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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새 역사의 출발점(주몽, 온조, 박혁거세)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새 역사의 출발점(주몽, 온조, 박혁거세)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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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역사의 출발점

 

 

시대가 달라졌으니 새 출발점이 필요하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대를 열었듯이 이제 한반도 역사의 새 시작을 맞아 새로운 건국신화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중국 측 사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삼국사기주몽(朱蒙)’으로 표기되어 있어 주몽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이 발음과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주몽의 이름은 그 밖에도 추모(鄒牟)ㆍ상해(象解)ㆍ추몽(鄒蒙)ㆍ중모(中牟)ㆍ중모(仲牟)ㆍ도모(都牟) 등으로 다양한데, 고구려 시대에는 한자의 음만 따서 발음을 표기하는 이두문을 썼다. 하지만 그 이름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것은 추모. 고구려인들이 세운 광개토왕릉비추모(鄒牟)’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건국시조 이름을 소홀히 기록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추모라고 써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자의 발음이 지금과 달랐으므로 정확히 추모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추모, 중모, 추몽, 주몽 등은 서로 비슷한 발음이니까 크게 다르지는 않았겠지만(삼국사기가 저술된 고려시대에는 아마 朱蒙鄒牟의 발음이 거의 같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서는 널리 알려진 주몽이라는 이름을 그냥 쓰기로 한다과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 신화. 공교롭게도 두 건국시조 모두 알에서 태어나는데, 이는 필경 아버지의 평범한 혈통을 삭제하려는 의도일 터이다(이러한 난생卵生 신화는 중국 고대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동북아시아 신화의 기본 유형 가운데 하나다).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유화라는 인간 여성을 수태시켜 태어난다. 유화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해모수와 사귄 죄로 집에서 쫓겨나 부여 금와왕의 궁중에서 해모수가 보낸 햇빛을 받아 주몽(정확히는 주몽이 들어 있는 알)을 낳는다. 이는 아마 유화가 금와의 첩실로 들어가서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뜻일 터이다. 환웅처럼 천제의 서자라면 또 모를까, 인간의 서자를 건국시조로 삼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금와왕은 서자 출신이다). 어쨌거나 전하는 바에 따르면 주몽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활을 잘 쏘아 금와의 아들들에게서 시기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재능있는 서자를 시기하지 않을 적자가 어디 있을까? 부여 왕자들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주몽은 처자까지 팽개치고 남쪽으로 도망쳐 압록강 부근의 졸본에서 고구려를 세운다. 이때가 기원전 37, 그러니까 그가 스물한 살 나던 해다(그래서 그는 동명왕 혹은 동명성왕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주몽의 첫 부동산 주몽은 부여 왕자들의 탄압을 피해 남쪽의 졸본으로 내려 왔으나 이곳도 역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산꼭대기에다 성을 짓고 고구려의 출범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은 주몽이 처음 세운 것으로 알려진 오녀산성인데, 현재 중국 랴오닝성에 있다. 주몽은 이 산성을 바탕으로 신흥국 고구려를 크게 일으키게 된다.

 

 

물론 고구려가 성립할 당시 졸본 지역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런 비빌 언덕도 없이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우지끈 뚝딱 나라를 세우기란 아무리 당시라 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침 졸본에는 부호로 이름을 날리던 소서노(召西奴)라는 과부가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확실치 않으나 주몽보다 다소 연상이었던 듯하다. 애정이었을지, 정략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그들은 결혼을 했고 소서노의 재력은 주몽이 새 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소서노에게 비류(弗流)와 온조(溫祚)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들 형제가 주몽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으나, 식민지 시대 민족사학자인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그들을 소서노의 전남편 소생이라고 보는데, 아마 그의 주장이 옳을 듯싶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국 주몽의 계승자가 되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한반도 중부에 새로운 나라 백제를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신생국 고구려가 차츰 안정을 찾아갈 무렵인 기원전 19, 고구려 왕궁으로 느닷없이 한 젊은이가 찾아온다. 그는 바로 주몽이 부여에 두고 온 예씨 부인의 아들 유리(琉璃)였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진 탓에 정표로 남겨둔 부러진 칼을 맞춰보고서야 아들임을 확신한 주몽은 즉각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덕분에 비류와 온조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유리가 주몽의 적자라지만 비류 형제가 주몽의 친자였다면 20년 가까이 지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온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는 일이 가능했을까? 더구나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는 고구려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지 않았는가?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는 데는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승자는 주몽과 유리 부자다. 비류와 온조는 굴러온 돌에 뽑힌 채 고구려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어머니 소서노까지 동반한 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남행열차를 타야 했으니까. 이들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거리를 행군해서 지금의 한강 하류, 바로 서울이 있는 곳에 이른다. 큰 강을 눈앞에 둔 곳에서 형제는 의견이 엇갈렸다. 형 비류는 강을 건너 더 하류로 갈 것을 주장했고, 동생 온조는 지금 이 자리가 좋다고 맞섰다. 당시 그 일대는 낙랑과 말갈이 강성했고 마한에 속하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던 곳, 따라서 비류는 위험을 걱정했을 테고 온조는 산자락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강이 휘감아 돌아가는 오늘날 서울 광진구 아차산 일대의 지세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어머니 소서노는 둘째 아들의 편을 들었다. 결국 비류는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자기 뜻대로 서쪽 미추홀(인천)로 가서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그 자리에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백제다전하는 바에 따르면 온조는 원래 신하 10명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으로 국호를 십제라고 지었다가 나중에 백제로 고쳤다고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설이 있다. 인천으로 간 비류가 결국 나라를 세우는 데 실패하고 돌아온 뒤부터 백제라고 고쳤다는 주장도 있고, 온조가 한강을 건너 오늘날 서울 송파구로 간 뒤 백제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당시 마한 연합국 내에는 백제라는 나라가 있었으므로 아마 이 세력과 연합하면서 이름을 바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인천으로 간 비류에 관해서도 이설이 있다. 그가 세운 나라가 온조의 백제와 연맹을 이루면서 상당 기간 존속하다가 나중에 살림을 합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모두 며느리도 모를 이야기들이지만, 당시에 국가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쟁점은 박혁거세의 경우에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건국신화를 보자(건국될 당시에는 서라벌이라는 이름이었지만 편의상 신라로 통일하기로 하자. 초기 신라를 뜻하는 서라벌, 서벌,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은 모두 음차어이며 신라와 뿌리가 같다). 사실 연대로만 보면 박혁거세가 주몽보다 약간 앞선다. 그는 주몽보다 9년 앞선 기원전 69년에 부화했기 때문이다. 경주 부근에 있는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어느 날 하늘에게 왕을 내려달라고 빌었다. 기도를 마친 뒤 그들은 우물가에서 백마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가보니 붉은 알이 하나 있었다. 촌장들은 이 아이가 장차 세상을 빛나게 하리라는 예감으로 혁거세(赫居世)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바가지 같은 알에서 나왔다 해서 박()씨 성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박씨는 중국에도 없는 한반도만의 토착 성씨다(박혁거세는 나중에 여섯 마을에 각각 이, , , , , 의 성씨를 내렸다고 하는데, 한자도 전래되지 않았던 당시에 신라가 과연 성씨를 썼는지는 의심스럽다. 신라에 한자가 널리 사용되는 때는 6세기 초 지증왕 때부터일 것으로 추측된다).

 

공식 연대에서는 박혁거세가 삼국의 건국자들 가운데 가장 앞서지만 그렇게 된 것은 순전히 고려시대에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金富軾)의 공로다. 경주 김씨에다 신라 중심주의적 사관을 가졌던 김부식은 신라의 역사를 잔뜩 끌어올려 정통성을 강조했으며,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본기가 맨 앞에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역사 왜곡일까? 하지만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중국 문명권에서 가장 먼 신라 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먼저 나라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더구나 후대에 전개되는 삼국의 초기 역사에서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상당히 뒤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라의 건국이 먼저라는 주장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나중에 보겠지만 사실 삼국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성립하는 시기도 실은 신라가 나라꼴을 내기 시작한 법흥왕 이후, 6세기부 터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부식(金富軾)의 행위는 분명히 역사 왜곡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가도 아니고 문학적 상상력도 별로 없는 그가 신라의 초기 역사를 완전히 날조했다고 볼 수는 없다. 나중에 보겠지만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왕명을 받고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엄정하게 서술한 정사(正史)이며, 비록 사대주의 사관으로 도배되어 있어 거슬리기는 해도 없는 역사를 꾸며낸 흔적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건국신화는 어떻게 봐야 할까?

 

우선 내용으로 볼 때 박혁거세 이야기는 신화치고도 지나치게 신화적이다. 같이 알에서 나온 처지였지만 주몽의 경우는 탄생을 둘러싼 정황만 제거하면 그대로 역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스토리가 탄탄한 데 비해, 박혁거세는 날 때부터 왕위가 내정되어 있었으니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더욱이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閼英夫人)의 경우는 한술 더 뜬다. 박혁거세가 13세에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5년이 지났을 무렵 용이 내려와 옆구리를 통해 여자아이를 낳는다. 닭의 부리를 입술 대신 달고 있던 그 아이는 사람들이 목욕을 시키자 부리가 빠지고 정상아로 돌아왔는데, 사람들은 이 신기한 여자아이를 박혁거세와 짝맺어준다.

 

김부식(金富軾)이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면 신라의 건국신화는 김부식 이전 시대부터 전해지던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제작 시기는 아마도 통일신라 시대 초기가 아닐까? 또 각본과 연출을 맡은 것은 당시 신라의 왕실이 아닐까? 후발주자로서 고구려와 백제보다 오래 살아남아 한반도 역사의 적통을 이어받은 데 대한 역사적 변명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한 나라가 시작한 시기는 원래 정확할 수 없다. 나름의 출발점은 있겠지만 나라라는 게 출발선을 긋고 출발하는 육상경기도 아니고 몇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만드는 동아리도 아니니 딱히 언제 생겼다고 못 박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나라라 해도 오늘날과 같은 영토와 주권을 갖춘 나라가 아니니 어떤 정도의 결집체를 나라라고 불러야 할 지도 애매하다. 따라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확히 언제 탄생했느냐는 식의 이야기는 역사 서술의 형식상 필요한 것일지는 몰라도 별다른 의미는 없다(신화적 서술을 싫어하는 김부식이 굳이 건국신화를 앞에 배치한 이유도 사관士官으로서 역사의 시작을 어떻게든 서술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가 기원전 69년 박혁거세의 탄생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신라 왕실과 관련된 집안의 가족사가 그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정도로 여기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사실 신라의 경우에는 왕위 상속제가 자리잡는 것도 훨씬 후대의 일이니까 가족사도 못 되겠지만.

 

어쨌든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삼국은 이렇게 출발했다.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부터가 역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조선에 비해서는 한층 명료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에 그 세 나라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직 신생국인 그들보다는 주변에 무력에서나 전통에서나 더 강한 나라들이 많았다. 따라서 세 나라의 출발을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이후 한반도 역사가 삼국시대로 편제된다는 결과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물이 낳은 부부 이 두 사진의 문 안에는 각각 우물이 하나씩 있다. 위쪽은 박혁거세의 알이 나타난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이고, 아래쪽은 용이 내려와 그의 아내인 알영부인을 낳았다는 알영정(閼英井)이다. 비교적 사실적인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스토리에 비해 신라의 경우 신화적인 냄새가 훨씬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라의 성립이 늦었음을 말해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마이너 역사

새 역사의 출발점

중국의 위기 = 고구려의 기회

고구려의 성장통

물보다 흐린 피

포위 속의 생존

이주민 국가

세 편의 건국신화

미스터리의 세기

마지막 건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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