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건국신화
2세기 왕계에 관한 미스터리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만 그것은 삼국의 왕계가 아니므로 여기서 별도로 다룰 필요가 있겠다. 그 미스터리는 한반도 왕조의 마지막 건국신화와 관련된다. 주인공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金首露王, 재위 42~99)이다. 김수로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의 파사왕과 연루되면서부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의 탈해왕(脫解王)이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나서 기쁜 나머지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씨로서는 최초의 왕이자 일본 출신이었으니 탈해가 굳이 박씨를 다시 후계로 삼지 않으려 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김알지는 유리왕의 아들인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그 덕분에 신라는 다시 박씨 왕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새로운 성씨로서 왕위를 잇기에는 아직 자신의 힘이 부치다고 여긴 걸까? 아니면 신라의 왕위가 그만큼 보잘 것없었다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거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모종의 ‘사건’이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김알지의 양보는 초기 신라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약이 되었다. 파사왕은 신라 최초의 정복군주였기 때문이다. 전대의 왕들이 주로 신생국의 생존과 방어에만 부심한 데 비해 그는 즉위 초부터 군신들에게 병장기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라고 명하면서 ‘공격적인 방어’에 나섰으며, 경주 지역을 벗어난 곳에 처음으로 성을 쌓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대에는 전통적인 외적들인 말갈(북), 백제(서), 왜구(동) 이외에도 남쪽의 가야라는 새로운 적수가 출현했다. 96년 대규모로 신라를 침공해 온 가야군을 맞아 파사왕은 직접 병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출전했는데, 이는 최초로 신라의 왕이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다.
파사와 김수로가 한 가지 외교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다. 102년 신라 인근에 있던 음즙벌과 실직곡이라는 두 나라가 서로 영토 다툼을 벌이다가 신라의 파사왕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선뜻 어느 편을 들어주기가 곤란하다고 여긴 파사는 나이도 많고 지혜도 풍부한 가야의 수로왕에게 자문을 구해 사태를 해결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파사왕이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6부에게 수로왕을 접대하라고 명하자 다른 부들은 고위급 인사를 보냈는데 한지부라는 곳에서만 직급이 낮은 자를 보낸다. 분노한 수로왕은 그만 한지부의 수장을 잡아죽인다.
놀라운 일이다. 6부라면 초기 신라의 내각이나 다름없는 핵심 기관인데, 어떻게 가야의 왕이 그 책임자를 함부로 죽일 수 있었을까? 또 파사왕이 그 ‘주권 침탈 만행’에 대해 변변한 항변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면 수로왕의 권위는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 신라의 남쪽이라면 오늘날 경상남도, 당시 이 지역의 패자로 떠오른 가야는 한반도 초기 왕조사를 ‘삼국시대’에 머물지 않게 한다【사실 삼국시대라는 용어는 삼국 초기와는 무관하고 6세기 이후 삼국이 쟁패하는 시대를 가리킨다. 다만 그 삼국의 뿌리가 기원 전후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삼국시대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될 뿐이다. 굳이 나라의 수로써 시대의 이름을 붙이자면 5세기까지는 ‘이국시대’ 또는 ‘사국시대’라는 이름이 어울릴 듯싶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뒤졌으므로 신라를 배제한다면 이국시대가 된다. 반면 신라를 끼워넣는다면 그와 엇비슷한 국력을 유지하면서 6세기 초반까지 존속했던 가야를 배제할 이유가 없으므로 사국시대가 된다】.
또 하나의 나라가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건국신화가 필요할 것이다. 과연 가야라는 나라도 역시 출발점은 신화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건국자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를 이름밖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의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수로의 신화는 건국신화의 기본 코스를 충실히 따르는데, 박혁거세와 김알지(金閼智)의 신화를 섞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기원후 42년 가야 땅에 사는 아홉 부족의 족장들이 하늘의 명을 받고 산에 올라가 왕을 내려달라고 빌었다. 거북에게 왕을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는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으니 기도 방법치고는 좀 괴상한 것이었지만 과연 효험은 있었다. 하늘에서 금빛 알이 여섯 개 내려왔는데, 거기서 나온 여섯 명이 각기 가야 6국의 왕이 되었다. 김수로는 그 중 맏형으로 금관가야의 건국자다.
김수로 신화의 특이한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왕위에 올라 기원후 199년까지 무려 157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이다. 아무리 2세기가 미스터리의 세기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신화라 하겠다. 앞서 단군신화의 경우에서처럼 김수로의 오랜 재위 기간은 아마도 후계자들이 건국자의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신화적으로 기록된 결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의 아내다. 김수로는 멀리 서역의 아유타라는 나라에서 온 허황옥(許黃玉, ?~188)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아유타는 놀랍게도 인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녀 역시 남편처럼 오래 살아 기원후 189년까지 금관가야의 왕비를 지내다가 157세로 죽었다고 한다.
아유타가 실제로 인도에 있는 나라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허황옥이 서쪽에서 배를 타고 온 것만은 분명하다【아유타에 관해서는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지은이인 일연(一然, 1206~89)은 김수로 신화를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책에서 읽었다는데, 이 책은 11세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승려가 쓴 것이라고 한다(물론 지금은 전하지 않는 책이다). 그 승려가 말한 아유타는 혹시 오늘날 타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승려였던 만큼 그는 아마 허황옥이 불교의 나라에서 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났지만 오히려 인도에서는 얼마 퍼지지 못하고 동쪽으로 가서 동남아시아와 극동으로 전래되었다. 타이는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불교 국가다. 게다가 타이에는 아유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비록 14세기에 세워진 나라이지만 그 이름의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을까? 또 중국 역사서에는 아유타야가 섬라(暹羅)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어 발음은 신라(新羅)와 거의 같다. 신라를 나라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으로 보면 가야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까마득한 옛날에도 섬라와 신라는 어느 정도의 관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은 신라의 다문화적 성격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또한 김수로가 알에서 나왔다는 것은 가야의 외부에서 온 지도자라는 뜻일 터이다. 따라서 김수로는 박혁거세의 경우처럼 부부가 모두 외지인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만 김수로의 출신지는 분명하지 않고 허황옥의 고향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그들은 동향인이 아니었을 것이다(반면 박혁거세의 경우는 부부가 동향 출신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럼 김수로는 어디서 온 인물일까? 물론 추측밖에 가능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에서 부화되었다는 것을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짚어볼 만한 요소는 있다. 김수로가 새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새로 궁궐을 지어 이사할 즈음 한 인물이 그에게 도전을 해온다. 그는 바로 나중에 신라의 4대 왕이 되는 탈해였다. 김수로도 석탈해도 둘 다 젊은 시절이었으니 혈기가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탈해는 감히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다’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두 사람은 곧 싸움에 들어갔는데, 후대의 손오공이 보았다면 서러워할 만한 탁월한 술법으로 치열하게 싸운다. 탈해가 참새로 변하면 수로는 매로 변하고, 탈해가 매로 변하면 수로는 독수리가 되는 식이다. 결국 탈해는 수로에게 한수 뒤진다는 것을 자인하고 가야를 떠나 신라로 간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탈해는 다파나라는 나라 출신이고 『가락국기』의 탈해는 완하라는 나라 출신이다. 그런 탓에 일연은 두 탈해가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어떨까? 두 탈해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 연대도 같으며, 김수로와 일전을 벌인 탈해도 신라로 갔다. 따라서 그들은 동일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탈해는 일본 출신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그렇다면 혹시 김수로 역시 일본 출신이 아닐까? 비록 고향은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함께 바다를 건너 서쪽의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은 처지였기에 권력 다툼을 벌인 것은 아니었을까? 신라의 경우처럼 가야도 초기에는 일본 세력이 상당히 개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야가 이후 일본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대 한반도와 일본 관계사의 일단을 밝히는 추측일 수도 있다. 적어도 한반도 남동부와 일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당시의 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때 일본 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부 국내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왕계의 일본 경영설은 내용으로 보면 정반대지만 그릇된 극우적 역사관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전혀 다를 바 없다. 고대에는 한반도도 일본도 오늘날과 같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의 관계는 어느 한 편으로 흐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 관계의 이름부터 고쳐야겠다. ‘고대 한일관계’라는 표현은 한국도 일본도 없었을 때와는 무관한 말일 테니까.
▲ 외국인 부부? 신라만이 아니라 가야도 이주민 국가로 볼 수 있다. 아마 이주민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존재로 이미 문명의 빛이 밝았던 한반도 서부를 우회해서 남동부로 찾아들었으리라. 왼쪽은 가야의 건국자인 김수로이고 오른쪽은 그의 아내인 허황옥이다. 김수로는 일본 출신일 가능성이 있고 허황옥은 인도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니, 잘 어울리는 외국인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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