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의 세기
탈해왕(脫解王)으로 한 번 삐딱선을 탄 신라의 왕계는 그 다음부터 유리왕의 후손, 즉 박씨 세력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박씨 혈통이 파사-지마-일성-아달라까지 이어지다가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는 다시 석씨 집안으로 옮겨간다. 왕의 성씨가 여러 차례 달라지는데도 별다른 마찰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초기 왕계로 미루어보면 기원후 2세기까지도 신라는 건국 당시의 이주민 국가적 성격이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건국한 지 무려 200년이 넘어설 무렵에도 왕계가 고정되지 못했다면 사실 국가라고 보기에도 수준 미달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신라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의 노력(?) 덕분에 적어도 200년은 길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유일한 공식 문헌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바로 그 무렵, 그러니까 기원후 2세기의 왕계에서 알 수 없는 미스터리를 보여준다. 그것도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의 경우가 모두 그렇다. 왜 하필 건국 초기도 아니고 세 나라가 생겨난 지 100년이 훨씬 지난 2세기에 그런 미스터리가 생겨났을까? 우선 미스터리의 내용을 보자.
먼저 고구려의 경우다. 앞서 보았듯이 고구려의 태조왕(太祖王)은 기원후 53년에 7세의 나이로 즉위해서 146년까지 무려 93년을 재위했으며, 그 후에도 19년을 더 살아 119세로 죽었다. 일단 우리는 그를 한반도 역대 왕조의 왕들 가운데 최장수 챔피언으로 꼽았으나 실은 쉽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당시에 119세까지 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확률상으로 보면 대단히 희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과연 그 사실(史實)은 사실(事實)일까?
아닌 게 아니라 상세히 따져보면 고구려의 건국 시기부터 2세기에 이르는 왕계 전체에 믿기 어려운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부터 덧셈 게임을 약간 해보자. 건국 시조인 주몽이 사망한 해(기원전 19년)부터 11대 동천왕(산상왕山上王의 아들)이 즉위한 해(기원후 227년)까지는 246년의 기간이다. 여기까지야 별로 이상할 게 없지만 문제는 세대수로 셈하면 그 기간 동안 고구려 왕실은 불과 여섯 세대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세대당 평균 재위 기간은 무려 50년에 가깝다. 왕들의 수명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왕으로 있는 기간, 즉 재위 기간이 연속적으로 그랬다면 왕들 모두가 일흔 살을 넘겨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여기에는 의심해볼 여지가 충분하다.
사실 주몽에서부터 6대 태조왕(太祖王)까지는 네 세대인데 그 중 4대 민중왕과 5대 모본왕의 치세가 짧았으므로 이 과정에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2세기의 왕들이다. 태조왕과 7대 차대왕(재위 146~165), 8대 신대왕(재위 165~179)은 모두 형제로, 유리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大武神王)의 동생인 재사(再思)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다. 즉 모두 유리왕의 손자라는 이야기다. 유리왕은 기원전 40년 무렵에 태어나서 기원후 18년에 죽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 재사는 최소한 기원후 18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길래, 또 얼마나 오래 젊음을 유지했길래 기원후 179년까지 산 아들(신대왕)을 둘 수 있단 말일까?
이렇게 보면 태조왕(太祖王)의 비정상적인 재위 기간에는 모종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아마도 거기에는 몇 명의 왕이 누락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일흔다섯 살에 즉위해서 아흔넷에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한 그의 동생 수성(차대왕)의 비정상적인 나이 추산에도 모종의 흑막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원후 53년에서 179년까지 120여년 동안 고령의 형제들 간에 왕위를 계승한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의 재위 기간에는 아마도 밝혀지지 않은 간단치 않은 사실이 숨어 있을 것이다(게다가 명림답부마저 100세를 넘겨 살았다는 것도 이 시기 역사에 관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러나 고구려의 그 이례적인 장수만세만 해도 백제의 경우와 비교하면 오히려 정상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백제 초기 왕계에서는 고구려의 경우보다 더욱 명백한 누락이 보이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겠지만 다시 한번 숫자 놀음을 해보자.
온조(溫祚)의 아들인 백제의 2대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은 온조왕 28년(기원후 1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8년 뒤에 즉위하여 50년간 재위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 때 책봉을 받았다 해도 ‘18 + 50 = 68’, 즉 최소한 68세 이상 수를 누린 셈이다. 여기까진 좋다. 그런데 그 아들인 3대 기루왕(已婁王, 재위 77~128)은 다루왕 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재위 52년이니 그의 수명은 ‘44(다루왕의 나머지 재위 기간) + 52’, 최소한 96세 이상을 장수한 셈이 된다. 약간 고개가 갸우뚱거려지지만 정작 문제는 그 다음이다.
4대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5)은 언제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거의 100세 노인인 기루왕의 아들이었고 39년을 재위했다고 되어 있으니까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그도 역시 최소한 70세 이상은 살았다고 봐야 한다(그것도 기루왕이 60세가 넘어서 개루왕을 낳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어서 5대 초고왕(재위 49년), 6대 구수왕(재위 21년), 7대 사반왕(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즉시 폐위되었다)을 거쳐 8대 고이왕(古爾王)이 즉위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초고왕의 동생)이다. 그렇다면 그는 개루왕의 재위 기간(그의 아버지가 50세에 고이왕을 낳았다 하더라도 20년), 초고왕 시절(49년), 구수왕 시절(21년)을 합쳐 90세가 넘은 노인의 몸으로 즉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도 그는 무려 이후 53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경우도 그와 비슷하다. 신라 미스터리의 주인공도 역시 2세기 왕인 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54)이다. 그에게 이르기까지의 신라 왕계를 보자. 5대 파사왕(婆娑王, 재위 80~112)은 3대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며, 재위 기간 32년이다. 유리와 파사 사이에는 석씨인 4대 탈해왕(脫解王)이 24년간 재위했다. 또 6대 지마왕(祇摩王, 재위 112~134)은 파사왕의 아들이며, 재위 기간 22년이다. 그런데 다음 일성왕은 3대 유리의 맏아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기원후 57년에 죽었는데, 맏아들은 기원후 134년에 즉위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더구나 동생인 파사와 조카인 지마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일성왕은 최소한 77세에 즉위한 게 되는데, 이후에도 그는 20년을 재위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탈해왕이 62세의 노인으로 즉위한 사실을 특기하고 있으면서도 일성왕이 더욱 고령으로 조카 지마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사실에 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전혀 없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모두 2세기에서 왕계가 삐끗거린 이유는 뭘까? 물론 왕계가 역사의 전부는 아니며, 왕들의 계보가 틀렸다고 해서 그 시대의 역사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대에 왕계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제다. 왕들은 각 시대의 중요한 정책 결정자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들이 고대의 달력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따라서 왕들의 계보가 틀렸다면 그에 따라 서술된 다른 기록들도 모두 연대가 틀려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본받아 기전체(紀傳體)의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기전체는 왕의 재위 연도를 기준으로 국가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방식이므로 왕계가 틀리면 모든 게 틀려진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 왕들의 계보는 기원 후 2세기 무렵에서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공통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2세기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든 왕들이 특별히 장수하는 세기였을 리는 없을 테니 여기에는 뭔가 역사상 누락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혹시 그것은 삼국이 함께 연동되어 있는 미스터리는 아닐까?
▲ 『삼국사기』의 참고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는 내용과 체제에서 중국 역사서에 크게 의존했다. 위쪽 그림은 김부식의 영정이고, 아래쪽 그림은 『삼국사기』만이 아니라 역대 중국과 한반도 왕조들의 표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제시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다. 아쉽게도 김부식은 형식만 모방하는 데 그치고 사기의 엄정성까지는 모방하지 못했는데, 2세기 왕계가 엉터리인 게 그 증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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