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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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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정세 인식의 차이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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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인식의 차이

 

 

그제야 조선 정부는 처음으로 긴장한다. 1590년 실로 오랜만에 통신사(通信使)이 통신사는 15103포 왜란으로 단절된 이후 80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원래 조선 초기부터 조선과 일본의 바쿠후 정권은 정규 사절단을 주고받았는데, 조선 측에서 보낸 것을 통신사라고 불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양국의 자세다. 조선은 함께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지위이므로 일본도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겼지만(그래서 교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황제가 책봉하는 것은 바쿠후의 쇼군일 뿐 일본 천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실권 없는 천황이지만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으니 조선과 달리 일본은 엄연히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 사절단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불렀는데, 이는 쇼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일본국왕도 천황이 아니라 쇼군을 가리킨다)를 일본에 보낸 건 도요토미의 요구도 있었지만 과연 일본의 힘이 어느 정도기에 감히 중국을 침략하려 하는지 궁금한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관인 것은 통신사의 보고 내용이다. 조정이 두 파로 나뉘어 있으니 국정의 모든 사안마다 양측을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보내는 통신사도 양측 사람으로 안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인 황윤길(黃允吉, 1536 ~ ?)은 서인이었고, 부사(副使)인 김성일(金誠一, 1538 ~ 93)은 동인이었다. 비록 나라 안에서는 코를 깨물고 싸우더라도 나라 밖에서는 국익을 도모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는 게 정치인의 도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함대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이다.

 

아무리 같은 사실을 두고도 입장에 따라 달리 보게 마련이라지만 이런 정세 인식의 차이는 좀 심하다. 그러나 더 웃기는 건 조정의 태도다. 정사와 부사가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는데도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을 채근하지 않고 부사인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 와중에 벌어진 정철(鄭澈)건저(建儲) 문제로 동인이 우세해진 탓이었으니, 당시 조선 정부가 얼마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는지를 알 수 있다이 점을 보여주는 그 시기 조정의 대화를 한 토막 살펴보자. 1591년 건저 문제를 앞두고 정철과 유성룡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지금 대옥(大獄, 정여립의 사건)이 끝났으니 앞으로 국사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세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을 때 도성을 버리고 달아난 선조(宣祖)는 중신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도요토미가 중국을 정복할 힘이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국운은 금년이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적 정여립이 늘 점치기를 경인년은 보통으로 길하고 임진년은 크게 길하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금년 국운은 불길할 것입니다.” “나의 잘못은 다른 죄가 아니라 명나라에 충절을 다하느라고 미친 왜적에게 노여움을 산 것이다.” 일본 침략을 코 앞에 두고서도 세자 책립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본 사대부(士大夫), 그리고 일본군이 침략해 온 상황에서 사대의 의무를 앞세우는 국왕, 이랬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조정의 그런 결정에 따라 황윤길이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에 들러 얻어 온 조총 두 자루는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렸으며, 침략에 대비해서 쌓던 성들도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엉뚱한 통신 당쟁으로 제 코가 석 자인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남의 코를 볼 여유가 없다. 80년 만에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의 엇갈린 일본발 통신도 그 때문에 빚어진 코미디다. 그림은 조선통신사 행차 장면인데, 이처럼 폼잡고 갔어도 제 몫은 전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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