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보다 흐린 피
일단 신대왕의 왕위는 그의 아들인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179~197)이 계승해서 왕위계승의 문제는 진정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면 왕위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고국천왕의 동생들에게도 과연 부자 상속의 의지가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그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말해주는 주요한 제도를 하나 보고 넘어가자. 우리에게 고국천왕은 진대법(賑貸法)이라는 획기적인 제도로 잘 알려져 있다. 194년에 처음 시행된 진대법은 사실 국상 을파소(乙巴素, ?~203)의 작품이지만, 원래 어느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모든 업적은 그 왕의 치적으로 기록되게 마련이니(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오래 재위한 지배자는 거의 대부분 치적도 많다) 고국천왕의 업적이기도 하다. 더욱이 을파소가 국상으로 중용된 데는 고국천왕의 확고한 지지가 있었다.
고국천왕은 즉위 초부터 거듭난 새 나라를 안정시킬 인재를 백방으로 찾고 있었다. 그가 낙점한 인물은 안류(晏留)라는 사람, 그러나 안류는 더 적임자가 있다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를 왕에게 천거한다. 반신반의한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불러 우태라는 벼슬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을파소는 의외로 거절한다. 그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말은 그 정도 벼슬로는 자신의 큰 뜻을 펼치기 어렵다는 것, 마음으로 그 심정을 이해한 고국천왕은 그제야 을파소가 큰 인물임을 깨닫고 그를 국상으로 기용한다. 농사꾼이 졸지에 국상에 올랐으니 귀족들이 반발할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왕이 예상치 못했을 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혹시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사람됨에 매료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기존의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새로 왕당파를 육성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한 건 아니었을까? 그것으로 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온 귀족들의 간섭과 견제를 끊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이미 190년에는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於卑留)가 이끄는 귀족 반란이 일어난 적도 있었으니, 을파소를 기용한 데는 그런 정치적 배려가 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대법은 일종의 빈민 구제법으로, 흉년이 들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는 것[賑]과, 식량이 떨어지는 봄에 국가국가가 농민들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한 곡식으로 갚게 하는 것[貸]을 내용으로 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진대법이 시행되려면 당연히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 빽 하나 없는 을파소가 자신의 정책을 굳건히 추진하기 위해서도 왕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지만, 적어도 중앙정부가 각지의 곡식을 수집하고 배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만 진대법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대법도 역시 고구려가 확고한 왕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그토록 왕권 안정에 노력한 고국천왕이었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왕위를 상속시킬 아들이 없었다. 용의 그림을 다 그려놓고 눈만 찍지 못한 격이랄까? 게다가 그에게는 장성한 남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다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가 죽으면서 해묵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여기에는 그의 아내까지 한몫 거든다. 왕비 우씨는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시동생을 찾아갔다. 첫째 시동생 발기(發岐)를 유혹해서 왕비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도다. 당시 고구려에는 형이 죽으면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옛 부여의 풍습이 남아 있었으니 오늘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수상쩍게(?) 여길 행동은 아니다【이런 풍습은 전세계 여러 문명권에서 볼 수 있는데, 아마 남편이 죽으면 그 처자식의 생계가 막막해지므로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것이다. 유명한 사례로는 15세기 영국 왕 헨리 8세의 경우가 있다. 그는 형 아서가 젊어서 죽자 여섯 살 연상인 형수 캐서린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결국 왕이 된 다음에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그 후로 다섯 차례나 새 왕비를 얻었고 그 때문에 중세 영국의 왕실만이 아니라 캐서린의 친정인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황실과 로마 교황청까지 발칵 뒤집어놓는 대사건을 불렀다(『종횡무진 서양사』, 「꽃」 3장 참조)】. 하지만 발기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는 아직 형의 죽음을 몰랐지만 형에게 아들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일, 따라서 그 자신이 누구보다 유력한 대권 후보였으니 굳이 우씨의 유혹과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그러자 우씨는 다시 다음 시동생 연우(延優)에게 가는데, 그로서는 어차피 대권과 무관했던 처지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격이다. 그들은 곧장 궁으로 들어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다음날 아침 군신에게 왕의 죽음을 공표하면서 동시에 연우의 왕위계승을 공식화한다. 이제 발등에 불이 붙은 것은 발기다.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한 그는 랴오둥으로 가서 태수 공손탁(公孫度, 그는 고구려 초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랴오둥의 공손씨 정권을 개창한 인물이다)에게 몸을 의탁하고는 랴오둥의 군대 3만을 빌려 고구려를 침공한다. 명백한 반역이요 매국행위지만, 왕족이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곧 당시까지 고구려와 라오둥의 구분이 얼마나 희미했는지, 또 고구려의 정체성이나 민족의식이 얼마나 희박한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사실이다.
차대왕에게 랴오둥의 본토를 내주고 서쪽 끝자락으로 밀려나 있던 랴오둥 태수는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게 됐으니 물론 대환영이다. 그러나 연우에게는 나름대로 대책이 있다. 나라를 배반한 형이 공격해오자 형을 배반한 동생은 막내 계수(罽須)를 보내 싸우게 한다. 과연 거짓말같이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결국 넷째(罽須)에 쫓긴 둘째(발기)는 자살하고 첫째(고국천왕)가 남긴 왕위는 셋째(연우)가 물려 받아 제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이 된다. 토끼를 잡았으니 이제 사냥개 따위는 필요없다. 산상왕은 우씨를 멀리 하고 따로 첩실을 두어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나중에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된다. 집안으로 봐도, 개인적으로 봐도 욕된 과거와의 확실한 단절을 위해 산상왕은 209년, 인근에 환도성을 새로 짓고 왕궁을 그곳으로 옮긴다.
이것으로 어지러웠던 고구려의 왕계는 최종적으로 정리되고 부자 간의 왕위계승이 확립된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죽으면서 부자 상속이 끊어진 지 무려 150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무렵이면 이미 고구려의 역사는 250년 가까이 되지만, 사실 고구려가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성한 것은 이 시기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부족국가의 수준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강역을 확장하고, 왕국으로서 가장 중요한 권력의 승계 제도를 매듭짓고, 행정제도와 관제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갖춘 준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 고구려 역사의 시작은 이제부터다.
▲ 매국의 대가 고구려는 주몽이 창건한 이래 꾸준히 남쪽으로 내려왔다. 수도를 옮길 때마다 조금씩 남하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위쪽 사진은 초기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안의 환도성(국내성)이다. 비록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이것은 아마 원래의 환도성이 아니라 발기의 매국 행위로 공손탁에게 빼앗긴 뒤 산상왕이 다시 지은 환도성일 것이다. 아래쪽 사진은 중국에서 최근 복원한 성곽 일부분인데, 고구려는 우리 역사지만 그 옛 영토는 현재 중국에 속하기에 안타깝게도 중국 측이 관리를 맡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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