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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7부 유교왕국의 완성 - 3장 팍스 코레아나, 세종이 뿌린 악의 씨②: 문종과 단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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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7부 유교왕국의 완성 - 3장 팍스 코레아나, 세종이 뿌린 악의 씨②: 문종과 단종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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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뿌린 악의 씨

 

 

세종으로서는 필경 아버지 태종과 영락제(永樂帝)가 서로 닮은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왕권이 안정되었고 나라가 기틀을 잡았으니, 두 번 다시 명 황실과 조선 왕실을 얼룩지게 만든 왕자의 난같은 사건은 없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락제의 치세가 끝난 다음 명나라는 그의 아들들이 순탄하게 제위를 이어가면서 번영기를 맞는다(비록 명나라의 번영기는 역대 어느 제국보다도 짧았지만), 아마 세종은 조선도 그런 길을 걸으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즉위 초까지만 해도 그는 태종이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육조 직속 체제를 강화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면서 각종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지만, 대내외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그의 마음도 한결 느긋해진다. 6진과 4군을 개척해서 영토까지 크게 확장된 1436년에 다시 의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로 복귀한 것은 그런 여유에서였을까?

 

그러나 조선이 처음부터 사대부 국가로 출발한 데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유교왕국이란 왕과 관료(사대부)라는 권력의 두 축이 절한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고, 그 균형이 기울어지면 언제든 내재된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런데 원래 저울이 균형을 유지하는 기간은 언제나 잠시일 뿐이다. 따라서 그 미묘한 균형이 마냥 지속되리라고 여겼다면 그것은 세종의 착각이다. 명나라도 역시 사대부의 힘을 황제가 성공적으로 제어하는 한에서만 안정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면, 그나마 환관이라는 충실한 도구마저 없는 조선의 왕권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미지수였다.

 

가장 큰 장점은 오히려 단점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황희(黃喜, 1363 ~ 1452)를 비롯하여 신개(申槩, 1374 ~ 1446), 최윤덕, 하연(河演, 1376 ~ 1453) 등 인품과 학덕이 모두 뛰어난 정승들을 거느린 세종은 어진 임금 밑에 어진 신하들이 있는 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에도 의정부 정승들이 그를 받들 듯이 다음 왕을 모셔주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없었다. 더욱이 그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키운 집현전 학자들은 이제 단순한 연구자' 의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비록 세종은 학자와 관료를 구분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을 수십 년씩이나 다른 직책으로 전직시키지 않고 집현전에만 묶어두었으나 유교 이념의 속성상, 그리고 유교왕국의 생리상 학문적 권력 이 정치적 권력으로 바뀌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계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文宗, 1414 ~ 52, 재위 1450 ~ 52)이 제공한다. 물론 너그럽고 온유한 데다가 아버지의 위업을 충실히 계승하려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던 문종이었으니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문제는 병약한 그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열한 살짜리 어린 외아들인 단종(端宗, 1441 ~57, 재위 1452~55)이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시작된다. 어린 손주가 당할 비극을 미리 예상했더라면 세종은 결코 그렇게 사대부들의 기를 살려주지 않았겠지만, 실은 알았더라도 그가 별로 손을 쓸 여지는 없다. 그가 태종의 셋째 아들로서 즉위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의 왕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세종이 뿌린 악의 씨는 개국 초부터 잠복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유교왕국의 모순은 팍스 코레아나로 완전히 제거된 게 아니라 잠시 발현이 지연되고 있었던 셈이다.

 

 

 행정가 황희 그려시대에 관직에 진출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스스로 은거했으나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인정한 여러 관료들의 천거로 다시 일선 복구했다. 그는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반대할 만큼 건실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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