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군주 길들이기
폭탄을 품은 왕
당연한 말이지만 원래 강한 왕권은 강한 왕의 것이다. 그런데 대개 강한 왕이란 새 왕조를 세우거나 정변으로 집권한 왕인 경우가 많다. 건국자나 성공한 쿠데타의 리더는 그 인물됨과 상관없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공인받을 수 있으며, 이는 자연히 강력한 왕권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본 조선 초기의 역사에서는 태종과 세조가 그런 임금이었다. 그 뒤를 이은 세종과 성종은 사실 전 왕들이 다져놓은 강력한 왕권 덕분에 왕권과 신권, 즉 국왕과 사대부(士大夫)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안정과 번영의 치세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강하면 사대부는 자연히 국왕에게 협조하면서 관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왕권이라도 몇 대에 걸쳐 약발이 지속되기는 어렵다. 태종과 세종이 누린 왕권도 문종과 단종(端宗)에게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동안 왕권에 눌려 지내다가도 왕권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즉각 사대부들이 도전해오기 때문이다. 왕의 인물됨이 유약하거나 성격이 포악하거나 할 경우, 사대부들은 왕을 가지고 놀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예종(睿宗)이 사대부의 놀잇감이었다면, 성종의 맏아들로 1494년에 왕위를 이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은 사대부(士大夫)의 도구로 활용된 경우다. 그는 사대부에게 저격당해 날개를 접은 최초의 군주가 된다【다른 군주들처럼 종(宗)이나 조(祖)자가 들어간 묘호를 받지 못하고 연산군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남은 사실 자체가 그 점을 말해준다(조선 왕계에서 보통은 ‘종(宗)’은 전 왕의 직계일 경우, ‘조(祖)’는 방계일 경우에 쓴다), 한 왕의 치세가 끝나면 다음 왕의 치세 초기에 전 왕에 관한 실록을 편찬하는데, 그 담당자는 춘추관(春秋館, 역사 기록을 담당한 관청이자 서고)에 소속된 사관(史官)이므로 실록 내용에 사대부의 관점이 강하게 투영되는 건 당연하다. 물론 현직 왕의 감수를 받지만 후임 왕이 전 왕을 타도하고 들어선 경우라면 사대부(士大夫)의 주장을 거부할 수 없다. 게다가 왕의 묘호를 정하는 것도 사관의 고유 권한이다. 연산군은 사대부의 배척을 받았기 때문에 군주였음에도 군주에 어울리는 묘호를 받지 못했다(그래서 그의 치세를 적은 기록도 다른 왕들처럼 ‘실록’이 아니라 ‘일기[연산군일기]’로 불린다)】.
사실 연산군은 세자로 책봉될 때도 아버지를 상당히 고민하게 만들었을 만큼 성격상의 결함이 있었다. 비록 나중에 그를 폐위시킨 사대부들의 일방적인 견해이기는 하지만, 학문을 싫어하고 폭력을 즐긴 데다 잔인한 고문 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전형적인 폭군이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굳이 그를 변명하자면 거기에는 가정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 실록과 일기의 차이 위가 『성종실록』이고 아래가 『연산군일기』다. 연산군은 사대부들이 추존하는 국왕의 묘호를 받지 못했기에 그의 치세를 서술한 기록도 아버지 성종의 기록처럼 실록이 되지 못하고 일기에 머물렀다(사진 오른쪽 윗부분에 ‘日記’라고 쓴 게 보인다). 물론 그가 폭군이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군주에게서 사후의 권리마저 빼앗은 것은 사대부(士大夫) 국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문제의 발단은 성종 때인 1476년 성종의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죽으면서부터다(한명회에게 딸이 더 있었더라면 즉각 후임 왕비로 들였으리라). 그녀는 아들은커녕 딸도 남기지 못하고 열여덟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첫해였으니 후사도 후사지만 왕비 자리를 공석으로 남길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숙의(淑儀, 후궁의 하나)였던 윤씨(원래 왕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만 왕비는 대개 이름 대신 시호만 전해지는데, 윤씨의 경우에는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도 받지 못했다)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과연 그녀는 바로 그 해에 아들(연산군)을 낳아 성종을 흡족케 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성종은 유달리 여색을 밝혔다. 윤비는 유달리 질투심이 강한 여자였으니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아들을 낳은 위세를 등에 업고 그녀는 다른 후궁들에게 심한 투기를 보였으며, 급기야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까지 일으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1437~1504, 덕종의 비 소혜왕후)와도 고부 갈등을 빚었다.
일반 가정 내의 다툼이라면 별 것 아니겠지만 왕실의 부부싸움이고 고부갈등이기에 문제가 된다. 이런 왕실의 허점을 사대부(士大夫)들이 놓칠 리 없다. 그래도 다수는 왕실 내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좌의정 윤필상을 비롯해서 한치형(韓致亨, 1434~1502), 성준(成俊, 1436~1504), 이극균(李克均, 1437~1504) 등 일부 대신들은 윤비의 행실을 공격하며 ‘자질론’을 거세게 주장한다. 이에 밀린 성종은 결국 1479년에 윤비를 폐위시키고 3년 뒤에는 사약까지 내렸다. 이미 사대부는 왕실의 사건을 빌미삼아 왕비마저 퇴출시킬 만큼 왕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죽은 이듬해인 1483년에 연산군(燕山君)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 ‘어른들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상세히 전할 필요는 없었을뿐더러 장차 왕위를 계승할 세자에게 자신의 생모가 겪은 비극을 알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비밀에 부쳐졌으나 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연산군이 과연 진정으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상 성격을 지니게 된 데는 필경 생모의 그런 운명에서 받은 영향이 컸으리라.
그래도 일단 즉위 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왜구와 건주여진이 해안과 변경을 침략하는 사건이 잦은 탓에 연산군은 비융사(備戎司)라는 특별기관을 두어 철갑옷과 투구를 생산하게 했고, 북도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장기적인 국방의 안정을 꾀했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했음에도 그 전부터 진행된 문헌 편찬 사업을 독려해서 완간시키기도 했다. 아마 이는 성종 대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장된 덕분이겠지만, 어쨌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순조로운 출발이다. 그런 분위기를 산산조각 내고 연산군의 내부에 숨어 있던 폭탄이 터지게 만든 건 사대부들이다.
성종 치세에 사림파가 훈구파에 맞설 만큼 성장하자 불안해진 것은 훈구대신들이다. 특히 성종의 큰 존경을 받았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일손(金馹孫, 1464~98) 등 이른바 영남학파 학자-관료들이 학문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스승의 명성에 편승해서 사림파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훈구파의 타깃은 자연히 김종직 일파에게로 향한다. 남이의 사건에서 보듯이 원래 꼬투리만 잡으면 실체가 없는 사건도 훌륭하게 역모로 엮어내는 게 훈구파의 특기가 아니던가? 과연 남이의 사건에서 ‘말만의 역모’로써 신흥 반대파를 쉽게 제거했던 유자광은 여기서도 크게 한 건 올린다.
사실 유자광은 개인적으로도 사림파를 물고 늘어질 꼬투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앞서 남이의 사건에서 김종직은 유자광이 모함을 일삼는 소인배라며 공개적으로 경멸했기 때문이다. 비록 큰 모욕이긴 하지만 사적인 원한만으로 반대파를 공격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때를 기다리며 ‘건수’를 노린다. 때마침 동병상련을 겪는 동지가 출현한다. 1483년 정희왕후가 죽었을 때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이 국상을 맞아 근신하지 않고 기생들과 술판을 벌인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이 사관의 귀에까지 들어가 사초에 기록된 것이다. 그 사관이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인 김일손이다. 이극돈 역시 훈구파의 한 보스였으므로 자연히 유자광과 함께 사림파에 대한 한풀이를 도모하게 된다【사초(史草)란 춘추관의 사관들이 매달 시정을 기록한 것인데(이것을 시정기時政記라 부른다), 나중에 왕이 죽고 난 뒤 실록을 편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실록의 ‘초고’인 셈이니, 이극돈은 그 기록을 그대로 놔두면 실록(그의 경우에는 『성종실록』)에까지 올라 대대손손 남게 된다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원래 사관은 사초를 공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런 원칙이 매번 엄격히 지켜질 수는 없다. 그래서 사초의 내용이 누설되면서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흔히 있었는데, 이번 경우가 그런 예다】.
사림파가 끗발을 올렸던 성종의 치세에는 꾹 참고 지냈던 그들이지만 이제 연산군이 즉위하고 사림의 대부인 김종직도 죽었으니 때가 왔다고 판단한다. 1498년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고 공교롭게도(과연 우연이었을까?) 이극돈이 그 책임자가 된 것은 절호의 찬스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아무리 상사라 해도 사관이 작성한 사초의 내용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실록이 편찬되기 전에 문제될 만한 내용을 공개해서 사건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이극돈이 주목한 것은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이 작성한 이른바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초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김종직이 성종 때 쓴 것으로, 초나라의 항우가 황제인 의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사건을 운문체로 비판한 내용이다. 옛 고사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글이 씌어진 때가 때인지라 누가 보기에도 그것은 세조가 단종(端宗)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사건을 비난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아무리 성종의 존경을 받는 김종직이라 해도 노골적으로 세조를 공격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간접 비판의 형식을 취했으리라). 게다가 그 글을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김종직이 그 글을 통해 은연중 충정을 나타냈다’는 평가까지 덧붙여 놓았다.
이극돈은 즉각 유자광에게 통보했고 유자광은 즉각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훈구파의 양대 보스인 노사신과 윤필상을 움직여 연산군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다(노사신은 친척들을 멋대로 관직에 등용했다가 사림의 공격을 받아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있었으니 역시 사적인 원한이 크다). 물론 세조를 비난하는 것은 연산군(燕山君)의 조상을 비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성종도 묵과한 일을 그가 발끈한 데는 말할 것도 없이 평소에도 사림파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성리학을 앞세우며 왕에게까지 수신(修身)을 요구하는 건방진 사대부(士大夫) 사림파를 싫어했던 연산군은 기꺼이 훈구파의 책략에 넘어간다. 이렇게 해서 1498년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사화(士禍)로 알려진 무오사화(戊午士禍)다(사초 문제로 비롯된 사건이니까 무오 ‘사화(史禍)’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1498년이 무오년이기 때문에 간지에 따른 이름이다).
죽은 김종직(金宗直)이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뜯어내고 시신의 목을 자르는 형벌)된 것을 필두로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등 사관들은 능지처참(陵遲處斬, 죄인을 죽인 다음 시신을 여섯 개로 쪼개 전시하는 형벌)을 당했고, 그밖에 사림파 계열의 학자-관료 수십 명이 곤장을 맞고, 유배되고, 파면되고, 투옥되었다. 심지어 중앙 관직에 오른 적이 없는 정여창까지도 사림의 태두라는 비공식적인 괘씸죄로 유배형을 받았다.
물론 사건이 이렇게 비화된 데는 유자광이라는 모리배의 역할이 컸으나, 이 사건을 단순히 개인들 간의 불화와 원한이 빚어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훈구파와 사림파의 파워게임으로만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남이의 사건에서 보았듯이 다시 ‘말만의 역모’가 엄청난 피바람을 불렀다는 점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독특한 현상은 조선식 유교 정치의 특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교 정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설사 실력에서 앞선다 해도 명분에서 뒤지면 권력다툼에서 패배하게 된다. 성종의 치세에 사림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의 지원도 있었지만 온갖 수단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급급한 훈구파에 비해 사림파가 유교적 명분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또한 힘에서 사림파를 압도함에도 불구하고 훈구파가 사화(士禍)를 일으키기 위해 굳이 구실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렇듯 정치에서 명분이 가장 중요했기에 ‘말만의 역모’라 해도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이 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 정치도 옛 유교 정치의 폐단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밝혀준 또 다른 사실은 조선의 성격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은 형식상으로 보면 왕국이지만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사대부(士大夫) 왕국이다. 왕은 모든 권력의 중심이지만 실제적인 권한은 사대부 관료들에게 위임하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왕권과 사대부의 권력, 즉 신권 사이에는 늘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내포되어 있다. 개국 초기에는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했으므로 사대부 관료 세력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으나(정도전이 섣부르게 사대부 국가를 건설하려다 파멸한 것은 앞서 본 바 있다), 점차 사대부(士大夫)의 힘이 성장하면서 특별히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지 않은 왕은 언제든 사대부에 의해 퇴출될 수 있게 된다. 연산군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빚은 것은 어찌 보면 왕권이 신권을 확실히 제압할 만큼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지만, 실은 발단과 진행 과정이 모두 훈구파의 조종을 받은 것이었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왕이 사대부의 손에 놀아났다고 봐야 한다. 개국 초에 사대부는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에만 그쳤으나 이제 사대부는 군주를 입맛에 맞도록 길들이는 작업에 나서게 된 것이다. 이 점은 곧이어 또 한 차례의 사회를 겪으면서 더 분명해진다.
▲ 바다와 이어질 뻔한 경회루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된 인물들은 대개 후대에 볼 만한 유적을 남겼다. 진시황제의 여산릉이나 수 양제의 대운하가 그런 예다. 연산군도 하마터면(?) 그런 걸작을 남길 뻔했다. 그는 궁성의 지하에 수로를 뚫어 밀물 때 한강 하구를 통해 마포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경회루 앞의 연못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대역사를 벌였으나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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