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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부 화려한 분열 - 1장 고구려의 역할, 대륙 국가의 성격(동천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1장 고구려의 역할, 대륙 국가의 성격(동천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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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 국가의 성격

 

 

고구려는 특이한 나라다. 건국시조로 보나, 문명의 성격으로 보나 중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한반도 역사에 속한다고 해야겠지만 백제나 신라만큼 토박이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지리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 랴오둥 동부에 두루 걸치고 있으므로 크게 보면 중국과 한반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런 만큼 고구려는 애초부터 중국과 한반도 양쪽의 역사를 이어주면서도 단절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오늘날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 역사의 일부로 치는 데 반해 중국에서는 중국사에 포함시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화가 나겠지만 실상 초기의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낙랑이 아직 멸망하지 않은 이상 중국에서 볼 때 고구려는 엄연히 한나라의 강역 안에 들어 있는 국가이며, 중국의 2차 분열기에도 초기에는 중국과의 접촉이 많았다. 더구나 당시 중국은 중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민족의식이 분명히 존재한 데 반해 한반도 왕조들은 단일 민족의식이 없었으므로 사실 그때까지의 고구려는 중국사(넓게 봐서 중국 변방의 역사)에 포함되는 게 더 타당하다 할 것이다. 고구려가 명실상부한 한반도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은 한반도 진출에 주력하게 되는 5세기 이후다. 이를테면 중국의 선진 문명을 수입하는 측면에서는 한반도의 리더이면서도 동시에 중국의 동방 진출을 방어하는 측면에서는 한반도의 방패라고 할까?

 

그런 이중적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의 정세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앞서 보았듯이 후한 초기에 해당하는 대무신왕(大武神王) 시절에 낙랑을 공격한 것이라든가, 태조왕(太祖王) 때 랴오둥을 공략한 것은 한나라가 약화되었다는 정세분석에서 나온 시나리오였다. 이후 반도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 가야가 서로 아웅다웅 다툴 무렵에도 고구려는 늘 시선을 대륙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아직까지는 낙랑이 고구려와 한반도 중남부를 구분해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윽고 후한 말기에 접어들어 중국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면서부터 고구려는 한층 긴장의 고삐를 쥔다. 중국의 위기는 곧 고구려의 기회다. 하지만 그 기회를 현실화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고구려는 후한이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시기를 틈타 독자적 기반을 구축한 랴오둥의 공손씨 세력과 치열한 경합을 벌여야 했다. 산상왕이 형 발기의 공격에 동생 계수를 보내 가까스로 막아낸 것도 그 과정의 하나다. 아직도 고구려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생존 확보의 차원에서 랴오둥과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마침내 후한마저 멸망하고 중국에 삼국시대가 시작되자 고구려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기회에 오랜 숙적인 랴오둥을 정벌하지 못하면 앞으로 영원히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의 어지러운 정세를 관망하던 고구려에게 드디어 행동 노선을 정할 계기가 찾아온다. 새로 정착된 부자 계승의 첫 수혜자인 동천왕(東川王)에게 234년 위나라에서 화친을 맺지는 뜻으로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 했던가? 멀리 있는 적과 화친하고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한다는 방책은 진시황제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위나라와 랴오둥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위나라가 내미는 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사실 당시 위나라는 오와 촉이 서로 동맹을 맺고 거세게 도전해 오고 있는 상황을 맞고 있었으므로 후방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판에 랴오둥 태수 공손연(公孫淵)이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외교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따름이다(랴오둥은 후한 말부터 3대째 걸쳐 공손씨 가문이 독립 왕조처럼 지배하고 있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따라서 위나라로서는 랴오둥과 해묵은 숙제를 풀어야 하는 고구려와 어떻게든 친해둘 필요가 있었다. 물론 고구려도 똑같은 심정이었으므로 두 나라는 자연히 이해관계가 통한다. 과연 위나라의 기대에 걸맞게, 교활하게 저울질만 일삼는 공손연과는 달리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2년 뒤에 파견된 오나라의 사신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위나라에 보내 돈독한 신용을 과시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통의 이해관계를 토대로 하는 동맹은 그 이해관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제갈량이 병사하고 촉나라의 힘이 현저히 떨어지자 대륙의 상황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게 된 위나라는 차츰 시선을 후방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곧 현실화될 삼국통일에 대한 사전 준비다. 그러던 차에 위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연나라 왕을 자칭한 공손연의 돌출 행동은 결국 자신의 명을 앞당기는 만용이 되고 말았다. 238년에 위나라는 4만의 대군으로 랴오둥을 공략하여 340여 년에 걸쳐 랴오둥의 패자로 군림했던 공손씨 세력을 소탕했다.

 

 

 

 

이제 고구려는 새로운 상황을 맞았으니 한시바삐 시나리오를 바꿔야만 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동천왕(東川王)은 아직도 위나라와의 동맹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랴오둥 정복 전쟁에 1천 명의 병력으로 지원군을 보내 체면치레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판단미스였다. 고구려는 랴오둥의 주인이 바뀐 것을 환영해 마지 않았으나 그것은 늑대가 물러간 숲에 호랑이가 나타난 격이었다. 공동의 골칫거리였던 공손씨가 몰락했다는 똑같은 사건을 두고 고구려와 위나라 양측의 견해는 정반대였다. 고구려는 애초부터 맺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꺼이 위나라의 핵우산 밑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위 나라는 고구려를 우산 밑에 잡아두기보다 아예 제거할 심산이었다. 위나라에게 고구려는 처음부터 랴오둥과 같은 골칫거리일 뿐이었으니까.

 

오랜만에 적법한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탓일까? 동천왕(東川王)은 늘 중국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던 선배들에 비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242년 랴오둥의 일부라도 손에 넣기 위해 먼저 군사를 움직인 것도 그런 태도에서 나온 전략이다. 그러나 그는 곧 전략적 판단미스의 대가를 호되게 치른다.

 

정복지 랴오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위나라는 드디어 마지막 우환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선봉장은 랴오둥 정벌 때에도 큰 전공을 세웠던 유주(지금의 베이징) 자사(刺史, 태수보다 한 급 아래의 직책) 관구검(毌丘儉), 244년에 중앙정부의 명을 받아 그는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그제야 동천왕(東川王)은 사태를 알아차리고 2만의 군사를 모아 대응하는데, 여기서도 그의 낙관적 자세는 화를 빚는다.

 

일단 오프닝은 좋았다. 위나라가 본군 대신 유주군을 파견한 것이나 랴오둥 정벌군의 1/4밖에 안 되는 병력을 파견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위나라는 아마도 랴오둥에 비해 고구려의 실력을 낮게 평가한 듯하다. 병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고구려는 두 차례 맞붙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당시 동천왕은 위의 대군이 우리의 소군만 못하다. 관구검은 명장이지만 지금 그의 목숨은 우리 손 안에 있다며 호기를 부렸는데, 그로서는 거기에 만족하는 편이 나았다. 자신감에 찬 동천왕은 직접 기병대를 거느리고 적의 명맥을 끊으러 갔다가 사각형의 방진으로 만반의 대비를 갖춘 관구검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바둑에서나 전쟁에서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이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급기야 동천왕(東川王)은 수도인 환도성마저 적에게 내주고 지금의 강원도까지 달아나기에 이르렀다.

 

매국노가 있으면 애국자도 있는 게 이치다. 아버지 산상왕(山上王)은 최초의 매국노인 발기에게 호되게 시달렸지만 아들 동천왕은 최초의 애국자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추격대가 다가오자 병사들마저 왕을 버리고 떠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밀우(密友)라는 병사가 결사대를 모아 항전하는 동안 동천왕은 간신히 몸을 피해 달아났다. 비록 한때의 만용으로 일을 그르쳤지만 동천왕은 역시 작지 않은 그릇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미처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유옥구(劉屋句)를 시켜 밀우를 구해오게 한다. 전황은 여전히 열세지만 이 사건으로 사기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또 한 명의 애국자가 나와준다면 재역전의 계기도 잡을 수 있을 터, 이때 유유(紐由)가 세 번째 구국의 영웅으로 나섰다. 그는 위나라 추격대의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하다가 적장을 찔러 죽이고 함께 죽으니 조선시대의 열혈 기생 논개의 한참 선배다.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고구려군은 마지막 총공세를 전개한다. 결국 위나라 군은 서쪽의 낙랑으로 도피했다가 북쪽의 랴오둥으로 물러갔다. 동천왕(東川王)은 세 애국자 밀우, 유유, 유옥구에게 식읍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포상했다.

 

 

만용의 대가 역시 위나라는 강했다. 동천왕은 위나라 본군이 오지 않은 것에 적을 얕잡아봤으나 그 대가는 도성마저 적의 손에 빼앗길 만큼 호된 것이었다. 사진은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제압한 뒤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기공비의 일부인데, 지금은 사방 한 뼘 정도의 조각만 전해진다. 오른쪽 하단에 토구려(討句麗, 고구려를 토벌함)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 전란으로 이제 중국과 고구려가 장차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될지는 분명해졌다. 고구려는 건국 이래 내내 랴오둥 세력에 시달렸지만 사실 정작으로 큰 대적은 그 서쪽 너머 중국의 본체였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름은 달라도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모두 고구려를 잠재적 동맹 세력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게 확실해졌으므로 고구려로서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저항해야 할 입장이었다. 한편 중국은 중국대로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해야 했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아예 멸망시켜 영토화하고 싶지만 한 차례의 접전에서 확인되었듯이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고구려는 랴오둥보다 멀고 랴오둥보다 강하다. 일찍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이 무주공산이었을 때 한나라는 4을 설치해서 지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지배 방식이 불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최소한 고구려가 중국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상황만은 피해야 한다. 고구려는 중국을 이길 수 없고 중국은 고구려를 먹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는 사자와 고슴도치 같은 기묘한 관계가 형성되었다동북쪽 변방을 대하는 중국 역대 제국의 전통적인 태도는 이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중국은 세 나라가 정립하면서 앞다투어 영토 확장에 나선 덕분에 강역이 크게 팽창했다. 오나라는 월남에 이르는 지역을, 촉나라는 윈난과 쓰촨 일대를 손에 넣었으며, 화북을 장악한 위나라는 북방과 동북방을 개척했다. 랴오둥 정벌과 고구려 침략은 이런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만주까지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만주를 복속과 제어의 대상으로 볼 뿐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만주에 관해서는 늘 모호한 태도일 수밖에 없다. 만주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만주 출신의 청나라가 대륙을 정복하는 17세기의 일이다.

 

어쨌든 고구려로서는 대무신왕(大武神王) 시절부터 은근히 품어왔던 랴오둥 진출의 꿈을 일단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느 방면으로 향해야 할까? 그 답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고구려의 세 애국자인 밀우, 유옥구, 유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활약보다 그들의 출신지다. 삼국사기에는 그들이 동부와 하부 사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동부와 하부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지만 압록강 중류에 도읍을 정하고 있는 고구려의 관점에서 동부와 하부라면 어딘지 알기 어렵지 않다. 더구나 동천왕(東川王)이 강원도까지 피신해 왔을 시점에 그들이 나섰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 확실해진다. 그들은 일찍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옥저 사람들, 즉 오늘날 함경남도와 강원도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던 사람들인 게 분명하다. 평안남도가 낙랑의 지역이었던 탓에 동천왕은 곧장 남하하지 못하고 남동쪽으로 도망친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 애국자들을 얻은 것이다. 측근 장수와 병사들이 왕을 버리고 떠난 뒤에도 왕의 곁에서 끝까지 지켜준 그들이었으니 동천왕이 생각하고 있는 향후 진출 방향이 어디일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바로 남쪽의 한반도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남부에 새로운 지지 세력이 생겼다. 게다가 환도성마저 불타 수도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부터 고구려는 당연히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 남쪽이라면 바로 낙랑이 있는 곳, 동천왕(東川王)은 평양성을 새로 쌓고 도읍을 옮긴 뒤 낙랑을 바라본다이 평양은 오늘날의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에서 약간 남하한 곳으로 추측된다. 당시 평양이라는 말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벌판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였다. 평양은 유경(柳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여기서 는 곧 버드나무, 그러니까 벌판을 뜻하는 벌들에서 이 탈락한 이름이다.

 

 

황성 옛터?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으로 고구려는 또 다시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야 했다. 당시에는 지금의 지리 구분과 달랐겠지만,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수도는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다. 그 덕분에 사진에 보이는 옛 도성의 연못은 폐허로 변한 채 덩그라니 터만 남게 되었다. 환도성 안에 있던 이 연못은 말에게 물을 먹이는 용도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중국발 통신

대륙국가의 성격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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