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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한 가지 해법(문 닫기)③: 신미양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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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한 가지 해법(문 닫기)③: 신미양요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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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해법(문 닫기)

 

 

비록 규모는 크지 않은 전투였지만 중국과 일본이 모두 실패한 제국주의 열강과의 교전에서 조선은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진짜 승리일까? 사실 프랑스군은 마음만 먹는다면 야포를 동원해서 산성을 재점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을 정복할 목적으로 온 게 아닌 이상(그랬다면 겨우 1천 명의 병력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실제로 베이징에 돌아간 로즈는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평했다). 더욱이 조선은 승자였으면서도 잃은 게 훨씬 많았다. 전쟁의 사상자보다도 더 큰 손실은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300여 권의 도서들을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의 외교에서 숙제로 남아 있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는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래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부른 병인양요(丙寅洋擾)는 그럭저럭 극복했으나 그 다음의 시험은 쉽지 않았다. 이번의 시험문제는 제너럴 셔먼 호를 수장시킨 대가를 어떻게 치를 것이냐다. 1871년 봄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의 군함 다섯 척과 1200명의 병력이 또 다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난다. 5년 전 상황과의 차이, 처음부터 응징과 보복을 부르짖었던 프랑스와 달리 미국은 이미 침몰한 배는 어쩔 수 없으니 그 대신 통상을 하자고 나섰다는 점이다. 물론 군함을 보낸 것을 보면 단순히 거래를 트자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태도가 그러하니 일단 조선 측에서도 교섭 대표를 미국함선에 보낸다. 그러나 트집을 잡아서 힘으로 굴복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에서 통상 협상을 벌인다는 게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 공식이 아닌가? 게다가 조선 정부도 실은 서양 오랑캐와 통상할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이렇게 서로 간의 속셈이 다르니 교섭 협상이란 구실일 따름이다(실제로 미국 함대는 일본 해역에서 보름 동안 기동훈련을 실시하고 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과연 로저스는 협상 대표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함대를 강화도로 진격시켰고, 5년 전의 악몽을 떠올린 조선군은 먼저 대포를 쏘았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신미양요(辛未洋擾)는 결과를 따지기가 애매하다. 우선 전쟁으로 보면 화력에서 앞선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강화도에 성조기를 꽂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얼마 안 가서 철군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여느 제국주의 열강이 모두 그렇듯이 미국은 조선 본토는커녕 강화도조차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조선의 개항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의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와 정반대로 강화도는커녕 조선 본토까지 적에게 정복된다 해도 개항을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랬으니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도 두 손 들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화도의 복군? 제너럴 셔먼 호는 미국의 미끼였고, 조선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사진은 강화도에 상륙해서 공략하는 미군의 모습이다. 마치 남북전쟁의 한 장면 같은데, 남북전쟁이 난 지 불과 6년밖에 안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미군은 강화도를 손에 넣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계속 점령하지는 못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 정부의 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서양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통상이든 뭐든 그들과 일체의 대화나 교섭도 하지 않는 것이다. 대원군 정권의 유명한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다마침 그 무렵에는 대원군 자신도 서양인들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을 품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제국주의의 앞잡이답게 통상의 의도를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낀 프랑스 신부 페롱은 조선의 교도들에게서 대원군에게 가장 소중한 게 바로 아버지의 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파내서 유골과 부장품을 가지고 통상 협상을 벌이려는 계획을 꾸미고 각국 국적으로 이루어진 140명의 도굴단을 조직했다. 묘가 워낙 견고해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천륜을 무시한 행위였으므로 대원군만이 아니라 조선 국민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동양처럼 조상신의 천륜을 모르는 서양인들조차 이 사건을 마뜩찮게 여겨 이후 프랑스와 미국 정부는 거기에 가담한 신부와 자국인들을 소환하고 처벌했다.

 

한 나라가 아니라 개인이라 해도 무릇 정책이라면 주변 정황이나 객관적인 정세를 고려하는 게 기본이라고 보면, 바깥에 대해서 아예 눈을 꽉 감아 버린 쇄국정책을 과연 정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 어쨌든 이제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대원군 자신도 그것만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조선이 조선인들의 나라가 아닌 국왕과 사대부(士大夫)들의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야만의 제국주의 신미양요 때 광성진 공방전에서 전사한 아군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이다. 통상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된 제국주의 만행은 오히려 조선의 문을 닫아걸게 만들어 쇄국정책이라는 강력한 빗장수비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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