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의 정점②
1680년 봄 허적은 집안의 경사를 맞았다. 그의 할아버지 허잠(許潛)의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허잠은 생몰년도가 전하지 않으나 당시 일흔인 허적의 나이로 보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은 아마도 허적이 힘을 쓴 탓이리라). 사대부(士大夫)라고 해서 누구나 그런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니니 당연히 잔치가 없을 수 없는 일,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따라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늙은 영의정을 배려해서 유악(油幄, 기름 천막)을 그의 집으로 보내게 했는데, 문제는 거기서 터진다. 비가 오는 것을 보고 허적은 왕의 허락을 받기도 전에 유악을 가져다 사용한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궁중 비품을 가져다 쓴 허적의 방자함에 숙종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제 나이 열아홉인 젊은 군주가 무슨 사건을 엮을 수 있을까? 아마도 별것 아닌 일을 하나의 사건으로 키운 것은 서인들의 작업이었을 것이다. 일단 숙종은 남인 계열의 훈련대장을 경질하고 2차 예송으로 유배되어 있던 서인의 보스인 김수항(金壽恒, 1629 ~ 89) 을 불러들여 남인에 대한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그 정도에 그칠 거라면 서인들은 애초에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이다. 며칠 뒤 허적은 자신의 아들 허견(許堅)이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소식들 듣고 고개를 떨군다. 결국 그들 부자와 윤휴 등 남인의 주요 보스들은 모조리 사약을 받았고,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경신년에 국면이 뒤바뀌었다고 해서 이 사건을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부른다.
아무런 음모나 행동도 없이 말만으로 반대파를 간단히 제거하는 말만의 역모는 이제 다시 본 궤도에 올랐다. 사대부(士大夫) 국가의 ‘전통’ 이 완전히 부활했다고 할까? 그렇다면 그런 식으로 집권한 서인의 권력도 오래 가지 못하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연 서인이 몰락하는 과정은 남인과 닮은꼴이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렸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하마터면 남인에 의해 죽을 뻔한 송시열(宋時烈)은 당연히 강경파이고, 그의 제자였으나 사적인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윤증(尹拯, 1629 ~ 1714) - 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했다가 성의 없는 대우를 당하자 사제지간을 끊었다 - 과 한태동(韓泰東, 1646~87) 등은 온건파다. 양측의 보스들 간에 연배 차이가 한 세대쯤 나기 때문에 노장파는 노론(老論), 소장파는 소론(少論)이라 불리게 된다【대립의 음영이 깊으면 그 그늘을 활동 무대로 삼는 회색분자가 출현하게 마련이다. 조정이 온통 서인과 남인으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박쥐처럼 처신한 김석주(金錫冑, 1634 ~ 84)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2차 예송 때 허적과 결탁해 서인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으나, 유악 사건으로 허적이 실각하자 번개처럼 서인으로 변신해서 허견의 역모를 꾸며내 공신으로 책봉된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한 계기도 실은 그가 마련했다. 그가 남인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고 설치는 바람에 서인의 소장파가 반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처신할 수 있었던 데는 숙종의 배후 지원이 있었으므로 그를 일종의 왕당파라 볼 수도 있겠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죽고 나서부터는 숙종이 정치 무대에 직접 나서서 왕권 강화를 도모하게 된다】.
아직 소론은 ‘의미있는 소수’에 불과할 뿐 정권을 담당할 힘은 없다. 그래서 일단 노론이 주도하는 분위기에서 서인은 한동안 잘 나간다. 그러나 송시열은 편안하고 느긋한 여생을 보낼 팔자는 못 되었다. 비록 만년에 유배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평생토록 승자의 길만을 걸으며 과분한 명예와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宋時烈)은 팔순이 넘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게 된다. 그것도 평소에 전혀 적수로 여기지도 않았던 국왕에게 제동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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