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의 중화란?②
유럽인들이 극동 3국 중 유독 조선에만 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조선이 중화세계가 되었음을 알기라도 한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럼 조선의 영토가 작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다. 비록 한반도가 일본보다는 조금 작다 해도 일본과 중국에 자주 왔던 서양의 무역선들이 한반도의 존재 자체를 발견조차 못했을 리는 만무하다.
조선에 서양인이 온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한반도에 처음 온 서양인은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 朴延, 朴燕)이다. 그는 인조(仁祖)의 치세인 1628년에 왔지만, 원래부터 조선에 오려 한 게 아니라 일본으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었다. 동료 두 명과 함께 관원에게 잡힌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박연(朴燕)이라는 조선식 이름까지 받고 훈련도감(訓鍊都監)【훈련도감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전란 후에 상설화된 5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지만 어쨌든 이제야 비로소 조선에는 상비군다운 군대가 생겨났다. 기존의 5위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5군영이지만, 실은 이것 역시 전국적인 군 조직은 되었고 수도방위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청나라의 침략을 맞아서는 제 기능도 하지 못했지만, 참고로 5군영은 수도를 맡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禁衛營)과 수도 외곽을 맡은 총융청, 수어청(守禦廳)으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갖춰진 것은 숙종 때다】에서 총포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다른 두 명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했다).
그 뒤 얼마 지나서 다시 조선에 서양인이 오는데, 이번에도 역시 일본에 가던 네덜란드 무역선이 난파하여 제주도에 상륙한 케이스다. 1653년 네덜란드의 무역선 한 척이 대만에서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선원 64명 중 28명을 잃고 36명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관원들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선원들은 이후 14년간이나 조선 정부에 억류되어 있다가 8명이 탈출에 성공하여 1668년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중 한 명인 하멜은 억류 생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썼는데, 이 책은 한반도를 서양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 제주도의 푸른 눈 1668년 네덜란드에서는 『하멜 표류기』라는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원래는 다른 제목의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그림은 거기에 실린 목판화다. 제주도에 난파된 하멜 일행이 이후에 겪은 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다섯번째 컷에서는 조선 국왕(효종)이 마치 유럽의 국왕처럼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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