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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허망한 북벌론③: 효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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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5장 복고의 열풍, 허망한 북벌론③: 효종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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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북벌론

 

 

1649인조(仁祖)가 죽자 봉림대군은 효종(孝宗, 1619 ~ 59, 재위 1649 ~ 59)으로 즉위했다. 서인 정권으로서는 2대째 연이어 국왕을 옹립한 셈이다. 인조도 반정으로 즉위했다는 약점 때문에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그는 형이 죽음으로써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형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의식도 있었으니 여러 가지로 왕권을 내세울 수 없는 처지다. 사대부들은 그런 효종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소현세자를 살해한 음모보다 더 크고 더 황당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북벌(北伐)이다.

 

북벌이라면 청나라를 친다는 계획이 아닌가? 그런데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복속된 조선으로서 감히 생각할 수 있는 구상일까? 물론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청나라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국내의 반대 세력, 즉 친청파(親淸派)를 제거해야 한다.

 

반정 이후 서인 정권이 오래 지속되면서 서인들도 두 파로 갈렸다(파를 갈라 다투는 건 조선 사대부들의 전매특허다). 인조(仁祖)의 치세에는 반정에 직접 가담한 이른바 공서파(功西派)가 주류였고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가 비주류였다. 두 차례의 전란에서 주화론자가 다수였던 탓으로 자연히 공서파는 친청파가 되고 청서파는 반청파로 편제된다. 1647년에 최명길이 죽으면서 공서파이자 친청파의 단독 보스에 오른 자는 김자점(金自點, 1588 ~ 1651)이었다그는 바로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과 세 아들을 제거하는 음모의 총지휘자였다. 그런 그가 친청파를 이끌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수준을 읽을 수 있다. 소현세자야말로 청나라를 우호적으로 대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을 발전시키려 했던 친청파가 아닌가? 하지만 불행히도 김자점의 친청파는 그와 크게 다르다. 그들은 오로지 청나라와 결탁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게 목적이었으니, 정치 철학이나 이념 같은 게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비록 편협한 성리학적 세계관이나마 나름대로 학문적인 자세에서 논구하려 했던 당쟁 초기, 100년 전의 사대부(士大夫)들에 비해 크게 퇴보한 모습이다.

 

병조판서로 병권을 장악한 데다 손자를 인조의 소생인 효명옹주와 혼인시켜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떨치던 김자점, 그러나 그는 인조가 죽은 뒤 곧바로 청서파의 송준길(宋浚吉, 1606 ~72)로부터 탄핵을 받아 실각한다. 사실 공서파는 반정으로 집권한 이상 인조의 사후에는 권력을 보장받을 수 없는 운명이었으나, 그래도 그로서는 권좌에서 물러난 게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제 그가 매달릴 것은 오로지 청나라뿐, 그래서 그는 청서파가 북벌을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알려 권토중래를 꿈꾼다. 예상한 대로 청나라는 군대와 사신을 보내면서 신속한 반응을 보였지만 청서파의 대응은 더 신속했다. 효종(孝宗)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자 김자점은 곧바로 반역자가 되어 버린다. 그가 처형당함으로써 조정은 청서파와 반청파의 독무대가 되었다(불행히도 전란으로 한동안 중단되었던 말만의 역모가 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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