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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부 화려한 분열 - 1장 고구려의 역할,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삼국정립)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1장 고구려의 역할,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삼국정립)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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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

 

 

일단 방침은 정해졌지만 고구려의 남행은 즉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건국 이후 내내 험난한 생존과 팽창의 과정을 거쳐왔음에도 고구려는 아직 지리적 여건에 따른 태생적인 불안정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고구려는 중천왕(中川王, 재위 248~270) 때인 259년에 아직까지도 정복의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위나라의 테스트를 한 번 더 치러내야 했다. 게다가 권력의 불안도 여전히 고구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자 세습이 정착된 지가 꽤 되었지만 아직도 고구려의 왕위계승은 매끄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이럴 때 맏아들 계승이 몇 대쯤 계속해서 착실히 진행된다면 아마 그 불안은 제거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운도 따라주지 않아 맏아들 승계는 동천왕(東川王)과 중천왕의 겨우 2대만 이어졌을 뿐 다음 서천왕(西川王, 재위 270~292)은 중천왕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는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여기에도 아마 모종의 진통이 있었음직하다. 그 탓인지 서천왕은 만주의 한 부족인 숙신(肅愼)이 침입해 온 것을 계기로 오히려 그들을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평천하(平天下)의 치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치국(治國)과 제가(齊家)에서는 실패한다. 두 동생이 왕권에 도전하여 역모를 꾸민 것이다. 다시 골육상잔인가? 서천왕은 급히 두 동생을 잡아죽이는 극약 처방으로 사태를 진정시키긴 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왕위가 형제간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결국 안으로 곪던 문제는 다음 왕인 봉상왕(烽上王, 재위 292~300) 대에 이르러 쿠데타로 터진다.

 

봉상왕은 즉위하자마자 숙신 정벌의 전공으로 전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던 삼촌(서천왕의 동생) 달가를 살해해서 일찍부터 권력불안증후군을 보인다. 비록 그는 불과 8년간 재위했으면서도 나중에 고구려 역사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지게 되지만, 형제 계승의 가능성이 없었다면 어찌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게다가 곧이어 자기 동생 돌고마저 음모를 꾸며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을까? 그러나 대외의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격변기에 여전히 내부 불안정에 시달린다면 고구려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 급기야 북서쪽에서는 신흥 강호로 등장한 선비(鮮卑)가 고구려를 침공해 온다여기서 대륙의 정세를 한 번 훑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사마씨의 진나라가 삼국시대를 끝내고 잠시 통일 왕조로 군림했으나 이미 시대의 화두는 통일이 아니라 분열이었다. 특히 3세기 후반부터 화북 일대는 이른바 5(‘다섯 오랑캐라는 뜻인데, 물론 후대의 한족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로 불리는 북방 민족들이 주름 잡게 되는데, 이들 중 하나가 선비족이다. 선비족의 근거지는 오늘날 몽골과 만주의 접경 지대였으므로 5호 중의 어느 부족보다도 고구려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봉상왕 시절에 선비족은 특히 발언권이 셀 만도 했다. 진나라에서 벌어진 팔왕의 난(291 ~306)에 끼여들면서 진나라 황실의 권력 투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들이 동방의 소국인 고구려를 얕보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고구려를 침공한 선비 군대가 주력군이었다면 고구려가 버텨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중국의 화북은 그 다섯 오랑캐가 열여섯 개의 나라를 세우고 각축을 벌이는 516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명장 고노자(高奴子)의 선방으로 간신히 물리쳤으나 봉상왕은 힘이 부치는 것을 깨닫고 창조리(倉助利)를 국상으로 임명하는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기여한 공로가 되었다(고노자를 왕에게 천거한 사람도 창조리였다).

 

 

거듭되는 외침에다 흉년과 기근,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도 봉상왕은 여러 차례 궁궐을 수리하고 증축하는 데 여념이 없다. 좋은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의 의도는 어떻게든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봐야 하는 존재이므로 무엇보다 궁궐이 화려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가 직접 한 말이니까. 그런 점에서 그가 취한 입장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된 경복궁을 300년이나 지나서, 게다가 심각한 인플레까지 감수하면서도 굳이 중건하려 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의도와 맥이 통한다. 사실 국가적 위기를 맞아 무엇보다 국왕을 중심으로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없지 않으며, 궁궐의 증축은 그것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측근들의 동의마저 얻지 못하는 정책이라면 설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실패하기 십상이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한 사람이 최익현이라면 봉상왕에게 반대한 사람은 창조리였다. 그러나 줄기차게 상소만을 거듭한 최익현과 달리 창조리는 왕을 갈아치우는 쿠데타를 획책한다.

 

그가 낙점한 새 왕은 바로 봉상왕에게 죽은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었다. 비정한 큰아버지의 눈을 피해 머슴과 소금장수로 은신해 온 을불은 창조리의 비밀 공작으로 팔자에도 없었던 고구려의 왕위에 오른다(최소한 아버지나 형이 왕이어야만 왕위를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바람직스런 현상은 아니겠지만 150년 전 명림답부(明臨答夫)의 경우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귀족들의 쿠데타가 있을 때마다 도약의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과연 귀족의 쿠데타로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 재위 300~331)이 된 소금장수 을불은 나라의 대내외적 우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우선 조카의 즉위를 본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장차 권력 분쟁이 재연될 소지가 사라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외 정책이다.

 

중국의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했던 고구려 역대 왕들의 특징은 한동안 대가 끊겼다가 미천왕에 이르러 다시 부활한다. 그가 바라보는 중국은 물론 혼돈의 도가니다. 팔왕의 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러니까 진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할 통일 제국이 못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무렵 미천왕은 고구려에 기회가 왔음을 감지한다. 예전처럼 랴오둥에 미련을 두지는 않는다. 이제 전선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형성되어야 한다. 특히 모국인 한나라가 멸망한 지 80년이 넘었는데도 한군의 하나가, 더구나 중국과 접경하지도 않은 중국의 군현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큰 모순이다. 미천왕의 눈앞에는 일찍이 동천왕(東川王)이 품었던 따뜻한 남쪽 나라의 꿈이 어른거린다.

 

목표인 낙랑을 치기 전에 미천왕(美川王)은 몸을 풀 겸해서 랴오둥의 현도(지금의 푸순)를 공략하고 서안평을 손에 넣는다. 예상대로 손쉬운 승리다. 곧이어 313년에 드디어 그는 대망의 낙랑 정벌에 성공한다. 자명고가 찢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으니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로써 고구려와 한반도의 역사는 외세를 완전히 물리침으로써 신기원을 맞았다. 이듬해 미천왕은 낙랑 남쪽에 남아 있던 대방(帶方)마저 정복해서 백제와 접경하게 되니, 바야흐로 삼국시대의 시작이다.

 

 

중국의 지방문화재 우리는 고구려를 한반도의 한 왕조로 간주하지만,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고구려의 옛 유적은 그저 하나의 지방문화재 일 뿐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지안에 사는 중국인들은 문화재 관리 시설조차 없는 환도성의 고분들 사이를 누비며 자전거를 타고 있다. 과거의 역사와 오늘의 관점을 어떻게 연관지어야 통시대적인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중국발 통신

대륙국가의 성격

남으로 기수를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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