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을 품은 왕③
성종 치세에 사림파가 훈구파에 맞설 만큼 성장하자 불안해진 것은 훈구대신들이다. 특히 성종의 큰 존경을 받았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1454 ~ 1504), 정여창(鄭汝昌, 1450 ~ 1504), 김일손(金馹孫, 1464 ~ 98) 등 이른바 영남학파 학자-관료들이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스승의 명성에 편승해서 사림파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훈구파의 타깃은 자연히 김종직 일파에게로 향한다. 남이의 사건에서 보듯이 원래 꼬투리만 잡으면 실체가 없는 사건도 훌륭하게 역모로 엮어내는 게 훈구파의 특기가 아니던가? 과연 남이의 사건에서 ‘말만의 역모’로써 신흥 반대파를 쉽게 제거했던 유자광은 여기서도 크게 한 건 올린다.
사실 유자광은 개인적으로도 사림파를 물고 늘어질 꼬투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앞서 남이의 사건에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모함을 일삼는 소인배라며 공개적으로 경멸했기 때문이다. 비록 큰 모욕이긴 하지만 사적인 원한만으로 반대파를 공격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때를 기다리며 ‘건수’를 노린다. 때마침 동병상련을 겪는 동지가 출현한다. 1483년 정희왕후가 죽었을 때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극돈(李克墩, 1435 ~ 1503)이 국상을 맞아 근신하지 않고 기생들과 술판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사관의 귀에까지 들어가 사초에 기록된 것이다. 그 사관이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인 김일손이다. 이극돈 역시 훈구파의 한 보스였으므로 자연히 유자광과 함께 사림파에 대한 한풀이를 도모하게 된다【사초(史草)란 춘추관의 사관들이 매달 시정을 기록한 것인데(이것을 시정기時政記라 부른다), 나중에 왕이 죽고 난 뒤 실록을 편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실록의 ‘초고’인 셈이니, 이극돈은 그 기록을 그대로 놔두면 실록(그의 경우에는 『성종실록』)에까지 올라 대대손손 남게 된다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원래 사관은 사초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런 원칙이 매번 엄격히 지켜질 수는 없다. 그래서 사초의 내용이 누설되면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는데, 이번 경우가 그런 예다】.
사림파가 끗발을 올렸던 성종의 치세에는 꾹 참고 지냈던 그들이지만 이제 연산군이 즉위하고 사림의 대부인 김종직도 죽었으니 때가 왔다고 판단한다. 1498년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고 공교롭게도(과연 우연이었을까?) 이극돈이 그 책임자가 된 것은 절호의 찬스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아무리 상사라 해도 사관이 작성한 사초의 내용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문제될 만한 내용을 공개해서 사건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이극돈이 주목한 것은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이 작성한 이른바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초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김종직이 성종 때 쓴 것으로, 초나라의 항우가 황제인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사건을 운문체로 비판한 내용이다. 옛 고사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글이 씌어진 때가 때인지라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비난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아무리 성종의 존경을 받는 김종직이라 해도 노골적으로 세조를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간접 비판의 형식을 취했으리라). 게다가 그 글을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김종직이 그 글을 통해 은연중 충정을 나타냈다”는 평가까지 덧붙여 놓았다.
이극돈은 즉각 유자광에게 통보했고 유자광은 즉각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훈구파의 양대 보스인 노사신과 윤필상을 움직여 연산군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다(노사신은 친척들을 멋대로 관직에 등용했다가 사림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있었으니 역시 사적인 원한이 크다). 물론 세조를 비난하는 것은 연산군(燕山君)의 조상을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성종도 묵과한 일을 그가 발끈한 데는 말할 것도 없이 평소에도 사림파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성리학을 앞세우며 왕에게까지 수신(修身)을 요구하는 건방진 사대부(士大夫) 사림파를 싫어했던 연산군은 기꺼이 훈구파의 책략에 넘어간다. 이렇게 해서 1498년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로 알려진 무오사화(戊午士禍)다(사초 문제로 비롯된 사건이니까 무오 ‘사화(史禍)’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1498년이 무오년이기 때문에 간지에 따른 이름이다).
죽은 김종직(金宗直)이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뜯어내고 시신의 목을 자르는 형벌)된 것을 필두로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등 사관들은 능지처참(陵遲處斬, 죄인을 죽인 다음 시신을 여섯 개로 쪼개 전시하는 형벌)을 당했고, 그밖에 사림파 계열의 학자-관료 수십 명이 곤장을 맞고, 유배되고, 파면되고, 투옥되었다. 심지어 중앙 관직에 오른 적이 없는 정여창까지도 사림의 태두라는 비공식적인 괘씸죄로 유배형을 받았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