 실리를 내주는 비정상적인 대외 관계는 송의 비정상적인 체제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산업과 문화는 대단히 발달했으면서도 군사력은 뒤처지는 이상한 중화 제국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대가로 얻은 미미한 명분조차도 실은 이민족의 힘에 굴복한 결과였다. 굴욕감과 더불어 막대한 재정적 피해가 내치에도 위협 요소로 작용하자 제국 내에서는 점차 자성의 소리가 드높아졌다.
▲ 화려한 도시로 송의 수도 카이펑은 정치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최대의 상업도시로 크게 번영했다. 그림에서 도시의 생동감이 느껴진다.
개혁의 실패는 당쟁을 부른다
화려한 문화의 선진국인 송이 물리력이 약하다는 한 가지 원인 때문에 일찌감치 쇠미의 징후를 보인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직 건국한 지 100년밖에 안 되는 젊은 나라이므로 반전의 실마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스무 살의 청년 황제 신종(神宗, 재위 1067~1085)의 적극 지원으로 발탁된 왕안석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부국강병책을 전개했다. 조공이 야기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왕안석은 부국책의 목적을 농민 생활의 안정, 생산력의 증가, 국가 재정난 타개로 삼고, 이를 위해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균수법(均輸法), 모역법(募役法),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시행했다. 청묘법은 봄에 농민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가을 수확기에 받는 것으로, 고리대금업자가 농민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시역법과 균수법은 정부가 물가 조절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제도였으며, 모역법은 농민에게 요역을 부담시키는 대신 돈으로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게 그거 아니냐 싶겠지만 그 돈으로 정부가 일손을 구해 요역을 충당하면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고 지방 정부의 재정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 방전균세법은 토지조사를 상시화함으로써 부호들이 은닉한 토지를 찾아내 과세하려는 방책이었다.
이러한 부국책과 아울러 왕안석은 강병책으로 보갑법(保甲法)과 보마법(保馬法)을 실시했다. 보갑법은 농민들을 직접 군사력으로 키우는 방책인데, 당말오대에 직업군인 제도를 택하면서 무너진 병농일치제를 부활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또한 보마법은 농가에 말을 사육하도록 해서 유사시에 군마로 활용하려는 제도였다.
이와 같은 개혁 조치는 누가 보아도 당연하고도 분명한 것이었으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가히 혁명이라 할 만큼 급진적이었다. 재원은 어차피 한정되어 있는데 그 운용을 달리하자는 것이었으니, 누군가(예컨대 국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청묘법과 시역법은 송대에 크게 성 장한 대상인 세력의 이해관계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며, 방전균세법은 대지주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왕안석의 신법에 대해 전통 기득권층은 반발했다. 그래도 개혁의 취지 자체를 모조리 부인할 수 없었으므로 반발 세력은 개혁파(신법당)와 보수파(구법당)로 나뉘었다. 신법당은 대체로 신법을 지지하면서 기층 민중의 성장을 부국강병의 요체라고 주장한 반면, 구법당은 “정치란 사대부들을 위한 것이지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팽팽히 맞섰다. 지금처럼 공화제와 국민주권의 관념이 확고하다면 당연히 신법당의 논리가 우세하겠지만, 유럽에서도 시민사회가 탄생하기 500년 전인 당시에는 구법당의 논리도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상업 정책 |
균수법 (均輸法) |
나라가 싼 곳에서 물건을 사서 비싼 곳에 팔음 |
시역법 (市易法) |
소상인들에게 대출 | |
모역법 (募役法) |
실업자를 채용하여 국가 공사 시킴 | |
농업 정책 |
농전수리법 (農田水利法) |
농업용수를 위한 시설의 마련 |
청묘법 (靑苗法) |
봄에 자금 대출하여 수확기에 받음 | |
방전균세법 (方田均稅法) |
토지 세금을 균등하게 걷음 | |
군사 정책 |
보갑법 (保甲法) |
백성을 민방위 군대로 만듦 |
보마법 (保馬法) |
백성들에게 말 기르도록 장려 후 전쟁 사용 |
왕안석(王安石)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자 갈등은 어느덧 부국강병과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전했다. 이리하여 송 제국의 정치를 좀먹게 되는 당쟁(黨爭)이 등장했다. 사실 당쟁은 당 시대에도 크게 일어난 적이 있었을 뿐 아니라(그때는 환관들의 당쟁이었다) 그 생리 상 어느 시대든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송대에 당쟁이 특히 치열한 데는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제(科擧制)였다.
과거제는 전통적인 귀족 집단의 혈연 대신 ‘학연(學緣)’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자는 자신을 길러준 스승보다 뽑아준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존경했고, 함께 시험에 합격한 동기와 선후배 등과 부지런히 연고를 맺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고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이 과정도 연줄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하나의 세력이 생기면 대항 세력이 나타나는 법이다. 점차 이들은 끼리끼리 뭉치면서 여러 당파를 형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도입된 것이다. 이 혁명적인 조치가 시행되자 이제 예전처럼 당파들이 연고만 맺고 세력을 늘리는 데 머물 수만은 없게 되었다. 신법과 구법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적극적인 정치 행동으로 나서야 했다. 신법으로 인해 더욱 격렬해진 송대의 당쟁은 마침내 송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은 전혀 의외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중국의 송과 한반도의 조선이 닮은 꼴이라는 것은 당쟁에서도 드러난다. 사대부가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비슷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쟁의 주제마저 비슷했다. 11세기 송에서는 인종(仁宗)이 후사가 없던 탓으로 조카인 영종(英宗)이 즉위하는데, 영종의 아버지를 어떻게 예우할 것인가를 두고 당쟁이 벌어졌다. 17세기 조선에서는 효종(孝宗)의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상(服喪)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격돌한 ‘예송(禮訟)논쟁’이 치열했다. 송과 조선은 대외 관계도 비슷했다. 송은 요와 서하에 세폐를 바친 대가로 상국의 명분을 가까스로 유지했는데, 이것은 조선이 여진과 왜를 대하는 이른바 교린(交隣) 정책과 비슷하다. 조선은 왜구의 위협에 못 이겨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을 먹이느라 매년 쌀 1만 석씩 들였는가 하면 수시로 북변을 침입하는 여진을 무마하느라 토지와 가옥, 노비까지 내주기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송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있었다. 또한 송이 요와 금의 공격을 받았을 때 내부에서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듯이, 조선도 청의 침략(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주전론과 주화론으로 대신들의 의견이 갈렸다(둘 다 결과적으로 주화론을 택했다). 게다가 금에 억눌린 남송과 청에 항복한 조선은 모두 실현 가능성이 없는 북벌 계획을 수립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공교롭게도 북벌을 계획한 남송의 황제와 조선의 왕은 모두 효종孝宗이었다). 이 정도면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왕안석의 글씨 청년 황제 신종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과감한 개혁을 실시한 왕안석은 후대에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글씨와 문장도 빼어났다. 그러나 그의 개혁 정책은 당쟁의 회오리에 휘말렸고, 결국 당쟁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 역사에서 왕안석(王安石)과 꼭 닮은 행적을 보인 인물은 조선의 조광조(趙光祖)다. 여러 가지 면에서 송은 한반도의 조선과 닮았다.
새로운 남북조시대?
송 제국이 당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 요에도 강적이 출현했다. 요가 한창 강성할 때 복속되었던 여진족이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은 몽골계의 거란과 달리 만주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요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발해 유민들도 여진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니, 여진은 우리 민족과 대단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초반 요의 국세가 약해지는 틈을 타서 완안부(完顔部)의 족장 아골타(阿骨打)는 여진 부족들을 통합해 1115년에 금(金)을 세웠다.
100년이 넘도록 요에 세폐(歲幣)를 바치고 있던 송은 금의 등장을 반겼다. 어차피 제 힘으로 적을 물리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송은 계책을 통해 요의 손아귀를 벗어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등장한 게 역대 한족 왕조의 전통적인 수법인 이이제이와 고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 전략이었던 원교근공(遠交近攻)을 합친 방책이다. 그러나 원래 이이제이나 원교근공은 주체의 힘이 강력해야 구사할 수 있는 전략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오히려 부메랑을 맞게 된다.
과연 그랬다. 1125년 송은 금과의 협공으로 숙적인 요를 멸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더 힘센 강적과 단 둘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송의 국세를 충분히 알게 된 금은 1127년 카이펑(開封)을 포위하고, 휘종과 흠종(欽宗)의 두 황제와 황족, 후궁 등 무려 3000여 명의 황실 식구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것을 ‘정강(靖康)의 변(變)’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건으로 송 제국은 일단 멸망한다.
여진족 병사 여진족 병사의 모습이다. 이들은 거란을 대체해 송을 위협하다가 끝내 제국을 강남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여진은 후일 17세기에 다시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해 중국 역사상 최후의 제국이 되는 청을 세운다.
송으로서는 금이 강남까지 정복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큰 행운이었다. 이후 휘종의 아들 한 명과 대신들이 강남으로 도피해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을 수도로 삼고 무너진 제국을 일으켜 세웠다. 국토는 동강났지만 그래도 송의 사직은 명맥을 유지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를 강남의 송, 즉 남송(南宋)이라 부르고, 그 이전까지 있었던 원래의 송을 북송(北宋)이라 부른다.
요에 세폐(歲幣)를 바칠 때보다 훨씬 더 큰 비극과 수모를 겪고서 탄생한 남송은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실지를 회복하려는 싸움을 걸었으나 그때마다 대패하고 굴욕적인 화의 조약을 맺었다. 공물도 요에 보내던 것보다 훨씬 많아져 은 25만 냥과 비단 25만 필에 달했다. 남송으로서는 여우를 물리치고 호랑이를 집 안에 불러들인 격이었다. 더욱이 굴욕적인 일은 그나마 유지하던 상국의 명분마저 잃었다는 사실이다. 금은 남송에 신하국의 예의를 취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남송은 이후 북송 시대(168년간)와 얼추 비슷한 153년 동안 존속하면서 북송의 체제와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다. 영토도 크게 줄어들었지만 한족의 민족적 자부심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북송과 남송 전체에 걸쳐 한족 왕조는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거의 한 차례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시대를 앞서간 문치주의의 대가는 혹독했다.
남송이 몽골에 정복되는 13세기 후반까지 중국 대륙에는 화이허를 경계로 금과 남송이 공존했다. 600여 년 만에 다시 남북조시대가 재현된 셈이다. 그렇게 보면 남송 시대도 일종의 분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송의 수도 무력 이외에 모든 게 발달한 송은 남송으로 축소되고 나서도 특유의 활력을 잃지 않았다. 새로이 남송의 수도가 된 항구도시 임안의 시가지는 앞서 본 카이펑의 모습보다 오히려 더 번영한 듯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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