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고구려의 역할
중국발 통신
다양한 미스터리와 숱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2세기를 마칠 즈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의 왕조들은 그럭저럭 나라꼴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왕위 세습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관제를 비롯한 초보적인 제도들도 생겨났으니 이제부터는 버젓한 왕국이라 해도 별 하자는 없을 듯하다(거꾸로 말하면 그 전까지는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미비한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이 나라들은 서로 이리저리 얽히며 올망졸망 살아가면서 아주 조금씩 발전해 갔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한반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서쪽에는 이곳보다 훨씬 크고 일찍이 이곳에 문명의 빛을 전해주었던 중국 세계가 있다. 3세기부터 중국 대륙에 몰아친 격변의 회오리는 한반도 역사에 또 한 차례 격변의 계기를 제공한다.
사실 거함(巨艦) 한나라 호는 이미 전한 말기부터 좌초하고 있었다. 왕망(王莽)의 신나라를 타도하고 후한이 들어서면서 간신히 한나라 황실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전한 시대에 노출된 문제점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으므로 제국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게다가 전한 시대에는 외척과 환관이 중앙정치를 쥐고 휘두른 게 문제였지만 후한 시대에는 지방정치까지도 심하게 삐걱거렸다. 조정의 죄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지방 호족들이 자기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긴, 후한의 문을 연 광무제(光武帝) 자신도 지방 호족 출신이었으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니었다【광무제는 한나라(전한)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의 9대손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유방은 원래 지방의 보잘것없는 하급 관리 출신으로,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朱元璋)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고속 승진을 한 인물이다(다른 건국자들은 대부분 제후의 신분이었다). 그런 처지에 전통에 빛나는 제후였던 항우의 초나라를 물리치고 새 왕조를 열었으니 초기부터 권력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하면서 지방의 수령들과 닥치는 대로 통혼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성인 유(劉)를 마구잡이로 하사했다. 그 덕분에 유씨는 아주 흔한 성이 되었으니 설사 광무제가 유방의 후손인 게 사실이라 해도 그리 특기할 만한 일은 아니다. 후한이 멸망하고 난 뒤 『삼국지』의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황실의 성을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건국 이념이 살아 있던 얼마 동안은 그런 대로 제국의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약발이 사라지자마자 후한은 곧 예정된 쇠락의 길을 걷는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정치가 무너진다 해도 나라 전체가 금세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의 폐해가 일반 백성들의 삶에 전달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잠시 번영과 안정이 찾아 왔던 초기 50년 이후에도 후한이 100년이 넘도록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 크다. 그러나 외척과 환관들이 중앙정치를 망가뜨리고 호족들이 지방정치를 말아먹은 데 따르는 폐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사회적 피라미드의 맨밑에 있는 농민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일어난 게 ‘황건(黃巾)의 난’이다. 184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노란 두건을 두른 농민들의 반란이 들끓자 이미 전국을 통어할 힘을 잃은 중앙정부 대신 호족들이 진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대표적인 호족들이 바로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되는 위(魏)의 조조, 오(吳)의 손권, 촉한(蜀漢)의 유비다.
위, 오, 촉은 모두 한나라의 제후국들이다. 그러나 황실이 무너지자 그들은 각기 황실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중국 대륙을 삼분한다. 다시 분열의 대륙풍이 불기 시작한다. 천 년 전 주(周)의 동천(東遷) 이후 전개되었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어 중국의 2차 분열기다. 1차 분열기에 제후국들은 주나라 왕실을 예의상으로만 섬기면서 실은 자기들끼리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2차 분열기의 제후들은 아예 한나라 황실의 문을 닫아걸고 노골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인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獻帝)에게서 제위를 빼앗으면서 한나라는 전한까지 합쳐 422년의 사직을 마쳤다. 천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제후들은 더 이상 제후의 껍데기를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 제후는 왕이 되고 제후국은 왕국이 된다. 중국은 명실상부한 분열을 맞았다.
분열기의 서두는 삼국시대가 장식한다. 『삼국지』로 잘 알려졌듯이 삼국은 당대의 실력자인 위나라, 적통(嫡統)의 상속자인 촉나라, 전통의 계승자인 오나라로 잘 어울렸으나 결국은 실력으로 판가름이 났다. 당대에 달성되지 못한 조조의 야망은 아들이 제위에 오름으로써 성공한 듯했으나 곧이어 265년에 사마씨에게로 권력이 넘어가서 사마염(司馬炎)이 위나라를 닫고 진(晉)을 건국함으로써 중국의 삼국시대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오랜 분열의 서곡에 불과하다. 이후 중국은 589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400년 가까이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맞게 되며, 더욱이 5세기부터는 화북과 강남에 각기 다른 왕조들이 병존하는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사라진 격변의 시기, 이 중심 부재의 시대를 맞아 한반도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난다.
▲ 활에 능한 민족 고구려가 한나라와 위나라 등 중국의 대국들에 맞설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활에 있다. 활을 잘 쏘는 건국자를 둔 탓인지, 일찍부터 동이(東夷,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닉네임을 얻은 탓인지 모르지만 고구려인들은 활에 능했다. 그림은 무용총(舞踊塚)에서 발견된 수렵도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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